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장촌단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내 길을 간다.'
천살은 객잔을 떠나 경사로 향하면서 다시 한번 다짐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기준이 생겼지만 세간의 평가가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에도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에 대한 헛소문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경사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과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어가친정을 해서 북원의 대부족 여럿을 굴복시키고 개선하여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몇년간은 북원기병들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백성들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을 느끼고 있다.
'나라에 황제가 필요하고 주체가 잘하고 있으니 굳이 목숨까지 취할 필요는 없겠구나. 경고만 확실하게 해두자.'
천살은 당무영과 고삼에게 경사에서 자신을 가다리라고 했다. 황제를 만나서 협박하는 일이니 혼자서 하는것이 낫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백여년후에 주체의 증손자나 고손자가 황제가 되어 당문이나 고삼의 후손에게 화풀이 할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성 북쪽의 땅은 황량했다. 토질이 좋지 않고 물도 부족하고 기후마저 농사에 적합하지 않다.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들이 넓은 초원을 정복하고 있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살아가니 중원의 기름진 땅을 부러워하고 가지고 싶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도 그저 상황에 휘둘리는 자들이구나. 하지만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지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들의 처지가 불쌍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
강한 힘을 가졌을 때 먼 앞날을 내다보며 그 힘을 절제했다면 지금 여전히 명나라가 아닌 원나라였을 수도 있다. 어차피 백성들이 바라는 것은 배곯지 않는 삶이다. 하지만 강한 힘으로 모든 것을 얻으려 했기 때문에 결국 힘이 약해지자 비참한 신세로 전락되었다.
명나라의 선봉을 확인한 천살은 몸을 허공에 띄워 본대의 위치를 짐작했다. 초원이라 시야를 방해하는 산따위가 없기에 말타고 반나절거리에 위치한 본대를 확인했다. 천살은 다시 경공을 사용해서 본대로 향했다.
주체는 늑대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팔딱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켰다. 세번째 만남은 두번째 만남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곁에 시중을 드는 환관 몇몇이 있는데 천살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 지금 천살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를 다시 보게될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폐하께서 정도만 걸으면 다시 나를 볼 일이 없을 것이오."
주체는 천살과 대화를 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는 환관들을 보자 자신이 무엇을 해도 소용이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때 환관 하나가 황제와 천살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갔다. 천살이 원하면 자신도 꼭두각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체는 목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은 사람이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일만 하고 싶소. 당장 성지를 내려서 무림맹을 해산시키시오. 마교와 서무림맹은 내가 해산시키겠소."
주체는 붓을 들어 무림맹을 해산시키라는 성지를 작성하고 옥새를 찍었다.
"왜 직접 무림맹을 해산시지 않고 하필 나더러 해산시키라는 것이냐? 혹시 황실과 무림의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것이냐?"
"세상이 순리대로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요. 모든 것을 내 힘으로 바꾼다면 내 힘이 사라졌을 때 세상에 큰 혼란이 올 것이오."
주체는 성지를 전령에게 지급으로 금의위의 지휘사에게 전달하라고 명했다. 전령이 출발한 것을 확인한 천살은 주체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우리 네번째 만남은 없었으면 하오. 다음번에는 빈손으로 오지 않을 것이오."
다음번에는 손에 칼을 들고 오겠다는 협박이다. 천살이 떠난 후에도 환관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할일을 하고 있었다. 천살과의 세번의 만남을 돌이키던 주체는 갑자기 입으로 선홍빛 핏물을 울컥 토해냈다. 환관들이 다급히 어의를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주체의 정신은 아득히 멀어져갔다. 주체는 더이상 천살과의 네번째 만남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경사에 돌아간 천살은 당무영과 고삼과 함께 청해호를 향해 출발했다. 배를 타고 운하를 통해 황하물길에 들어선 후 서안으로 향했다. 서안에 객잔을 잡은 뒤 천살은 둘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화산으로 향했다.
화산의 연화봉에서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조자운이 정식으로 화산의 장문인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찾아봐도 호매령이 보이지 않았다. 호매령과 더불어 조자운도 보이지 않자 천살의 마음속에는 걱정이 생겨났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옥녀봉이다. 천살이 몇년간 생활했던 옥녀봉은 건물들이 조금 낡았으나 연화봉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제대로 된 건물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옥녀봉도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듯 냉기가 감돌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화봉으로 다시 한번 발걸음을 한 천살은 여전히 호매령을 찾지 못하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효자봉으로 향했다. 효자봉은 천살과 호매령이 첫 만남을 가진 곳이다. 효자봉이 가까워질수록 천살의 심장은 세차게 요동쳤고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예전에 천살이 살던 나무집에 도착하니 작은 아이 하나가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무명천으로 지어입은 옷을 보니 귀한집 자식 같지는 않았다. 그때 나무집 안에서 그리웠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회야, 음식준비 다 됐으니 빨리 손 씻거라."
"예, 엄마."
아이는 흙장난을 그만두고 쪼르르 달려가 울타리 밖으로 흘러가는 개울물에 손을 씼었다. 예전에는 없었는데 물 긷는것이 귀찮아 수로를 파서 물을 끌어온 듯 했다. 호매령의 소리에 흠칫 놀랐던 천살은 아이가 호매령을 엄마라고 부르자 깜짝 놀랐다.
그때 나무집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조자운이 나왔다. 조자운의 허리춤에는 화산장문의 신물인 자운검이 걸려 있었다. 천살은 실수를 알아차리고 곧바로 다시 기운을 숨겼다. 조자운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자 아이를 안아들고 나무집으로 들어갔다.
"오늘 우리 무회의 생일이어서 무회가 좋아하는 반찬을 많이 준비했어."
"감사합니다, 모친."
생일상을 앞에 두고 격식을 차리는 것인지 아이는 엄마라 부르지 않고 모친이라 불렀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부친에게 술 한잔 따라드려."
쪼르르 하는 술따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친, 무회가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천살은 경공을 이용해 효자봉을 떠났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불사공도 속수무책이다. 복수따위는 포기하고 곧바로 호매령을 찾아왔어야 했다. 그날 호매령은 술에 취해 자제력이 떨어져서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천살이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자 마음이 변했을 것이다. 자신이 복수에 눈이 멀어 함정으로 의심되는 복마동으로 향하지만 않고 곧바로 호매령을 찾았어도 지금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 아이가 자신의 아이일까 조자운의 아이일까 잠시 고민되었지만 누구의 아이든 천살의 슬픔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아이라 해도 지금 천살이 느끼는 고통이 하나도 줄어들지 않는다. 경공을 사용해 달리는 도중 숨이 가빠오자 천살은 몸을 멈추었다. 새벽도 아닌데 천살의 눈가에는 이슬로 보이는 무언가가 달빛에 반짝였다.
다음날 서안을 떠나 청해호로 향하는 천살은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당무영과 고삼 둘다 천살과 호매령사이의 일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그 연유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호매령과 천살 사이의 일은 호매령의 명예에도 관계되지만 소문이 나면 무림맹이 비난을 받을것이 뻔하기 때문에 관련자들 모두 알아서 비밀을 잘 지켜주었다.
일행이 감주위에 도착해 객잔에서 식사를 할 때 황제의 붕어소식과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고삼과 당무영에게 천살은 고개를 저었다. 천살이 죽인 것이 아님을 확인한 둘은 그제야 시름을 놓고 음식을 먹는데 열중했다.
'주체가 죽다니, 그날 볼 때부터 기혈이 많이 뒤틀려있는 느낌이었는데 결국 죽어버렸구나. 몇년은 더 살수 있을걸로 판단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경험이 없다보니 오판을 한 모양이다. 이러면 새로운 황제를 한번 더 찾아가야 하나?'
마교와 서무림맹을 해산시킨 뒤 다시 새황제를 찾아가든지 아니면 직접 무림맹을 해체시키든지 해야 한다. 주체와는 원래부터 거래를 하던 사이라 말이 쉽게 통했지만 새황제를 통해 무림맹을 해산시키려면 많은 시간과 마찰이 필요할 수도 있다.
사도로 향하는 배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기적으로 오가는 배이고 다른 하나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고 평소에는 나룻터에서 대기하고 있는 배이다. 셋은 정기적으로 오가는 배를 타기 위해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때 당무영이 천살을 툭툭 친 후 손을 입에 가져다 댔다. 천살은 당무영의 뜻을 알아듣고 누구도 엿듣지 못하게 기운을 차단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천형, 여기서 당문의 암호를 발견했소. 당문의 사람을 만나 정보를 얻는게 더 좋을 듯 하오."
당무영의 말을 듣고보니 정보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천살은 무림방파의 성격을 띤 청해호의 명화교를 해산시키려는 것이지 광서지역에 있는 종교로서의 명화교를 해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무림방파로서의 명화교를 지탱하는 무언가를 없애야 한다. 해산되어도 갈데가 있는 무림맹이나 서무림맹과는 달리 이들은 다시 뭉칠 가능성이 높다.
당무영은 암호를 해독하고 당문의 비밀거점으로 향했다. 암호에 적힌대로 몇번 끊어서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당무영은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간 후 소리를 내어 말했다.
"독혈대 대주 당무영이오. 여기 책임자는 누구시오."
당무영의 얼굴을 확인한 독혈대와 암영대의 무인들은 곧 모습을 드러냈다. 천살과 고삼이 들어오자 문이 자동으로 닫겼다. 기관으로 먼 곳에서 여닫는 듯 내공의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대주, 몇년동안 어디로 간 것입니까."
독혈대와 암혈대에는 방계의 사람들이 많았다. 대주는 대대로 직계가 거의 차지했는데 방계출신으로 독혈대 대주가 된 당무영은 대원들의 큰 지지를 받았다.
"먼저 일행을 소개하겠소. 여긴 천살이라고 하고 이쪽은 고삼이라고 하오. 내가 마교에 있을 때 함께 동고동락을 하던 사이오."
천살이라는 이름에 당문의 무인들은 살짝 동요했다. 당문의 수뇌부는 정보를 통해 당무영의 행적을 알고 그 목적을 대충 짐작했지만 이들은 당무영의 실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특히 몇년간 마교에 복수를 하기위해 밖에 나와있었기에 정보가 많이 부실하다.
"마교가 수를 써서 본문의 무형지독을 훔쳐갔습니다. 그에 대한 보복을 하고 무형지독을 찾아오는 것이 목표인데 현재 둘다 어려운 상황입니다. 사도안에 마인들이 득실대고 살수들도 여기저기 포진해 있어 침투가 어렵고 무형지독을 어디에 숨겼는지 아무 정보도 없습니다."
"무형지독은 이 세상에 없소. 마교에서 무형지독을 이미 사용했소."
당무영의 말에 당문 무인들의 눈길은 천살에게로 향했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대마두인 천살인데 이들에게는 일반인과 똑같이 느껴졌다. 당무영이 천살과 함께 있고 무형지독의 사용을 확신한다면 그 대상은 천살이 틀림없다. 독을 많이 다루는 독혈대원들과 독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암영대원들은 전율을 느꼈다.
"마침 천형도 마교에 볼일이 있으니 마교에 대한 정보를 주시오. 서로 힘을 합쳐 확실한 복수를 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암영대의 무인들은 천살과 호형호제하는 당무영을 흠모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독혈대의 무인들은 무언가 뿌듯함이 느껴졌다. 황제의 붕어는 모르지만 천살이 홀로 소림을 봉문시킨 소문은 이곳까지 퍼졌던 것이다.
- 작가의말
肝腸寸斷, 간과 장이 마디마디 끊어진다. 매우 큰 고통을 나타내는 소제목입니다.
오전에 4시간여 일했습니다. 덕분에 지금 매우 피곤합니다. 오늘은 일단 1편만 올리겠습니다. 내일부터 다시 원래대로 회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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