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급쟁탈
장현성은 눈밑이 거뭇하게 죽어있고 입술이 말라터져서 피딱지가 앉았다. 며칠전 객잔에 들려서 시킨 소면은 입에 넣자마자 독이 든 것을 알아차렸다. 곧바로 뱉어냈지만 혀가 두배의 두께로 부어올랐고 목구멍도 부어서 숨쉬기 살짝 힘들었다. 장현성은 곧바로 경공으로 도망을 쳤다.
겨우 도망을 쳐서 달리다가 샘물을 발견했다. 맑고 깨긋한 샘물을 한모금 마셨는데 곧바로 배가 아파왔다. 급히 내공으로 마신 물을 토해냈지만 복통이 지속되었다. 한참 도망치다 나무에 달린 과일 하나를 뜯어먹었다. 일부러 잘 익은 과일들은 무시하고 높게 달리고 설익은 것을 골라먹었는데 그만 배탈이 나고 말았다.
과일이 설익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누군가 과일에까지 독을 탄건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그뒤로 장현성은 비가 내릴 때 빗물을 받아먹고 음식이나 과일은 일절 손대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니 독성분은 다 사라졌지만 허기를 참기 힘들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밑이 거멓게 변했다.
꽤 넓은 강물을 발견한 장현성은 기쁜 마음으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렇게 큰 강물에까지 독을 타는건 불가능할 것이다. 물을 양껏 들이킨 장현성은 손바닥정도의 크기의 물고기를 잡아서 생으로 뜯어먹었다. 비린내가 물씬 풍겼지만 장현성은 그런것을 따질 계제가 되지 못했다.
갈증과 배고픔은 해소했지만 수면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다. 장현성은 높은 나무위로 올라갔지만 자신의 뒤를 쫓는 자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몰려오는 졸음을 이겨내기 힘들자 장현성은 허리띠로 자신의 몸을 나무에 묶은 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중간중간 잠에서 깨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오후부터 시작해서 여섯시진 이상 잠을 잔 장현성은 몸에 쌓였던 피곤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새벽이 어스름히 변하자 장현성은 허리띠를 풀고 나무 아래로 내려가려 했다.
그런데 나무아래에 득실득실한 뱀들을 보니 내려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무늬를 가진 뱀들의 세모난 대가리를 보니 독사들이 꽤 많이 섞여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밑에 있는 수백마리의 뱀들이 전부 독사일지도 모른다.
"어디의 고인이시오? 이 장모가 선행을 많이 베풀진 못했어도 악행을 저지른적은 없다고 자부하오. 혹 재물이 목적이라면 이 장모는 가진돈이 얼마 없으니 사람을 잘못 선택한 것 같소."
장현성의 말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 쓰고 있던 얇고 투명한 천을 거두니 그제야 장현성의 눈에 보였다. 나쁘지 않은 은신술에 천잠(天蠶 - 하늘누에)의 실과 은사를 섞어서 짠 은잠포(隱潛袍 - 은신잠복용 옷)의 도움을 받으니 장현성은 자신의 뒤를 쫓는 자들의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된 것이다.
"네가 누군지는 모르고 관심도 없다. 다만 네 몸에 재물이 많다는 확실한 정보를 들었다. 정 살고 싶으면 몸에 있는 재물을 다 내놓아라. 우리 마음이 흡족해질 정도의 재물이라면 목숨은 살려주겠다. 재물이 적을 경우 네 목숨을 취해 분을 풀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자의 말이 끝나자 사방에서 여럿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중해서 소리가 나는 곳을 자세히 살펴보니 무언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게 내가 가진 전부요. 어디에서 그런 거짓된 정보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내 몸에는 재물이 은자 몇개가 전부요."
장현성은 몸에 가진 은자 전부를 나무아래로 던졌다. 하지만 은잠포를 벗은자는 은자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너한테 사용한 독들의 가격이 얼마인지 아느냐? 이깟 은자 몇개로 우리가 만족할 것 같으냐? 가슴쪽이 불룩한 것이 아직도 많은 재물을 숨겨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구나. 내 너를 불쌍히 여겨 살길을 열어주려 했는데 주제를 모르고 속이려고 드느냐? 그저 네 목숨을 취하고 시체를 수색하는게 더 편함을 모르느냐?"
장현성이 가슴에 숨긴것은 천마신공의 비급이다. 기름종이로 꽁꽁 싼 다음에 가죽주머니에 넣고 아가리를 꽁꽁 봉했다. 장현성도 우둔한 자가 아니니 이자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챘다. 가죽주머니안에서 비급을 꺼낸 장현성은 비급을 흔들며 추적자들을 위협했다.
"너희 목표가 무엇인지 이제야 알겠구나. 당장 이 뱀들을 물리고 너희들도 멀리 물러나거라. 그러면 내가 이 비급을 필사해서 너희에게 넘기도록 하겠다. 내 말에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비급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모습을 드러낸 자는 잠시 침묵을 하더니 단소(短簫 - 짧은 퉁소)를 하나 꺼내 입에 가져다 대었다. 바람이 대나무숲을 스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뱀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을 지어 삼으로 짠 마대안으로 들어갔다. 뱀들이 다 들어가자 밧줄로 그 마대입구를 꽁꽁 동여맸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떤 꼴이 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장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려 했지만 온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빳빳하게 굳은 장현성의 몸은 나무에서 그대로 떨어졌다. 추적자들은 은잠포를 벗고 떨어지는 장현성의 몸을 받아냈다. 장현성의 목덜미에는 손바닥크기의 독거미가 달라붙어 있었다.
장현성의 손에 쥐어진 천마신공의 비급을 가져다 훑어본 추적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교주의 필체가 분명하다. 글씨에 이렇게 흉흉한 기세를 담을 수 있는 것을 보니 교주의 무공이 등봉조극(登峰造極)에 이른 것 같구나."
"사장로의 졸개들이 우리 뒤를 바싹 쫓고 있으니 잘 숨어야겠소. 어디로 가는게 좋다고 생각하시오?"
"귀주나 광서쪽이 좋을 것 같다. 다른 곳들은 다 강한 세력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힘을 키우기 힘들다."
"광서는 명화교가 자리잡고 있으니 귀주로 갑시다. 우리 재주를 조금만 보여주면 귀주의 대부족들이 앞다투어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할 것이오."
장현성은 이들의 말을 들으며 오늘이 자신의 제삿날임을 깨달았다. 살려둘 생각이라면 자신들의 행적을 숨겼을 것이다. 이들의 인솔자인 선연이 검을 뽑아 장현성의 몸에 상쳐 몇개를 냈다. 그리고는 살짝 회색을 띈 하얀가루를 상처에 쏟았다. 바로 화골산이다.
장현성은 화골산이 살과 뼈를 녹이는 고통속에 장원산이 생각났다. 자신은 그래도 장원산을 죽인후에 화골산을 사용했다. 하지만 이 인간같지도 않은 작자들은 살아있는 자신에게 화골산을 쏟았다. 고통은 그대로 느껴지지만 독거미의 독에 마비가 되어서인지 까무러치지는 않았다. 장현성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화골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삼은 자신의 가슴으로 찔러오는 창을 무시했다. 그대로 오른손의 검을 휘둘러 오른쪽에 있는 콧수염의 머리를 후려쳤다. 콧수염은 고삼의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 즉사했다.
고삼은 횡련일기공뿐 아니라 횡련태보도 꾸준히 수련했기에 내력이 실리지 않은 창의 찌르기는 고삼의 옷에 작은 흠집만 냈다. 고삼이 훌쩍 다가가자 창을 찔렀던 자는 창을 버리고 도망을 시도했다. 하지만 경공을 사용한 고삼보다 빠를 수 없기에 뒤통수가 검에 맞아 깨졌다.
고삼의 검은 날도 제대로 세우지 않아 검이라기보다는 손잡이가 달린 몽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삼이 굳이 검을 고집했기에 검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 고삼에게 가장 적합한 무기는 유성추나 낭아방 같은 중병기이다.
무게가 서른근은 넘어 보이는 귀두도가 고삼의 목을 향해 베어왔다. 고삼은 왼손의 검으로 귀두도를 막고 오른손의 검을 상대의 몸통을 겨냥하고 던졌다. 귀두도를 사용하는 자는 이 수적채의 채주이다. 몇 안되는 내공을 익힌 무인중 하나인 채주는 필살의 의지를 귀두도에 실었다.
하지만 그 필살의 의지는 관철되지 못했고 고삼이 던진 검에 적중당한 채주는 필사의 처지에 놓였다. 입을 열어 용서를 빌려는데 고삼이 발로 바닥에 쓰러진 채주의 목을 딛었다.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채주의 숨도 멈췄다.
고삼이 다시 검을 주어들자 수적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도망갔다. 고삼은 화가 풀리지 않아 경공으로 이리저리 날뛰며 수적들의 목숨을 취했다. 고삼은 사도를 벗어날때 백냥이 넘는 은자를 챙겨서 떠났다. 객잔에서 보따리를 내려놓을 때 묵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수적들의 표적이 되었다.
수적들은 사천으로 향하는 배를 수소문하는 고삼에게 접근해 속여서 배에 태웠다. 고삼의 덩치와 무기 때문에 안전하게 수적채에 유인해서 은자를 빼앗으려 했는데 알고보니 물주가 아니라 염라왕이 보낸 저승사자였다.
고삼은 피를 보고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날뛰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보니 사도에 비하면 아주 작은 섬에는 고삼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급히 나루터에 가보니 배들의 밑창에 구멍이 나서 전부 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다. 도망가는 자들이 고삼이 쫓아오지 못하게 남은 배들을 전부 침몰시킨 것이다.
한철을 섞어 만들었지만 음혈과 달리 날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았고 만련을 거친것도 아니기에 고삼의 쌍검에는 피가 흥건이 묻어 있었다. 호숫물에 검을 깨끗이 씻은 고삼은 피묻은 옷과 몸에 묻은 피들도 깨끗이 씼었다. 자신의 손에 죽은 자들의 시체를 한켠에 모은 뒤 주변에 장작을 쌓아 전부 화장을 시켰다.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자 고삼은 시체가 타는 곳과 멀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욕지기가 계속 올라오더니 울컥 하고 검은피를 토해냈다. 그제야 배를 타고 올 때 이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무래도 강한 독은 아니고 하독하는 솜씨가 부족해서 이제야 독이 발작한 모양이다.
딱히 요상법이나 해독하는 운기법을 모르는 고삼은 앉아서 지난번 무의식중에 깨달은 운기법을 운용했다. 대성의 경지에 이른 후 더이상 진전이 없는 횡련일기공에 비해 내공심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심법은 내공을 모으는 속도가 꽤 빨랐다. 그리고 그 내공들이 단전에 모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천살이 예전에 단전의 내공이 발전하면 혈도의 내공들도 거기에 맞춰 천천히 늘어날 것이라고 했었다.
'대형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아마 횡련일기공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세의 신공을 수련하고 계시겠지?'
초화규의 손에 들린 막대기는 내력을 실은 채 천살의 뒤통수를 향해 때려갔다. 뒤통수에는 뇌호혈을 비롯한 사혈이라 할 수 있는 혈도들이 있다. 그리고 굳이 혈도가 아니라도 단단한 막대기에 내력까지 실어서 뒤통수를 때리면 생명의 위험이 있다.
천살은 잽싸게 몸을 움츠려 초화규의 막대기를 피한 뒤 도망을 쳤다. 초화규가 내력을 사용하여 두팔로 달리면 순간속도는 천살보다 빠르다. 천살에게 잡혀서 두들겨 맞는것은 초화규의 체력과 내력이 천살의 체력을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화규는 도망가는 천살을 뒤쫓았지만 손에 들린 막대기 때문에 평소 도망칠때의 속도가 나지 않았다.
천살이 숨겨둔 음혈을 손에 쥐고 몸을 돌리자 초화규는 막대기를 버리고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둘의 역할이 바뀐 것이다. 천살의 내공없이 펼치는 경공의 경지가 많이 높아져 반시진도 안되어 초화규는 천살에게 잡혔다. 천살은 음혈대신 나무 막대기로 초화규에게 매타작을 했다.
반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내공이 돌아오지 않자 천살은 횡련일기공를 다시 익혀보려고 했다. 공동속의 나무들은 천살의 허리를 넘는 나무가 몇그루 되지 않는다. 천살은 며칠간의 노력으로 겨우 든든하고 탄성도 강한 나무 막대기를 찾아서 초화규에게 전신 혈도들을 때려달라고 부탁했다.
천살이 횡련일기공의 운기법을 운용하는데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자 초화규는 기회다 싶어 천살의 뒤통수를 타격한 것이다. 천살은 허공을 가르는 막대기의 파공성을 듣고 피해낸 것이고 말이다.
'젠장, 절세의 신공들을 놔두고 이게 무슨 꼴이람. 천살마기만 아니었으면 네놈은 내 손에 열번도 더 죽었다.'
천살은 요즘따라 활동이 활발한 천살마기 때문에 피를 보는데 매우 조심하고 있다. 동자공이 깨지고 복마공을 운용할 내공도 없기에 천살로서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내공이 사라진 후 오히려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작가의말
추적자들이 왜 장현성을 바로 죽이고 무공비급을 취하지 않고 며칠씩이나 쫓았을까 의문이 드는 분들이 계실까 설명 드립니다.
추적자들은 비급이 장현성의 몸에 있는지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한 독으로 장현성을 건드린 후 토끼몰이를 한 겁니다. 장현성이 비급을 꺼내들고 찢어버린다고 위협을 하지 않았으면 장현성의 목숨을 취하지 못하고 계속 따라다녔을 겁니다. 장현성은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 되니 머리를 굴렸는데 제대로 굴리지 못한 것이죠. 장원산의 원혼이 달라붙어서 그런건지는 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은 두편으로 끝내겠습니다. 오늘 다들 좋은 일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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