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탈출
"그때 교주가 나서지 않았으면 그 무당파의 도사는 내손에 죽었을 것이야. 우리 교주는 무공도 강하고 아는것도 많은데 마음이 너무 약하단 말이야. 그래서 교주의 별호가 소요후(逍遼侯)잖아."
휴식시간에 초화규는 자신의 무위를 자랑하기에 바빴다. 사실 소요후에 대한 소문은 천살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소요후는 별호인 것이 아니라 주원장이 봉한 작위이다. 한선후는 주원장이 하사한 작위를 별호로 사용함으로 무언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초화규와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하며 제멋대로인 사람이 어떤건지 천살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초화규는 모든것이 제멋대로였다. 교주가 무당파의 도사의 목숨을 살려준것과 별호가 소요후인것은 아무 상관도 없다. 하지만 초화규는 교주의 마음이 약해서 별호가 소요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며칠전에는 교주를 사모하는 여자가 너무 많아 소요후라는 별호를 얻었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은 교주를 칭송하고 가끔은 욕하고 도저히 장단에 맞출수가 없었다. 동자공을 수련하는 시간과 흡기공을 수련하는 시간이 가장 편한 시간이다.
초화규는 항상 논점과 논거와 결론이 따로따로 놀았다. 언행에 일관성도 없었다. 그런 초화규가 장로가 될 수 있었던 것는 목표를 정하면 꼭 달성하고야 마는 독기 때문이다. 천살도 목표를 명확히 하고 정한 목표는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고 속으로 끊임없이 다짐했다.
"그리고 교주의 두번째 제자인 장우민이라는 자 말이야. 별호가 철혈객인데 과묵하기가 이를데 없어. 사흘에 한마디씩 한다는 소문도 있지. 그런데 이놈이 아주 음흉한 놈이야. 명화교 사람들은 전부 그놈에게 껌뻑 속고 있지."
장우민이라는 자는 사승관계를 따지면 초화규의 사질이다. 초화규와 같은 혼원일기공을 익혔는데 교주의 제자가 되면서 관홍창(貫虹槍)을 배웠다. 초화규는 원래 도를 주무기로 사용했는데 그뒤로 단창을 주무기로 바꾸었다.
혼원일기공은 찌르기에 적합한 내공심법이었던 것이다. 교주는 그러한 특성을 파악하고 장우민에게 창법을 전수했다. 초화규는 장우민의 무위가 일취월장하자 자신의 주무기인 도를 과감히 버리고 창을 잡기 시작했다.
천살은 초화규가 인격적으로는 별로이지만 과감성과 목표를 향한 뚝심만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신도 세상을 더 겪어보고나면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일을 할지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 충분히 쉬었으니 이번에는 신화공을 시험해보자."
초화규는 신화공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고 순서를 정해서 천살에게 수련해보게 했다. 천살은 처음에는 거부감을 가지고 수련에 임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다. 매번 수련이 잘못되어 피를 토하고 쓰러진 다음 해당 혈도가 더 튼튼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화규가 항상 일푼의 내공만 넣어주었지만 천살이 올라갈 수 있는 거리는 점점 높아졌다. 힘과 체력이 강해져서가 아니라 내공의 소모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피를 토하고 쓰러진 천살을 초화규는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매번 피를 토하면 쓰러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쌩쌩하게 회복된다. 먹을것이라고는 이끼와 조금의 맛없는 열매들밖에 없는데 빈혈에 시달리지 않는 것도 참으로 신기했다. 천살이 매일 하는 수련을 따라해볼까 하다가 동자공이라는 말에 포기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되자 초화규는 허리띠로 천살과 자신의 몸을 꽁꽁 묶어맸다. 설사 실수하여 추락하더라도 천살의 몸위로 올라탈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화규는 조금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실패하더라도 천살만 죽는 것이다.
초화규가 내공을 넣어주자 천살은 흡기공으로 벽에 들러붙은 후 천천히 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화규를 업어서 그런지 훈련때보다 훨씬 못미치는 곳에서 내공전이를 요구했다. 초화규는 천살이 요청할 때마다 일푼의 내공을 넣어주었다.
체감상 반나절의 시간이 흐르자 절벽에 난 작은 구멍을 발견하고 안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초화규는 벌써 절반의 내공이 사라지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비록 목숨을 건질 자신이 있다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출구는 초화규가 떨어진 곳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만약 출구의 위치가 예측한 대로라면 벌써 절반이상의 거리를 기어올라왔다. 하지만 정확한 출구위치를 모르기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아득하기만 했다.
충분히 휴식했다 판단한 천살은 다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힘에 부치는지 휴식할만한 공간이 나타날 때마다 천살은 휴식을 취했다. 천살의 숨이 거칠어지자 초화규는 초조한 마음에 입을 열었다.
"내공이 거의 바닥이 났다. 네 체력도 한계인 듯하니 여기에서 조금 회복하자꾸나."
"내공수련중에 건드리면 큰일 난다고 들었습니다. 제 등에 계속 업혀계시다가 제가 기침이라도 하면 큰일나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초화규는 삼할정도의 내력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 높이에서 떨어지고 삼할의 내공밖에 없다면 팔다리 어디 한군데가 부러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안전하게 내공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내 몸이 안쪽으로 향하게 돌아앉거라.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고 내공을 회복하겠다."
초화규는 작은 동굴의 가장 안쪽에 자리하였고 천살은 초화규를 등지고 있었다. 초화규는 한참동안 운기하지 않고 천살의 동정을 살폈다. 천살이 숨을 고르게 쉬는 모양이 매일하던 수련을 하는 듯하자 초화규는 마음을 놓고 내공수련에 임했다.
혼원일기공은 위력은 평범하지만 내력이 모이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관군과도 싸우고 무림인들과도 싸우고 마적들과도 싸우고 자기들끼리도 싸워야하는 명화교의 특성상 혼원일기공은 많은 자들이 익히는 내공심법이다. 내공의 회복이 빨라 언제든지 싸우거나 도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 체질이 알맞는 초화규나 장우민같은 자들은 고수가 되는 것이다. 초화규는 내공이 거의 회복된 듯 하자 두손을 마주 비비고 얼굴을 쓸었다. 내공수련을 마칠 때 대부분 무인들이 하는 동작이다.
그때 휙 하고 당기는 힘이 발생하며 초화규의 몸은 허공으로 향했다. 천살이 두손을 절벽에 붙인 후 허리의 반동과 다리힘으로 허리띠를 끌어당긴 것이다. 두손이 얼굴을 향한 순간 당겨서 초화규는 미처 허리띠를 잡지 못했다.
천살은 곧바로 자신의 왼발에 묶인 허리띠의 한끝을 푼 후 밑으로 던져버렸다. 곧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알아듣기 힘든 소리들이 들려왔다. 아마 자신에 대한 욕설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천살은 통쾌하게 웃어제꼈다.
무공검법을 얻은 것도, 응담필록을 보게 된 것고, 불사공을 얻은 것도, 응익검을 깨달은 것도 다 누군가의 안배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천살이 가장 먼저 목표로 삼은 것이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 결심을 위해 거슬리는 초화규를 떨어뜨렸다.
초화규를 죽이려고 욕심을 부렸으면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자신과 떨어뜨리는데에 만족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초화규처럼 뚝심을 가지고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혜를 가지고 자신이 가능한 목표를 이루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화산에 가서 혼원공을 훔치는 것과 천산에 가서 화령이라는 여자를 찾아 진실을 알아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강제성이 없다. 지금처럼 입밖으로 뱉어내야 한다. 입밖으로 뱉어낸 말에는 힘이 깃들어 있어 듣는 사람이 없더라도 강제성을 가진다.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천살은 출구를 향해 이동했다.
사실 초화규가 넣어준 내공은 많았지만 천살은 일부러 내공을 다 사용한 척 연기를 했다. 초화규를 떨어뜨린다는 계획을 세운 후부터 더 올라갈 수 있음에도 항상 여력을 남겼다. 초화규 덕분에 내공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와 내공의 양을 가늠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적절한 계산을 통해 경험이 많은 초화규의 의심을 사지 않고 연기에 성공했다.
어렵지 않게 출구를 찾은 천살은 입에서 나오는 환호성을 억지로 참았다. 동굴을 타고 밖에 나가보니 어두운 밤이었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통해 자신의 몰골을 확인한 천살은 헛웃음이 나왔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지만 공동에서 있는 동안 덩치가 엄청 커졌다. 지금처럼 빛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맹수로 오해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이다. 어릴때는 또래들보다도 작은 천살이었으나 거짓말을 보태서 손이 솥뚜껑만했다.
천살이 본 자들중에 가장 키가 큰 자는 풍운장의 소장주인 장문산이다. 하지만 장문산이 더 자라지 않았다면 천살을 쳐다봐야 할 것이다. 아직도 내공을 익혀내지는 못했지만 천살은 훌쩍 커진 몸뚱이에 자신감이 폭증했다.
"언젠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게 할 것이다. 그 누구도 위에서 나를 내려다볼 수 없게 만들겠다."
다소 치기가 포함되어 있지만 천살은 또 하나의 목표를 세웠다. 소실봉에서 달을 바라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던 천살은 자신이 알몸인 것을 깨닫고는 급히 다리를 오무렸다.
사실 알몸이 된지 꽤 오래되었지만 이제껏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밖에 나왔다는 생각에 급격히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우선 소림을 벗어난 뒤 옷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바로 자신의 몸에 맞는 옷은 구하기 힘들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살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혹시라도 고수에게 기척을 들키면 다시 복마전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초화규의 마수에 다시 돌아간다. 필요가 있어 죽이지 않더라도 팔다리가 성하기를 바라면 도둑놈 심보라고 봐야 한다.
조심스럽게 걷던 천살은 밤중에 일어나 소피를 보던 중과 눈이 마주쳤다. 밤중에 나와 소피를 보다가 덩치가 커다란 천살을 마주하게 된 중은 급기야 비명을 질렀다. 천살은 잡히면 죽음 혹은 죽음보다 못한 삶이라는 생각에 방향을 정하고 무작정 달렸다.
소리를 질렀던 중은 천살이 도망을 가자 곧 진정을 되찾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소리를 질렀다.
"시주, 그쪽은 낭떠러지라오."
밑으로 추락하는 천살의 귀에는 '시주, 그쪽은' 까지만 들렸다. 곧바로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계곡물이 정신을 잃은 천살의 몸뚱이를 운반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어제 열세시간을 자서 그런지 약기운에 약간 몽롱한데도 잠이 안 오네요.
공동탈출은 空洞(빈동굴) 탈출이지 共同(함께)탈출이 아닙니다.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