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진명멸
얼마 남지 않은 내공으로 흡기공을 사용하면 내공을 빠르게 모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내공으로 빠르게 몸을 회복하고 다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흡기공은 쉽게 멈출수 없다. 그리고 흡기공을 사용하면 서창훈이 곧바로 낌새를 알아차리고 공격해 올 것이다. 그래서 천살은 불사공에 모든 회복을 맡기고 있다.
서창훈은 옆구리의 외상을 치료하며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 백년의 삶을 채우지 못했다. 어릴때는 밤하늘을 쳐다보기 참 좋아했는데 별을 세어보지 않은지 오래된 것 같다. 또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일부 별들은 더 밝아진 것 같고 일부 별들은 어두워진 것 같다. 별들은 수천년동안 명멸(明滅 - 밝아지고 어두워짐)을 계속해가고 있다.
오늘 하나의 별이 사라질 것이다. 천살마성이라는 별 말이다. 가능하면 팔다리를 자른 뒤 화산에 가둬놓고 정해진 수명이 찰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최선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여의치 않으면 천살마성을 제거한 뒤 우화등선을 포기하고 전력을 다해 화산을 지킬 것이다.
환란이 세상을 휩쓸고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화산의 힘을 키운다. 환란이 끝난 뒤 화산이 무림을 호령할 수 있을 것이다. 원각이나 송백자나 환란을 막아낼 능력이 되지 않는다. 무당의 송운자가 있다면 가능성이 있으나 송운자는 폐인이 된지 십년이 넘는다. 화산도 약해지겠지만 다른 문파들은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포로가 된 사십에 가까운 제자들은 최선을 다해 구한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화산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을수는 없다. 옆구리의 상처가 다 아물고 통증이 사라지자 서창훈은 검을 가볍게 털었다. 동시에 머릿속의 잡념들도 함께 털려 나갔다.
"조유천, 나와서 네가 말하는 화산의 기개를 한번 더 떨쳐보아라."
서창훈의 목표는 천살이지만 화산 태상장로의 체면에 천살을 지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조유천을 도발한 것이다. 천살이 아닌 조유천이 나오면 조유천을 미리 제거할 수 있기에 손해보는 일도 아니다.
"서창훈의 목은 내 몫입니다. 누구도 나와 다투지 않았으면 합니다."
천살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호군천을 상대로 성라운포를 사용한 후 응익검의 깨달음이 훨씬 명확해졌다. 검을 정련할 때 불에 달궈진 검을 식기전에 두드려야 한다. 천살은 서창훈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을 더 확실히 심장과 뼈에 새길 작정이다. 천살로서는 처음으로 복수보다 심지어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찾은 것이다. 바로 무에 대한 갈증이다.
평생 꿀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꿀이 달고 맛있다 떠들어도 그저 그러려니 한다. 그러다가 꿀을 한번 맛보면 잊지 못하고 자꾸 벌집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이다. 커다란 깨달음의 달콤함을 맛본 천살은 단맛에 중독된 사람처럼 목숨도 불구하고 그 맛을 쫓고 있다.
현재 천살의 정신상태는 이성적인 상태가 아니다. 커다란 깨달음의 충격에 잠시 비틀린 상태이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천살을 말렸을 터이나 조유천은 부상때문에 선우복명은 부족한 실력때문에 천살을 말릴 수 없었다.
"사실 나는 서장로에게 딱히 악감정이 없습니다. 서장로가 화산을 위해 해야할 일을 했듯이 저도 저와 명화교를 위해 해야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니 구천에서 편히 눈 감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한 천살은 말로 서창훈을 흔들려 했다. 하지만 악독한 말을 내뱉는 것은 자신의 열세를 인정하는것과 다름이 없기에 표면적으로 예의를 차렸다. 서창훈은 천살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을 섞어봤자 배분의 차이가 심하게 나기에 본인만 손해볼 것이기 때문이다.
천살은 호군천의 청풍부월검을 상대할 때처럼 자신의 검로를 고수하려 했다. 하지만 서창훈과 호군천의 경지는 하늘과 땅처럼 먼 거리다. 목을 스치는 검에 온몸의 털이 올올이 일어선 천살은 응익검을 펼쳐냈다. 숨기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방금전의 깨달음 때문에 또 달라진 응익검은 천살에게도 낯설다. 천살은 머리를 비우고 검이 원하는대로 움직이게 놔두었다. 천살과 호군천과의 대결을 잠시 지켜보았기에 서창훈은 천살의 무위에 대해 대략적인 감을 잡았는데 갑자기 높아진 천살의 무위에 살심을 더욱 굳혔다.
응익검은 천살이 무공검법에 기초하여 만들어낸 검법으로 천살의 성장에 따라 계속된 변화를 가져왔다. 그래서 응익검의 검의는 계속 보충되어 왔고 초식들도 서로 연관되지 않고 독립되어 있다. 하나의 검법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이다.
더군다나 응익검은 무공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절의 천살이 만들어낸 검법이다. 중구난방이고 마구잡이여서 오히려 서창훈을 현혹했다. 의도치 않게 허허실실로 서창훈을 희롱한 셈이다.
서창훈은 법도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응익검을 상대하면서 커다란 괴리감을 느꼈다. 검법은 나름의 질서가 있고 검의에 따라 반드시 지켜야 할 법도들이 있다. 변검은 항상 삼푼의 힘을 남겨 상대의 대응에 대비하고 쾌검은 상대의 허점을 확인하고 필중을 자신할 때에만 사용하는 등이다.
하지만 천살의 검법에는 그런것이 없고 혼돈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하지만 중간중간 서창훈도 감탄하게 만드는 검식들이 섞여 있어서 또 일관되게 경시할 수도 없다. 들쭉날쭉한 응익검을 상대하면서 서창훈은 자신의 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가끔 서창훈에게도 깨달음을 주는 검식들이 불쑥불쑥 나타나기 때문이다. 거기에 청풍부월검이 상대를 제압하는 검법이다 보니 천살이 입은 피해는 둘의 무위차이에 비해 적었다.
하지만 둘의 대결이 백합을 넘기기 시작하자 둘다 변화했다. 천살의 응익검은 청풍부월검이라는 완전한 검법을 상대하면서 나름의 법도를 찾아갔고 응익검에 적응한 서창훈은 청풍부월검을 보다 위력적으로 펼쳐내기 시작했다. 겨우 아물었던 외상들은 서창훈의 검에 의해 다시 입을 벌리기 시작했고 옆구리와 왼팔 그리고 허벅지는 피로 흥건했다.
'천살마기야, 나 곧 죽을거야. 그러니 빨리 힘을 내주렴.'
천살이 어르고 달래도 천살마기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신화공과 천살마기는 서로 상대를 견제하느라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천살마기는 자신이 움직이는 틈을 타서 하단전을 신화공에게 빼앗길까 걱정하고 있고 신화공은 천살마기보다 약세이기에 단전에서 쫓겨날까 움직이지 않고 있다.
서장로의 검이 천살의 혈관을 베어냈다. 불사공이 필사적으로 움직여 베어진 혈관을 다시 봉합시키고 흘러나온 피들을 한켠으로 치웠다. 그 바람에 얼마 되지 않는 내공이 바닥이 났다. 청풍부월검이 환검이라서 다행이지 강검이나 중검을 사용하는 자와 맞상대 했으면 일찍 파탄이 생겼을 것이다.
천살의 단전의 내공이 전부 소모되고 혈도들의 내공까지 끌어쓰자 천살마기와 신화공은 협상을 시도했다. 서로간에 평화협정을 맺은 둘은 오랜만에 기지개를 켜고 어깨를 돌렸다. 신화공은 복마공의 운기경로를 기억하고 그 경로를 따라 운행하며 천살의 상처를 치료했다.
천살마기는 천살의 중단전과 하단전을 점거했다. 깨달음의 충격으로 현재 천살은 술에 취한 상태나 다름이 없다. 사고가 제한되고 모든 집중력이 깨달음과 검술에만 집중되어 있다. 천살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기에 천살마기는 신체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천살마기에게 밀려난 천살은 자기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기 시작했다. 단전의 바닥난 내공과 혈도들의 약해진 기운, 그리고 중요한 혈도일수록 기운의 충돌에 큰 타격을 받아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서창훈이 최대한 천살을 생포하려 하고
또 천살의 검법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면 이미 두세번 죽었을 것이다.
신화공의 움직임은 천살이 서창훈으로부터 훔쳐배운 복마공과 달랐다. 기본적인 운기경로는 비슷하지만 천살의 몸상태에 따라 제멋대로 운기경로를 바꾸고 있다. 하지만 치료효과가 좋아 외상은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다. 내상의 치료는 느리지만 말이다.
신화공은 정기적으로 단전으로 돌아가 치료에 소모된 기운을 보충했다. 천살의 몸상태가 점점 나아짐에 따라 천살마기는 천살의 육체를 더욱 정교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살은 음혈의 움직임에 전율을 느꼈다.
음혈은 천살마기가 움직이는 천살의 손에서 생명을 얻었다. 하늘을 나는 매처럼 날개짓을 하고 물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몸을 비틀었다. 초원을 달리는 말처럼 네 발굽을 멈추지 않았고 땅굴을 파는 두더지처럼 꾸준함을 잃지 않았다.
먹이를 굴로 나르는 개미들처럼 질서정연함이 있고 개미들의 행진을 구경하는 베짱이의 한가함도 있었다. 산중지왕인 호랑이의 위엄이 서려 있었고 사냥개의 눈과 귀를 피해 몸을 웅크리고 미동도 하지 않는 토끼의 조심스러움도 있었다.
천살마기가 펼쳐내는 낯선 검법은 천살이 알던 응익검이 아니다. 하지만 천살은 이 검법이 응익검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청풍부월검은 오늘 처음 접해보기에 천살이 잘 아는 검법중 가장 강한것은 반양검이다. 갑자기 반양검이 하찮아 보였다.
천살의 기도(氣度)가 갑자기 변하고 검법이 달라지자 서창훈은 정신이 들었다. 천살이 깨달음을 갈망하고 더 강한 무공을 갈망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발산했기에 서창훈도 거기에 감응된 것이다. 너무 강렬하고 긍정적인 욕구이기에 마음수양이 얕지 않은 서창훈도 부지불식간에 동화되고 말았다.
화산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천살의 소문은 한때 화산에 은밀하게 퍼졌다. 소문대로라면 지금 천살의 나이는 스물정도일 것이고 무공에 입문한지
십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자가 낭패스럽기는 하지만 서창훈의 손에서 백합을 견뎌내더니 이제는 대등한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명화교의 무인들은 천살의 분전에 기쁨을 느꼈다. 한선후도 어린 나이에 교주가 되었다. 하지만 한씨의 핏줄이라 큰 우려는 없었다. 하지만 외부인이고 나이도 어린 천살이 소교주가 되자 일부 나이 많은 교도들은 걱정을 금치 못했다. 천살이 이대로 교주가 되면 명화교의 내부싸움이 격렬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천살의 무위를 직접 확인한다면 그런 걱정을 단숨에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살의 갑자기 강해진 무위에 서창훈은 놀랐지만 천살의 무위가 급격히 오른 후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지 않자 안정을 찾았다. 천살의 외상은 치료가 잘 되었지만 내상은 안정을 취하며 세심하게 치료해야 하는데 계속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기 때문에 나아짐이 보이지 않았다. 천살마기가 천살의 모든 가능성을 펼쳐내지 못하고 있기에 서창훈에게 아직 여유가 있는 것이다.
기절에서 깨어난 호군천은 절망에 잠겼다. 비록 목숨은 건졌지만 팔다리 근육의 파열이 심하고 힘줄들도 가닥가닥 끊어져서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서창훈과 대결하는 천살의 모습을 보니 자신과 대결할 때 일부러 실력을 숨긴 듯 했다. 이제 스물정도 된 천살에게 패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죽어버렸다.
천살의 밑천을 다 털었다 생각된 서창훈은 숨겨둔 한수를 꺼내들었다. 서창훈이 손의 검을 놓았지만 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둥실 떠 있었다. 손을 떠난 검은 육체의 제한을 벗어나 상상도 못할 기상천외한 초식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꿈치 그리고 손목의 제한이 사라지자 초식의 한계도 사라졌다.
- 작가의말
星辰明滅, 별들은 점점 밝아지는 별이 있고 점점 어두워지는 별이 있죠. 그것을 명멸이라고 합니다.
제 뛰어난 필력과 출중한 연출 덕분에 아직도 서창훈과 천살 중 누가 이길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정답의 공개는 내일로 미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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