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현세
남궁천의 검과 음혈이 부딪히자 음혈이 부르르 떨렸다. 남궁천의 격은 검에 진력을 싣기 때문에 상대하는 자를 뒤로 물러서게 하는게 아니라 상대의 병장기를 떨리게 만든다. 악력은 단련이 어려워 타고난 부분이 더 많기에 상대의 손아귀힘을 빼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싸움법이다.
음혈이 떨리자 천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진동하는 힘이라 몸으로 분산시키지 못하고 손아귀 하나로만 버티려니 힘들었다. 곧이어 들어오는 조자운의 권을 피해 뒤로 한걸음 물러선 천살은 떨림이 멈춘 음혈을 꽉 잡았다.
잡서에서 명문정파의 협객들은 합공을 수치스럽게 여긴다고 했는데 다 개소리이다. 무림맹에서 서로 다른 계파인 화산과 남궁의 두 사람은 호흡이 딱딱 맞아들었다. 둘이 십년간 합격술을 연습해왔다고 해도 믿을만한 호흡이었다.
남궁천의 검이 조금 더 위협적이긴 하지만 조자운의 권도 웃으면서 맞아줄 수 있는게 아니다. 천살은 매시각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검을 피하고 권을 막을 것인지 권을 피하고 검을 막을것인지 말이다. 천살이 고수와의 대결경험이 부족한 것을 알기라도 하듯 둘은 허초와 실초를 섞어가며 천살을 농락했다.
천살이 낭패스러운 처지에 처해 위태로운 모습을 자주 보이기는 하지만 남궁천과 조자운도 속이 편하지 않다. 누구도 결정타를 먼저 쳐서 상대에게 천살마성을 생포하는 공을 넘겨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남궁천은 어디선가 자신을 노리고 있을 마교장로까지 신경써야 하니 머릿속이 더 복잡했다.
천살은 조자운의 권에 오른팔만 두번 맞았고 왼팔은 남궁천의 검에 한번 베이었다. 조자운이 더 강해서가 아니라 남궁천을 더 피하다보니 조자운에게 한대 더 맞은 것이다. 남궁천의 검에 맞은것은 실초와 허초를 구분못해서 갈팡질팡하다 한칼 먹은 것이다.
작지않은 부상이지만 천살이 전혀 두려움이 없이 맞서자 남궁천은 속으로 감탄했다. 남궁가의 젊은 세대들은 남궁의 이름을 등에 업고 편하게 자랐다. 고생을 크게 안하고 자랐기 때문에 의지력이 매우 부족하다. 서문가나 모용가의 후기지수들이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데 남궁가는 남궁청아의 미모만 유명하다.
천살은 얕은 밑천에 두명의 고수를 상대하자 좌지우졸(左支右拙 - 왼쪽을 막으면 오른쪽이 샌다)하기 시작했다. 셋의 움직임이 하도 빨라 일반병사들이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셋의 주변에 공간이 생기자 사도무천이 참지 못하고 뛰어들었다.
사도무천이 개입하자 전세는 단번에 바뀌었다. 사도무천은 응사생사박의 초식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한손으로 조자운을 상대했다. 조자운을 가볍게 막아내며 천살과 함께 남궁천을 협공했다.
남궁천이 검에 진력을 실으면 사도무천이 아닌 천살이 검을 부딪혀갔다. 검에 진력을 싣는것은 남궁천도 숨쉬듯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수비를 천살이 대신해주자 사도무천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사도무천이 응사생사박을 사용하는 조자운에게 호감을 품고 칼에서 힘을 빼지 않았으면 조자운은 이미 목숨을 잃었을것이다. 천살이 남궁천의 공격을 막기 시작하자 남궁천도 사도무천의 공격에 대처하기 힘들어졌다.
천살이 쳐다보기에도 까마득한 고수인 남궁천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것은 튼튼한 음혈 덕분과 남궁천이 공격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두가지 이유 때문이다. 일대일이라면 열합도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나 사도무천과 함께하자 남궁천의 공격을 힘겹지만 잘 막아냈다. 이는 사도무천과 남궁천의 비무를 지켜볼때보다 더 많은것을 천살에게 가르쳐주었다.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오?"
남궁천은 갑자기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곧 무당의 장로인 송암자가 끼어들었다. 천살의 음혈과 부딪힐 때 음혈에 실린 미약한 진력을 느낀 남궁천은 천살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천살이 음혈을 만들면서 쇠를 무수히 두드렸기 때문에 빠르게 습득한 것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남궁천은 천살의 천재성에 온몸이 오싹해졌다.
"화산의 꼬마와 함께 저 늙은이를 맡으시오. 무당의 도움은 내 잊지 않겠소."
남궁천의 말에 송암자는 조자운과 함께 사도무천을 협공했다. 사도무천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지만 묶어두는 것은 충분했다. 송현자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기에 송암자는 남궁천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랐다. 남궁가에 빚을 하나 지워주는 동시에 기회가 생기면 송현자가 천살마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궁천과 일대일이 되자 천살은 곧바로 궁지에 몰렸다. 천살의 검이 부러지지 않고 잘 버티자 남궁천은 천살의 몸 여기저기에 칼자국을 내기 시작했다. 팔과 다리가 남궁천에 검에 베여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천살의 투지는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천살의 눈동자가 점점 은백색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예전처럼 흰자위가 붉게 변하지 않았다. 천살이 내공을 익힘으로 인해 기의 소통이 원활해졌기 때문이다. 남궁천을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자 천살은 몸의 주도권을 천살마기에게 넘겨주고 모든 의념을 담중혈에 집중시켰다.
지난번에 천살마기의 힘만 빌리고 몸을 직접 움직인적이 있는데 몸을 천살마기에 맡길 때보다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남궁천이라는 절세고수를 상대로 여유를 부릴 수 없어 통제권을 넘겨버렸다.
천살마기가 몸을 장악하자 어설프던 천살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졌다. 천살은 남궁천보다 자신의 움직임에 더 집중했다. 남의것을 탐낼것이 아니라 자기것을 제대로 소화해내야 한다. 천살은 자신의 움직임에 감탄하며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애썼다.
남궁천은 천살의 눈동자가 갑자기 은백색으로 변하더니 더욱 강한 무력을 뽑아내는 것을 보며 신기함을 느꼈다. 남궁천도 칠정검을 수련하며 화를 낼수록 더 강한 위력을 뽑아낼 수 있다. 잡아다가 딸인 남궁청아와 혼인 시키면 자신과 천살의 피를 동시에 이어받은 무골(武骨)이 태어날지 궁금해졌다.
남궁천의 여유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사이 바뀐 천살의 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시위하듯 음혈의 예기가 점점 강해졌다. 천살은 음혈에 내공이 주입될 때 내력이 거치는 혈도들을 외우는데 온정신을 집중했다. 무기에 내력을 싣는것은 현재 천살의 경지나 내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천살마기는 손쉽게 해냈다.
"쉬운 상황이 아니니 지켜보고만 있지 마시오."
남궁천의 요청에 송현자는 남궁천과 함께 천살을 상대했다. 남궁천은 천살의 음혈에 실린 진력이 자신의 검에 실린 진력과 매우 비슷하자 어떻게든 사로잡든지 제거하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림이나 무당은 알고 있지만 남궁천은 천살마성을 죽이면 안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천살의 팔다리의 상처들이 순식간에 아물어버리자 남궁천은 칠정검의 맹(猛)을 사용했다. 송현자의 부드러운 태극검법과 남궁천의 맹은 아주 궁합이 좋았다. 천살의 몸이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천살마기도 둘의 연수공격에 힘이 부쳤다.
남궁천이 점점 더 강한 살수를 사용하자 송현자는 다급히 전음을 사용했다.
'안되오. 천살마성을 죽이면 큰 화를 당하오.'
남궁천은 예(銳)로 천살의 심장을 찔러가는데 송현자의 전음이 들려오자 급히 검을 멈추었다. 개중 연유는 짐작할 수 없지만 송현자가 심심해서 자신에게 전음을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림맹주의 조건을 천살마성의 생포로 정한데는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천살의 재능에 놀라 품었던 살심이 사라졌다. 살심이 사라지자 검의 예기가 사라지고 예기가 사라진 검은 천살의 심장에 닿기 전에 멈추었다. 검의 예기로만 천살의 목숨을 앗아갈수도 있었는데 남궁천이 예를 빠르게 거둔 덕분에 천살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천살의 의념은 죽을뻔한 위기에 흔들려버렸다. 심장의 위치에 검이 꽂혔는데 무덤덤할 사람은 천하에 몇 없을 것이다. 천살의 의념이 흔들린 틈을 타 천살마기가 담중혈을 차지했다.
천살은 갑자기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느낄수 있는것은 오감이 동시에 전해지는 애매한 느낌이다. 보이는것도 아니고 들리는 것도 아니고 만질수 있는것도 아닌데 그저 상황이 느껴졌다. 몸이 받아들이는 정보들이 가공을 거치지 않고 천살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남궁천은 천살마성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내며 검끝에 피 한방울 묻지 않은것이 의아했다. 쾌검이 사람을 베면 검에 피가 묻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남궁천의 찌르기는 힘을 대부분 회수해서 쾌검이라 할 것도 없었다. 천살마성의 은백색 눈동자는 그대로였지만 기세가 확연히 달라졌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송현자의 어깨에 상처 하나가 추가되었다. 천살의 몸을 완전히 차지한 천살마기는 본능적으로 약한자를 알아보고 먼저 제거하려 했다. 남궁천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송현자는 지금쯤 팔다리 하나정도 잃었을 것이다.
천살의 무위가 갑자기 상승했지만 남궁천은 오히려 기뻤다. 칠정검의 일곱가지 검의를 융회관통하면 마지막 검의인 절(絶)이 나온다. 그러면 칠정검은 절정검이 되는 것이다. 절정(絶情)은 절정(絶頂)의 검법이다. 남궁가의 원로들은 아마 심검의 경지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천살의 검에서 남궁천은 절(絶)에 다가가는 실마리를 얼핏 엿보았다.
곧 무당의 송견자도 싸움에 가입했다. 청표자, 청만자, 청호자도 두 사숙을 거들었다. 남궁천은 겨우 잡은 실마리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아쉬웠지만 무당의 제자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남궁가의 식솔이었다면 바로 호통을 쳤을 것이지만 말이다.
장우민과 강사성 그리고 초영란은 좌익에서 매화검수와 철나한들을 상대했다. 강사성과 초영란은 무력이 조금 부족한 편이라 연수해서 싸우고 있었다. 덕분에 가끔 여유를 내서 천살을 관찰할 수 있었다. 남궁천과 무당의 제자 다섯의 협공에도 태연히 맞서는 천살의 무위를 확인하자 기가 확 죽었다.
사도무천은 조자운과 송암자를 상대하면서 여력을 남겼다. 언제든지 둘을 뿌리치고 남궁천을 암습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남궁천 역시 사도무천을 항상 조심하고 있기에 기회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천살의 무위가 갑자기 상승하자 마음속에 두려움이 생겼다.
그 두려움은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강한지 짐작이 가지 않는 상대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천살마성이라, 대단하구나. 좀 더 많이 알아봐야겠다.'
포정운은 우익에게 무림맹을 밀어버리고 선봉을 지원하라고 일렀다. 일반병사들의 체력이 거의 소진될 시점이다. 이 시점에서 기세를 타는 쪽이 승리를 가져온다고 보면 된다. 남은 성화군 모두를 우익에 투입시킨 포정운은 선봉에서 우익의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주기를 바랐다.
- 작가의말
魔星現世, 천살마성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다. 천살마성이 어떤건지 맛보기로 무림맹과 마교에게 알려줍니다.
제가 처음 글을 쓴게 8월 26일 입니다. 그때는 머릿속의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을 마구 끄집어내서 글을 썼습니다. 어느덧 석달이 지나고 제 글을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여기부터 궁서체) 능력으로 인정받는다는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군요. 항상 얼굴로만 인정받다가 처음으로 능력이 인정받은것 같아서 너무 기쁩니다. 어릴때부터 쭉 능력으로만 인정받은 분들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