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과천선
종남장문 강우민은 늦은 밤 불청객 때문에 잠에서 깼다.
"그대는 누구시오."
침입자는 두명이었다. 그중 덩치가 조금 더 큰자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편한 자세를 보면 이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헷갈릴 것이다.
"나 천살이오. 종남이 삼년정도 문을 닫아걸었으면 하오."
강우민은 내공을 슬쩍 움직여봤다. 내공이 아무런 제약도 없이 움직여지자 곧바로 유룡발운(遊龍拔雲)의 초식으로 천살을 덮쳐갔다. 완전 무방비상태이기에 필살을 자신했지만 강우민과 천살의 거리는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내공도 움직였지만 강우민의 몸은 그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제야 강우민은 상대가 진짜 천살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소문이 과장됐다고 생각했는데 소문보다 더한 놈이구나.'
"종남장문은 왜 내 말에 대답이 없는 것이오?"
"알겠소. 종남은 내일부터 삼년간 봉문을 하도록 하겠소."
"약속을 잘 지키리라 믿겠소."
천살이 일어나자 강우민은 다급히 질문했다.
"천대협은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것이오?"
강우민은 천살이 화산으로 향한다고 대답하기를 원했다. 삼년간 봉문하면 화산으로부터 빼앗아온 속가들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천살이 화산까지 봉문시켜야 삼년뒤를 기약할 수 있다.
"무당이오."
천살과 고천영이 사라지자 강우민은 침대에 쓰러졌다. 이제 종남은 끝장났다. 지난번에 무당과 힘을 합쳐 화산을 멸문시키려 밀모를 하는데 천살이 무당을 봉문시켜 그 일을 방해했다. 분명 종남과 무당의 관계를 알고 일부러 이러는 것이다. 삼년뒤 봉문을 풀어봤자 화산에 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배은망덕하고 기사멸조를 일삼는 개자식이라며, 누가 이런 헛소문을 퍼뜨린거냐.'
강우민이 자신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동안 천살은 경공으로 무당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 그날 천살의 성라운포에 의해 다친 사람들 중 나이가 많은 장로들이 절반 이상이라 지금쯤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단순히 치료를 하는 것이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가능하면 무공도 회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무당에 도착해서 방문을 알리자 송운자가 직접 마중을 나왔다. 천살의 경지를 가늠해본 송운자는 속으로 탄식을 했다.
'사제들이 일원 운운할 때 약간은 허풍이라 생각했는데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구나. 경지는 삼풍조사보다 못해도 무력은 전혀 부족함이 없어보이는구나.'
경지만 따지면 송운자가 남궁천보다 더 높다. 그래서 송운자는 천살의 경지와 무위를 더욱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장삼풍보다 경지는 부족함이 보이지만 무공은 오히려 더 강해보였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천대협이군. 천대협덕분에 무당이 사도에 빠지지 않고 바른길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소. 무당을 대표해 이 송운자가 천대협에게 감사를 표하오."
상대의 말에 진심이 섞인것을 확인한 천살은 겸양을 표했다.
"제 공이 무어 있겠습니까. 다 하늘의 뜻이고 천지의 조화인거죠."
"그래 천대협께서 무슨 용무가 있어서 이 무당을 찾으신게요?"
천살은 잠시 생각을 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몇년전에 제가 부족한 무공으로 무당의 제자분들을 다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결자해지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한번 치료를 해보려고 합니다."
송운자는 기쁜 마음에 소리를 내어 웃었다.
"천대협의 잘못이 아님에도 무당의 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덕으로 원한을 풀려고 하니 이 송운자가 무척 부끄럽소. 천대협의 이러한 행동을 널리 알려 강호의 정기를 바로세울 필요가 있다 생각되오."
천살은 송운자가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자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대화를 길게 끌지 않고 빨리 치료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송운자는 천살의 겸손한 태도와 치료를 서두르는 모습에서 천살에 대한 평가를 한단계 더 높였다.
'인품이 엉망인 자가 이런 경지에 오를리 없지. 예전의 악행들은 분명 천살마성에 홀려서 어쩔수 없이 저지른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보니 소림에서 나온뒤 마교의 악도들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해쳤다는 소문을 들은적이 없구나.'
천살의 걱정대로 몇몇은 이미 죽고 열두명만 살아있었다. 그중에 몇몇은 나이가 환갑을 넘어서 천살의 치료를 이겨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연습할 기회가 생각보다도 더 적자 천살의 얼굴에는 걱정의 빛이 스쳤다.
'연민도 많은 자이구나. 강호에서 서로 칼을 겨누면 목숨을 잃어도 원망할 핑계가 못되는데 이자는 생각밖으로 정이 많은 자이다.'
천살을 면밀히 관찰하던 송운자는 천살의 표정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화산을 봉문시킨 일과 마교를 해산시킨 일때문에 냉혹한 자라고 소문이 났는데 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아아, 외기내용(外氣內用)의 경지구나. 그럼에도 몸속에 저런 거대한 기운을 품고 있다니. 외기내용보다 한단계 더 높은 경지인가?'
원래 무혈지신을 이루면 세상의 기운이 내 기운과 같기 때문에 몸속에 굳이 내공을 두지 않는다. 천살마기가 신화기와 합쳐진 일원의 존재를 모르기에 송운자는 천살을 무혈지신보다 한단계 더 높은 경지로 오해했다.
천살은 모든 정신을 치료하는데 집중했다. 그 과정을 불사공이 지켜보면서 알맹이를 쏙쏙 빼먹었다. 가끔 천살이 잘못된 치료를 하면 불사공이 천살의 몸속에서 움직이며 더욱 효과적인 경로를 알려주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천살의 치료 덕분에 무공까지 회복되자 무당의 장로는 천살에게 큰절을 올렸다. 천살은 다급히 무당의 장로를 일으켜세웠다. 방금 치료과정에 작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거기에 정신이 팔려 무당의 장로가 절을 올리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태극이 벽이 되어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 것을 막고 있는데 그 실마리를 찾았다.'
천살은 천효의 얼굴을 떠올리며 당장 그 실마리를 잡고 쭉쭉 당기고 싶은 생각을 눌렀다. 그 실마리의 끝을 보면 이 세상에 더이상 남아있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거듭 감사를 표하는 무당장로에게 돌아가서 휴식을 취하라 하고 다음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다섯명의 장로와 일곱명의 장문인과 같은 항렬인 중년제자들의 치료에 전부 성공했다. 거듭 만류하는 송운자를 뿌리치고 천살이 무당을 떠나자 송운자는 다시 한번 감복했다.
'정이 많고 인품이 훌륭할 뿐 아니라 성정이 담백하기까지 하구나. 저런 자를 삼풍조사께서는 왜 무당으로 인도하지 않으셨지?'
며칠째 잠을 자지 않았지만 천살은 오히려 정신이 더욱 또렷했다. 고천양도 인생이 걸린 일이라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연화봉에 도착한 천살은 하인의 시중을 받는 호군천을 찾아냈다.
"생각보다 더 심하구나. 저때는 내 성라운포가 다듬어지기 전이라서 위력은 오히려 더 강할 때이다. 치료는 문제 없는데 무공회복은 자신이 생기지 않는구나."
천살은 새롭게 책사로 떠오르는 고천양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고천양은 천살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사도무천 장로를 찾아서 조석성옥을 배우면 됩니다."
조유천은 화산 외곽의 오막살이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조자운에게 조석성옥을 사용한 뒤 몇년이나 지났기 때문에 내공을 일부 회복해서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다. 자신의 죄를 일부 씼은듯 해서 많이 편해진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조장로님, 천살이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소교주, 아니지, 천대협 오랜만이오."
천살은 조유천의 밝아진 얼굴을 보자 내심 기뻤다. 그리고 역시 복수를 다짐하던 선우복명이 생각났다. 사씨가문이 풍비박산 났으니 선우복명도 조유천처럼 큰 시름을 덜고 유유자적하게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했다.
"조장로님, 제가 호장문의 몸을 치료하려 합니다. 조석성옥을 가르쳐 주시면 최선을 다해 치료해 보겠습니다."
"천대협, 잘 생각하셨소. 복수다 뭐다 다 자기 자신을 해치는 일이오. 덕을 하나 쌓기도 힘든 인생인데 왜 그리 악업을 쌓지 못해 안달이었던지 이해가 안되오. 천대협도 미망에서 깨어난 것 같아 이 늙은이가 진심으로 기쁘오."
조유천은 혈도의 타격순서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천살에게 숙지시켰다. 허공에 대고 몇번의 연습을 한 뒤 천살은 다시 연화봉으로 향했다.
고천양이 호법을 서고 천살이 치료에 몰두했다. 사람을 죽이는것은 순식간의 일이고 많은 심력이 소모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람 하나 구하려고 하니 힘들고도 힘든 일이었다. 천살은 치료를 끝내고 조석성옥을 시작하기 전에 음혈을 재정련해서 군림을 만들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천살은 구슬땀을 흘렸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군림을 가볍게 부러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음혈을 만들고 다시 군림으로 만들기까지 과정은 수개월이나 된다. 만들어내는 과정은 매우 힘겨웠지만 파괴는 한순간이다.
'인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군림보다 훨씬 더 큰 인고를 거쳤을 것이다. 그러니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굳이 거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죽어 마땅한 자들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검이 군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한번 더 다잡은 천살은 조유천에게서 배운 조석성옥을 사용했다. 새의 부리처럼 모아쥔 천살의 두손이 호군천의 전신 혈도들을 정확한 순서와 간격으로 타격했다. 굳이 손이 아니라 내공만 움직여 타격해도 되지만 천살은 만전을 기해 직접 손으로 타격했다.
치료가 다 끝나자 호군천은 힘겹지만 자기 힘으로 일어섰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지만 호군천은 그 떨림이 반가웠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채 몇년이나 살았더니 지금 힘든 느낌마저 반갑기 그지없다. 갑자기 단전속의 내공이 쑥 차오르자 호군천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천살을 바라보았다.
호군천의 몸을 치료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단전을 채워주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다. 하지만 천살의 표정을 보니 방금 치료는 매우 힘들게 했고 자신의 단전은 하품하듯 자연스럽게 해치웠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호장문인, 지금 이런말을 하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만, 딸을 저에게 주십시오."
호군천은 고개를 가볍게 숙인 천살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예전에 호군천은 천살을 '사람'이 아닌 '천살성'으로 대했다. 호군천은 정이 많은 성격이다. 부인과 사별한 뒤 재혼을 하지 않고 첫 부인을 그리워 했고 고아들도 거두어 들였다. 지금도 왜 그때 천살을 그런 마음으로 대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애 딸린 과년한 딸을 데려가겠다니 내가 오히려 절해야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소."
"장문인께 감사드립니다."
호군천이 다시 입을 열려는데 천살의 신형이 사라져버렸다. 경공으로 화음현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호군천은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다시 열었다.
"다음번에는 장인어른이라 불러주게."
전속력으로 달리는 천살을 고천양이 간신히 쫓으며 소리 질렀다.
"대형, 대형, 이대로 가면 큰일나요."
전조도 없이 그대로 멈춰선 천살을 지나친 고천양이 겨우 신형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언제 애까지 만드셨는지 모르겠지만 정식으로 혼인을 허락 받았는데 빈손으로 가면 안돼요. 보기 좋은 노리개라도 들고 가야죠."
기둥서방 시절 경험에 비춰볼 때 오랫동안 발길을 끊었다가 다시 오는 손님들은 기녀의 환심을 빠르게 사기 위해 작은 노리개를 선물로 주었다. 그것을 기억한 고천양은 위기를 자초할뻔한 천살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런건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데?"
"서안으로 가요."
- 작가의말
참 다행입니다. 여자에 대해 잘 아는 고천양이 있어서 말입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겪을 최대의 위기가 고천양 덕분에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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