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명성희
사명군은 사진군의 친동생이다. 무공에 대한 자질은 평범하지만 머리가 민활하고 성격이 대담하여 한원영의 역할을 맡았다. 회의가 끝난 후 한선후는 사명군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머리가 아프거나 마음이 답답하면 한선후는 자식을 찾았다. 눈치가 빠른 사명군은 이러한 사실을 빠르게 깨닫고 한선후의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이런저런 요구사항을 제출했다.
"부친, 부친의 무공을 익히고 싶습니다."
"천마신공 말이냐? 지난번에 너한테 비급을 적어주지 않았더냐?"
"소자가 실수로 청해호에 빠뜨렸습니다. 급하게 건져올렸는데 알아보기 힘들더군요. 부친께서 질책하실까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선후는 허허 하고 웃었다. 사명군은 한선후의 사랑이 가득한 두눈에 소름이 끼쳤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따뜻한 사랑이 아닌 광기에 찬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한선후는 식사를 하다말고 일어섰다.
"그렇다면 내가 다시 적어주마."
곧바로 서재로 향한 한선후는 붓을 들고 비급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종이 한장에 글자 이십여자씩 적으며 총 쉰네장의 종이를 소모했다. 먹물이 마르기를 가디려서 순서대로 모은 후 풀로 붙이고 표지를 만들었다. 표지에 천마신공 네글자를 멋들어지게 적은 후 한선후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이 마음에 조금 안 들었지만 한선후는 비급을 사명군에게 전해주었다. 한선후가 천마신공이라고 말할때는 별 느낌이 없었는데 비급에 적힌 천마신공 네글자, 특히 마자를 보는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었다. 사명군은 움츠러드는 몸을 억지로 펴고 감사인사를 올렸다.
"소자 꼭 신공을 대성하여 부친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겠습니다."
사명군은 천마신공의 비급을 한번도 펼쳐보지 않고 그대로 사장로에게 갖다 바쳤다. 지금 사도 곳곳에 사장로의 눈과 귀가 널려있다는 것을 영리한 사명군은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사장로의 허락도 없이 천마신공을 익혔다가 눈밖에 나면 안된다. 가문의 도움이 없이는 힘이 아무리 강해도 소용이 없다.
비급을 받아든 사장로는 사명군에게 몇마디 칭찬을 하고 내보냈다. 표지의 네글자를 보니 산전수전 다 겪은 사장로도 마음이 울렁거렸다. 다른 글자들은 괜찮지만 마자가 너무 강력한 기세를 품고 있었다. 문장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가늠할 수 있고 글자를 통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 천마신공이라는 네글자를 통해 사장로는 교주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졌다.
사장로는 비급을 꼼꼼하게 읽은 뒤 은밀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장원의 여러 밀실 중 가장 큰 밀실로 향했다. 안에는 서른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장로가 들어가자 분분히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시작하게."
사장로의 명이 떨어지자 몇몇은 밀실 밖으로 나갔다. 안에는 사장로까지 서른명의 사람이 남았다. 그중 스물여덟은 멍한 표정으로 사장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은 한명은 향을 피우더니 중얼중얼 하면서 주문 같은것을 외웠다. 전혀 알아듣기 힘든것이 중원의 언어 같지가 않았다.
"이제 이자들은 사장로님의 명령에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 다만 멍청해서 직관적이지 않은 명령에는 반응이 느리거나 아예 반응을 못할수도 있습니다."
남은 한명은 괴령의 제자다. 괴령의 대법은 칠일의 시간이 걸린다. 칠일이 지나도 괴령의 소식이 없자 제자들은 괴령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재물이나 귀한 서적들을 가지고 뿔뿔히 도망쳤다. 그중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던 일부는 무리를 지었고 돈이 필요해서 사장로의 의뢰를 받아 사람을 세뇌하는 일을 진행했다.
"수고했네. 며칠동안 검증할 시간을 주게. 검증이 끝나면 잔금을 곧 치룰걸세."
괴령의 제자 선득은 사장로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인 후 밀실을 떠났다. 사장로는 이들의 돈줄이다. 예전부터 괴령 몰래 사장로와 접촉해서 화골산이나 여러가지 독들을 만들어주며 주머니를 불렸다. 그때마다 항상 선득이 대표로 사장로와 접촉했기에 선득은 장원의 지리에 매우 익숙하다.
밀실을 벗어난 선득은 산책하는 척 하며 장원의 가산으로 향했다. 바위 몇개를 세우고 작은 나무를 심어 산을 흉내낸 작은 가산이다. 바위에 기대 휴식하는 척 하며 선득은 지청술(地聽術)을 펼쳤다.
'도망, 장현성, 천..신공, 몰래 회수,'
'존명, 필..성공, 전력..'
'장로, 가문, 안돼.'
선득은 밀실안의 소리를 엿들으려는 목적이었다. 지반이 전부 암석으로 되어 있고 밀실도 암석을 깍아내서 만든 것이다. 가산에서 지청술을 사용하면 많은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하지만 조심성이 과도한 사장로가 세뇌당한 스물여덟의 소교주 호위대원들에게 전음으로 천마신공을 가르치고 있어 선득은 지청술로 엿들을 수 없었다.
대신 사명군과 수하의 대화를 엿들었다. 사명군은 천마신공을 한번도 펼쳐보지 않고 사장로에게 바쳤지만 교주가 장현성에게 천마신공의 비급을 적어준 적이 있다는 사실은 보고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복을 몰래 불러서 비급의 회수를 명했다. 가문을 배신할 생각은 없지만 가시 하나라도 더 가지고 있으면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선득은 평소 할일이 없을 때면 늘 가산에 와서 지청술을 펼쳤다. 그래서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맥락은 정확하게 짚었다. 자신에게 분배된 객방으로 돌아간 선득은 잠을 청했다. 깊은 잠에 빠졌던 선득은 어두운 밤이 되자 깨어났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선득은 자신의 짐에서 나무토막 하나를 꺼내 비수로 암문을 새겼다.
천축어로 적혀진 암문은 그 풀이를 모르면 천축어를 아는 사람이라도 해석이 불가능하다. 암문을 다 새긴 후 짐속에서 거의 숨도 안쉬는 쥐 한마리를 꺼냈다. 쥐의 몸에 꽂혀있는 침 세개를 뽑자 쥐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선득은 나무토막을 쥐의 배부분에 매단 후 쥐에게 향을 맡게 하였다. 여러가지 향이 있는데 쥐는 그 향에 따라 목적지를 달리한다.
마지막으로 쥐에게 단약 한알 먹인 후 방문을 빼꼼 열고 쥐를 내보냈다. 쥐는 거의 경공고수만큼 빠르게 움직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소식을 받은 사형제들이 장현성의 뒤를 쫓아 비급을 강탈하기를 바라야 한다. 통령술(通靈術)로 서로 이어진 사형제들이기에 가까이 있을 때는 서로를 속이지 못한다. 그야말로 친형제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자들인 것이다.
사장로는 스물여덟명의 심령이 제압당한 호위대원들을 세뇌시켜 자신의 명령만 듣게 만들었다. 그리고 교주로부터 얻은 천마신공을 이들에게 먼저 익히게 했다. 이들이 익히는 과정을 통해 안전성을 검증하고 또 어떤 점들을 주의해야 하는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을 항시 관찰해야 하기에 병을 핑계로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밀실에만 있었다. 그래서 교주전에 심어놓은 자들이 식사중 교주가 장현성에게 비급을 작성해준 일을 언급했음을 보고했지만 읽어보지 못했다.
심령이 제압당해 이성이 거의 사라지고 본능만 남은 스물여덟은 천마신공을 매우 순조롭게 익혀냈다. 심령이 제압당해 아무런 잡생각도 없기에 성취도 빨랐다. 빠르게 강해지는 이들의 무력에 사장로는 두려움이 생겼다. 이 무공이 유출된다면 강호에는 고수들이 범람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분이고 뭐고 다 소용이 없고 힘이 전부인 야만의 강호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그것은 사장로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이 무공의 약점을 꼭 찾아내야 한다. 약점을 찾아내면 오히려 이 무공을 유출시키는게 낫다. 약점을 통해 이 무공을 익힌 자들을 거두어들이면 내가 황제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
장삼풍이라는 절대자의 탄생은 강호인들에게 명분을 따지도록 강제했다. 만약 힘을 일순위로 놓는다면 천하의 모든 문파들이 무당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래서 강호의 세력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명분을 따지고 배분을 따지기 시작했다. 힘을 우선시하는 풍조를 모두의 노력으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만약 한선후의 무공성취가 강호에 새나간다면 장삼풍때와는 다르게 천하의 세력들이 손잡고 명화교에 대적할 것이다. 강호세력들뿐 아니라 황실과 군대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먼저 소림을 쳐야 한다. 무당 화산에 이어 소림까지 몰락해버리면 남은 세력들은 하나로 뭉치기 힘들다. 하지만 교주가 소림은 안된다고 딱 잡아떼니 사장로는 머리만 아프다.
몇달의 시간이 흐르자 스물여덟명의 호위대원들의 무공은 몰라보게 강해졌다. 사장로의 무공은 현장로보다 조금 부족하다. 그런 사장로도 세명이 합공하면 이겨낼 수 없다. 호위대원들이 대단한 무공을 익힌것도 아니고 단순히 천마신공의 공력을 실은 일반공격을 하는 것뿐임에도 피하지 않고 맞선다면 두명만 상대가 가능하고 세명부터는 힘들다.
'요즘 기력이 예전같지 않구나. 미쳐버린 한선후가 사고를 치기전에 제거해야 한다. 괜히 사고를 쳐서 무림 전체의 시선을 끌어버리면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고 사명군이 한선후를 등에 업고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면 가문의 화합이 깨질수도 있다.'
교주인 한선후는 한달에 몇번씩 교도들에게 얼굴을 내비쳐야 한다.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교도들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곱게 미친 한선후는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한선후가 배를 타고 청해호에 낚시를 나가자 사장로는 스물여덟의 호위대원들을 배에 싣고 한선후의 낚시배에 접근했다.
전부 천살의 호위대원들이기에 천살의 소행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사장로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해버렸다. 한선후와 가까워지자 호위대원들이 갑자기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었던 것이다. 급히 배를 돌린 사장로는 가문의 중책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열었다.
"제가 직접 보지 못했지만 예전에 천살이 접근했을 때 교주와 호위대원들이 보인 반응과 비슷해 보이는군요."
"네 말은 교주의 천마신공이 소문대로 천살이 만들어낸 것이고 수준이 낮은 자는 경지가 높은 자에게 대항하지 못한다는 뜻이냐? 아니면 일정 수준에 이른 자와 가까이 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냐?"
"저 스물여덟도 수준의 차이가 있을테니 두번째인것 같습니다. 교주의 성취가 천살과 비슷해졌거나 혹은 더 높아진 것이겠죠."
"더 높아진 것은 아닐 것이다. 천살이 소림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교주가 소림에 가지 않으려는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금의위의 정보에 의하면 천마신공은 천살이 만들어낸 것을 교주가 강탈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살이 금의위와 손잡고 교주에게 복수하려 했는데 금의위가 천살이 교주보다 더 위험하다고 여겨 도리어 함정을 파고 천살을 감금한 것입니다."
금의위에 첩자를 심는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요직에 있는 자들은 주원장시절부터 금의위에 몸담았던 자들이다. 하지만 돈으로 이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은 가능하다. 물론 누설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보들만 얻어낼 수 있다. 천살에 관한 정보가 바로 여기에 속한다.
"달이 밝으면 별이 희미해 진다더니. 그렇다면 천살은 태양이라는 말이냐? 저 대단한 교주도 그 성취에 미치지 못한다면 말이다."
사장로는 곧바로 스물여덟명의 호위대원들을 사도 밖으로 내보냈다. 교주와 대면하면 세뇌가 풀릴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던 것이다. 이들을 가문에서 마련해둔 비밀장원에 숨겨놓고 계속 천마신공을 익히게 했다. 그리고 가문에서 자질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발해 밀실에서 몰래 천마신공을 익히게 했다. 누군가의 성취가 교주를 초월하면 교주를 제거하는 것은 닭모가지 비트는 것만큼 쉬워진다.
- 작가의말
月明星稀, 달이 밝으면 별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달빛이 너무 밝기 때문이죠.
진실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소문이 중요합니다. 금의위도 그렇고 사씨가문도 그렇고 천살을 천마신공의 창시자라고 생각합니다. 교주는 그것을 빼앗아 익힌 것이구요. 슬슬 제 큰그림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재밌다니 라는 댓글은 달지 말아주세요. 제가 교만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세심한 분들은 제가 떡밥 하나 또 던졌다는 것을 발견했을 겁니다. 글을 늘려쓰기 위한 노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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