천붕지열
찬물이 얼굴에 부어지자 천사성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마지막 기억은 화령의 수하가 자신을 마차로 데려다 눕히던 장면이다. 마차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는데 눈을 뜨고보니 사지가 묶여 있었다.
사지가 밧줄로 꽁꽁 묶여있지만 목을 돌릴수는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창문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방안을 횃불 두개로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세명의 사내가 천사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둘은 구레나룻이 덥수룩하고 덩치도 크고 생김새도 비슷해 보이는 것이 쌍둥이나 형제 같았다. 손에 굵은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것이 여차하면 천사성을 팰 기세다. 그리고 남은 자는 손에 백정들이나 쓸법한 커다란 도살용 식칼을 들고 있었다.
작은 방은 피비린내와 노린내로 꽉 차 있었다. 천사성이 정신을 차리자 손에 칼을 든 덩치가 작은 자가 몽둥이를 든 구레나룻중 하나에게 명령했다.
"의뢰주가 준 서신을 이자에게 보여주거라."
구레나룻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낸 후 잘 펼쳐서 천사성의 눈앞에 가져다 대었다. 식칼은 곧바로 짜증을 냈다.
"눈에서 한뼘반 정도 거리를 두고 보여줘야 다 읽을 수 있다. 그렇게 가까이 가져다 대면 어떻게 서신을 전부 읽을 수 있겠느냐."
"안 보여주고 그냥 보여줬다고 하면 되지. 뭘 그리 깐깐하시오."
털보가 투정을 부리자 식칼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맨손으로 도마에 손자국을 내는 자이다. 그냥 시키는대로 하는게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야. 이번 장사 끝내고 다른 곳으로 터를 옮겨야겠다."
털보가 서신을 조금 뒤로 물리자 서신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단숨에 서신을 읽은 천사성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미래의 천하제일검 천공자에게
아마 지금 이 서신을 보고 있는 천공자는 저승에 한발을 들여놓고 있을 것이오. 혹시나 어리석은 천공자가 상황파악을 못할까 걱정되어 이렇게 서신을 남기오. 지금 천공자와 함께 있는 자들은 인육을 파는 자들이오.
원래 천공자가 화산의 요직에 앉으면 잘 써먹으려고 했소.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꾸며내어 천공자를 사모한다고 했소. 설마 천공자가 그 말을 덥썩 믿어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내가 살아있는 한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말에 조금 마음이 움직이기도 했소. 그 말에서 진심을 느꼈소. 하지만 나는 화산의 제자이자 고수인 천공자가 필요한 것이지 천살성이고 화산에게 버림받은 천공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오.
원래 천공자를 서장로에게 데려가서 동맹을 공고히 한 후 무림맹에서 요직을 차지하려 했소. 하지만 서장로의 인내심이 내 생각보다 약했소. 천공자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서장로는 곧바로 천공자가 천살성이며 자신이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천살성의 기운을 눌러왔다고 발표했소.
천공자를 죽이면 천살성의 살기(煞氣)에 침식당해 큰 화를 당할것이라며 꼭 생포해서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신신당부 하더군. 천공자는 이제 쓸모없는 자가 되어버렸소. 그냥 쓸모없는 자라면 내가 손수 천공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드렸을 터이나 천공자는 그냥 쓸모없는게 아니라 죽인자에게 화를 불러오는 아주 몹쓸 자요.
어쩔수 없이 인육을 파는 백정들에게 천공자를 넘겼소. 살아봤자 쓸모 없는 천공자가 죽어서라도 누군가의 입맛을 만족시키고 배를 불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공덕이 아닐까 싶소.
길게 적고 싶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아 짧게 적소. 저승에 가면 수련을 열심히 해서 지옥제일검이 되시구려. 그리고 다른 여자귀신들한테 한눈 팔지 마시기 바라오.
죽어서 악귀라도 되면 천산의 화령을 찾아가시오. 나를 찾지 마시고.'
천사성이 서신을 다 읽은 눈치이자 털보는 바로 서신을 횃불에 태웠다. 곧장 두 털보가 굵직한 몽둥이로 천사성의 전신을 때렸다. 식칼은 옆에서 구경을 하며 천사성에게 왜 때리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사람의 피는 동물의 피와 달라 대단한 보약이다. 이렇게 때려서 핏줄이 최대한 많이 터져야 고기속에 핏물이 많이 배어든다."
천사성이 태연한 어조로 식칼의 말을 받았다.
"사람을 도축할 때는 어디부터 칼을 대시오? 죽기전에 궁금한 거나 풀고 갑시다."
두 털보의 몽둥이질은 천사성의 아픈 마음에 비하면 그저 가려운데를 긁어주는 수준이다. 화가 너무 나면 사람이 도리어 웃는다더니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자 천사성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그거야 고객이 원하는 부위에 따라 다르지. 너는 염통과 간이니 배와 가슴을 갈라야 하지 않겠느냐?"
"염통과 간을 원하는데 왜 아프게 패는 것이오. 어차피 고기는 버릴 것이 아니오?"
"고기는 다른 고객에게 싸게 넘겨야지. 음식을 버리면 벌받는다는 얘기를 못 들었느냐?"
"어릴때 시골에서 자랐는데 먹을게 귀해서 음식을 버린적이 없소. 한번은 흉년이 들었는데 글쎄 오일동안 물만 마시고 쌀 한톨 구경하지 못했소. 그래서 내가 칼을 가져다가 내 배를 갈랐소."
"내 간을 일부 베어내고 창자를 일부 베어내서 부모에게 먹으라고 권했소. 그런데 둘이서 허겁지겁 다 먹어버리는 것이 아니겠소. 내 몫은 남기지도 않고 말이오."
천사성의 말에 두 털보의 몽둥이질이 뜸해졌다. 식칼이 호통을 치고 나서야 다시 열심히 몽둥이질을 했다.
"그래서 화가 난 나는 칼로 부모를 찌르고 그 고기와 뼈를 다 씹어먹었소. 그런데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것이오.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니 창자가 끊어져서 거기로 다 새어나가는 것이 아니겠소."
말을 마친 천사성은 낄낄거리며 웃었다. 한편으로는 어지럽고 혼란해서 입으로 아무 말이나 막 내뱉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말짱한 정신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제삼자처럼 지켜보고 있었다. 두가지 시야와 감각이 가져다주는 혼란 때문에 천사성은 메스꺼웠다.
"대형, 이자는 그냥 도축합시다. 미친놈 같아서 더 살려두다간 우리도 광증이 옮을 것 같소."
보통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돈을 준다고 회유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겁에 질려 똥오줌을 싼다. 천사성처럼 태연하게 헛소리를 하는 미친놈은 여태껏 없었다. 식칼도 목덜미가 으스스해서 그냥 도축하기로 마음 먹고 두 털보를 밖으로 내보내 망을 보게 했다.
천사성의 배에서 희미한 칼자국을 발견하자 식칼은 다시 한번 섬뜩함을 느꼈다. 인육장사라는 것이 웬만한 담력으로는 못할 일이다. 그런 식칼도 천사성이 두려웠다. 사지가 꽁꽁 묶여서 곧 도축될 자가 무서울 것이 없다고 속으로 되뇌이며 식칼은 천사성의 배에 칼을 댔다.
배를 가르기전에 식칼은 천사성의 눈을 한번 바라봤다. 겁에 질린 눈을 기대하며 쳐다봤지만 오히려 겁에 질린 것은 식칼이었다. 흰자위가 핏물에 담근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눈동자는 창백한 은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곧 우지끈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지를 묶은 밧줄들은 멀쩡한데 나무로 된 침대가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식칼이 급히 칼로 천사성의 배를 찔렀지만 나무를 찌르는 듯 칼이 들어가지 않았다.
식칼은 천사성이 마구 휘두르는 손에 맞아 왼팔이 부러졌다. 천사성은 이성을 잃고 자신을 묶었던 침대를 내려치고 있었다. 식칼은 급히 몽둥이를 찾아 천장을 두드렸다. 밖에 나가있던 털보들이 문을 열고 소리쳤다.
"오늘은 왜 이렇게 빠른 것이오."
하지만 천사성이 난동을 부리는 것을 보고 곧바로 식칼을 끌어올렸다. 천사성은 천장에서 빛이 들어오자 훌쩍 뛰어 밖으로 나갔다. 사람이 일장이 거의 되는 높이를 단번에 뛰어오를 것이라 예상못한 두 털보는 미처 천사성을 막아내지 못했다.
천사성이 밖으로 뛰쳐 나가자 식칼은 곧바로 몽둥이를 놓아버렸다. 한팔로 천사성을 묶었던 침대를 끌어움직인 후 침대위에 올라서서 천장의 나무문을 닫고 안으로 걸어버렸다. 밖에서 털보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지만 식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먹질과 발길질로 두 털보를 살덩어리로 만든 천사성은 곧바로 나무문을 내리쳤다. 기름까지 먹여 튼튼하게 만든 나무문은 꽤 오래 버텼다. 하지만 결국에는 천사성의 두 주먹에 박살이 나고 다시 돌아온 천사성에 의해 식칼도 고깃덩이가 되어버렸다.
몸의 통제권을 잃은 천사성은 자신의 몸뚱이가 부리는 광기를 지켜보기만 했다. 지난번에는 기절한 것처럼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명확히 느껴졌다.
식칼까지 죽인 후 광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천사성은 몸의 통제권을 되돌리려 애를 썼다. 그리고 그 노력은 조금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곧 승복을 입은 중들이 들이닥쳤다. 통제권을 잃은 천사성의 몸은 알아서 중들을 공격했다. 본능적인 움직임밖에 없는 천사성의 공격을 쉽게 피해냈지만 힘이 대단하여 쉽게 제압하기 힘들었다.
곧 나이가 든 중년의 중 두명이 나타나서 천사성의 제압을 시도했다. 외공인 금강공을 익힌 두명의 중은 천사성의 손발을 제압하여 밧줄로 꽁꽁 묵었다. 천사성이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팔다리의 관절부위도 밧줄로 묶어서 팔다리를 쉽게 굽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미친놈은 어떻게 돼먹었는지 혈도가 아예 짚히지 않는구나."
중들은 긴 나무막대기를 구해다가 사냥한 호랑이나 멧돼지를 옮기는 것처럼 천사성을 옮겼다. 세 인간백정을 죽이고 가라앉던 광기가 중들의 등장에 다시 한번 폭발했다. 뻘건 눈을 하고 입으로 침을 줄줄 흘리는 천사성을 보며 중 한명이 입을 열었다.
"인육을 자주 먹으면 미친다더니 이자가 저들의 우두머리가 틀림없어 보입니다."
"인육장사를 하는 자들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구나."
천사성이 중들에게 잡혀서 끌려갈 때 개봉으로 향하는 마차에서도 천사성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시킨 일은 다 제대로 처리했느냐?"
"인육장사를 하는 놈들에게 천살성을 넘겼고 소림의 중들에게는 인육장사를 하는 놈들의 본거지를 밀고했습니다. 소림의 중들이 밀고를 확인하고 출발하는 것을 확인했으니
아마 천살성이 죽으면 그 화가 인육장사를 하던 놈들과 소림에게 미칠 것입니다."
- 작가의말
天崩地裂,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다.
주인공이 나이도 어리고 힘도 없고 배경도 없고 제대로 배운것도 없고 해서 많이 휘둘립니다. 보통 프롤로그에서 몇마디로 압축하는 과정을 이십여화로 풀어쓴 제가 대견합니다. 이제 힘을 얻고 역갑질을 할 사이다 구간만 남았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정 사이다가 시원하지 않으면 다음 외전에 사이다 등장 시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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