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두구육
천사성은 유백의 태도가 지난번하고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감지했지만 그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저는 사년간 글공부만 했고 무공수련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년동안 내공수련을 했는데 아무 성과도 없는것을 보니 무공에 자질이 없는 모양입니다. 세분과 비무를 하며 교분을 다지지 못하는 것은 저로서도 안타깝습니다."
유백은 천사성이 거절할 경우 반박할 말을 수두룩히 준비해 놓았다. 그래서 천사성의 거절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여기 유숙도 올해 갓 화산의 제자로 들어와서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소. 내가 기본공을 가르쳐 드릴테니 둘이 서로 대련을 하며 발전을 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소."
천사성은 유백이 무공을 가르친다는 말에 혹했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승낙한 것을 거둘수는 없었다.
"그럼 우선 천공자에게 화산의 기본공인 육합권을 가르쳐 드리리다. 육합권은 소림에도 있고 종남에도 있고 무당에도 있소. 하지만 각파의 육합권마다 권의가 다르니 형태도 다르오. 딱 한번만 시연할테니 잘 여겨보시오."
기본무공인 육합권은 초식이랄것도 없고 투로가 존재할 뿐이다. 하나의 자세나 동작에서 다음 자세나 동작으로 넘어갈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 장차 화산의 무공을 익히며 초식을 연결할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이다. 그러니 기본무공이라고 무시했다가는 이후 정종무공을 익히는데 지장을 받는다.
유백은 육합권을 한번 시연한 후 천사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비웃었다. 발끝의 방향, 눈이 바라보는 방향, 주먹을 쥐는 방법, 팔꿈치와 무릎의 각도 등 신경써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기본무공이라고 해도 한번 보고 그 요체들을 전부 파악할 정도로 허술한 무공은 아닌 것이다.
유백은 천사성에게 연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유숙과 대련을 시켰다. 유숙은 화산파에 입문한지 몇달이 되지 않지만 유가장에서부터 무공을 수련한 몸이다. 천사성은 한번도 반격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했다.
하지만 천사성은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버텼다. 유백의 시연과 유숙의 실전에서의 동작은 조금씩 어긋났다. 유숙이 미숙해서 동작이 틀린건지 실전에서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변화시킨건지 확인해야 한다.
일각도 되지 않아 때리기만 한 유숙이 지쳐나갔다. 그러자 유중이 유숙의 자리를 대신했다. 유중의 주먹은 유숙보다 훨씬 매서웠고 동작도 더 간결하고 효과적이었다. 오후내내 흠씬 두들겨맞은 천사성은 날이 어두워지자 아쉬운 심정으로 유씨 삼형제에게 내일도 와줄수 있는지 질문했다.
"천공자께서 이리도 간절히 원하니 내일도 찾아오겠소."
유백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하고 함께 연화봉으로 돌아갔다. 때리기만 한 유숙과 유중이 지쳤는데도 천사성이 쌩쌩해 보이자 과연 천살성을 타고난 자는 뭐가 달라도 다른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자운은 삼형제가 나타나자 바로 질문했다. 반시진이 넘는 시간동안 때리기만 했는데도 천사성이 전혀 흉성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말에 조자운은 셋에게 파옥권의 옥쇄와전(玉碎瓦全 - 옥으로 부서질 지언정 기와로 완전히 남지 않겠다)의 초식을 전수했다.
옥쇄를 할 지언정 와전하지 않겠다는 말로 굴하지 않는 기개를 표현한다. 옥쇄와전은 말 그대로 옥만 부수고 기와는 그대로 두는 초식이다. 강한 힘으로 공격하는 것보다 적당한 힘으로 요해를 정확하게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초식으로 힘이나 내공이 약한 자들이 사용하기에 적합하다.
유중과 유숙은 효자봉까지 왕복하고 천사성을 때리느라 힘이 빠졌지만 옥쇄와전의 초식을 열심히 수련했다. 변과 환을 섞어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킨 후 요해를 정확히 공격하는 것이 초식의 요체이다. 정확한 공격을 하기 위해 심기체가 통일되어야 하기 때문에 셋은 밤늦게까지 수련에 열중했다.
한편 천사성은 유숙과 유중에게 얻어맞은 곳들이 욱신거렸다. 아노는 천사성이 둘에게 얻어맞는것을 보았지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동자공의 수련을 끝낸 천사성은 평소와는 다르게 곧바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난 천사성은 온몸의 멍이 사라진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저녁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던 멍자국들이 전부 사라진 것이다. 일어나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크게 불편한 곳도 없었다.
동자공의 효과가 슬슬 나타나는 것이라고 천사성은 기뻐했다. 하지만 아침에 수련한 동자공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천사성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혹시 자신이 잠든 사이 아노가 약초로 치료해준 것은 아닌지 아노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전에 천사성은 글공부를 뒷전으로 하고 육합권을 수련했다. 아노는 여전히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 육합권의 투로를 한번씩 반복할 때마다 천사성은 몸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얼마되지 않아 유씨 삼형제가 나타났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유숙과 천사성이 우선 대결을 하였다. 여전히 유숙이 일방적으로 공격하고 천사성은 막는데 급급했지만 유숙은 전날보다 훨씬 빠르게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곧 유중이 유숙을 대신했다. 유중도 전날과 달리 좀더 강해진 저항을 느꼈다. 전날에는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패는 느낌이라면 오늘은 사람을 상대하는 느낌이었다. 유중도 얼마되지 않아 지쳐서 뒤로 물러섰다.
유백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 앞으로 나섰다. 화산의 속가제자로 입문한지 몇달밖에 안되는 유숙이나 이년 조금 넘은 유중과는 달리 유백은 사년차이다. 유백이 천사성을 때려 문제를 일으키면 유중이나 유숙처럼 간단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자운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모험은 해야 한다.
나이가 많이 차이나기 때문에 덩치나 힘의 차이가 엄청났다. 거기에 유백은 유숙이나 유중처럼 힘조절도 못하는 애송이가 아니다. 천사성은 전날처럼 흠씬 두들겨맞아 거의 실신지경이 되었지만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저녁이 다가오자 천사성은 전날과 같이 부탁을 했고 유백은 내일 또 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천사성의 정중한 포권을 뒤로하고 유씨 삼형제는 연화봉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형, 천사성이라는 자가 어제보다 잘 피하고 잘 막는 것 같습니다."
유숙의 말에 유중도 고개를 끄덕였다. 유백의 어조에도 감탄이 서려있었다.
"고작 하루만에 저렇게 빠른 발전을 보일줄은 몰랐다. 그나저나 대사형을 만나면 어떻게 얘기해야 하는지 알지?"
"그럼요. 옥쇄와전의 초식까지 이용해서 때렸는데 여전히 침착을 유지했잖아요."
삼형제의 말을 전해들은 조자운은 삼형제에게 양옥불전(良玉不瑑 - 좋은 옥은 다듬을 필요가 없다)의 초식을 가르쳤다. 양옥불전은 초식을 정확하게 시전하면 내기가 자동으로 움직이는 동공의 초식으로 초식을 사용할 때 운기할 필요가 없는 간편한 초식이다. 내공의 수발이 자유로운 고수들에게는 계륵과 같은 초식이나 초보자들에게는 절초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조자운이 떠나자 세형제는 내일은 옥쇄와전의 초식을 사용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옥쇄와전과 양옥불전의 두 초식만 해도 셋이 일년동안 꼬박 수련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초식이다. 여기서 더이상 욕심을 부려 조자운의 의심을 살 필요는 없다.
한편 천사성은 아침에 일어나 전날 생겼던 멍들이 깨끗하게 사라지자 신기한 마음이 들었다. 칼로 찌르면 어떨지 궁금했지만 감히 시도를 하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숙모에게 배를 찔린 기억이 남아 있어서 날카로운 쇠붙이를 보면 괜히 움츠러들었다.
오후가 되자 유숙부터 시작해서 옥쇄와전의 초식을 사용했다. 천사성은 세형제의 손짓과 움직임에 속아 명치나 옆구리의 요해들이 사정없이 가격당했다. 하지만 천사성은 신음소리도 내지 않고 묵묵히 견뎌냈다.
저녁이 되자 연화봉으로 돌아가는 세형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셋이서 번갈아가며 옥쇄와전으로 요해를 가격했는데 천사성은 신음소리를 한번도 내뱉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옥쇄와전의 초식을 몇번이나 막아내기도 했다.
파옥권과 같은 화산의 정종무공은 하나의 초식이 일반문파의 권법과 비슷하다. 수많은 변초와 응용이 있기 때문에 하루만에 막아낼 수 있는것이 아니다. 셋이 수련이 부족해서 초식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천사성이 보여준 모습은 이들이 질릴만 했다.
목적을 달성했는지 캐묻는 조자운에게 유백은 자신들이 초식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서 위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조자운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성급했음을 깨닫고 옥쇄와전과 양옥불전의 초식을 자세히 풀이해주고 셋의 수련을 도와주었다. 셋이 옥쇄와전을 그럴듯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고 칭찬까지 해주었다.
세형제는 겉으로는 조자운의 칭찬에 감격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놀라고 있었다. 조자운은 약간 오만한 성정이라 입에 발린 칭찬을 하지 않는다. 조자운이 괜찮다고 하는것은 세형제가 사용한 옥쇄와전의 초식이 제법이라는 소리이다.
아무래도 반나절동안 천사성에게 사용하고 또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지켜봐서 수련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하지만 조자운의 눈에도 괜찮은 초식을 반나절만에 수비해낸 천사성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커졌다. 하지만 파옥권의 초식을 두개나 배워놓고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물러설 수는 없다.
만약 지금 천사성이 잠을 자지 않고 파옥권의 옥쇄와전을 연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세형제의 놀라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옥쇄와전은 내공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초식이라 천사성이 익혀도 어느정도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세형제와 천사성은 똑같은 초식을 땀을 흘려가며 수련했다.
- 작가의말
羊頭狗肉, 양대가리를 걸고 개고기를 판다.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내용물이 다른 경우를 꼬집는 말입니다. 무공 가르쳐준다 해놓고 주인공을 패는 유씨 삼형제. 하지만 주인공은 천살지체라 자연치유. 무공을 도둑질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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