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성공
고삼은 나무껍질과 옷을 찢은 천으로 밧줄 여러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검과 은자를 보자기와 옷으로 꽁꽁 싸맨 후 여러개의 밧줄들로 묶었다. 밧줄들의 다른 한끝을 허리띠에 묶은 뒤 검과 은자를 안고 호수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검과 은자의 무게로 고삼은 호수 바닥에 가라앉았다. 한참 걷다가 숨을 참기 힘들어지자 고삼은 검과 은자를 싼 보자기를 바닥에 놓고 수면으로 떠올랐다. 숨을 마음껏 들이킨 고삼은 밧줄을 당기며 다시 내려가 보자기를 안아든 후 앞으로 걸어갔다. 아침에 출발했지만 호수 밑에서 방향이 자주 틀어지다보니 직선으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호숫가의 뭍으로 올라갔을 때는 어두운 저녁이었다.
가볍게 운기를 하자 소양공의 기운이 몸을 덮혔다. 반각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옷이 전부 말랐다. 불필요한 것들은 버린 고삼은 은자와 검만 챙겨서 도시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호수와 멀지 않은 곳에 관도가 있었기에 쉽게 도시를 찾아냈다.
객잔주인을 통해 성도로 향하는 배를 구한 고삼은 배를 타고 성도에 도착했다. 당문으로 향하는 마차를 얻어탄 고삼은 당문에 도착하자 망설여졌다. 당무영이 당문에서 현재 어떤 처지인지도 모르고 당무영이 천살을 구할 생각이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고삼이라는 이름을 대면 자신을 만나주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당무영이라는 자를 찾아왔소. 우리 기루에서 술을 마시고 돈이 없다며 당문에 와서 받아가라고 했소."
고삼은 예전에 기둥서방을 할 때 선배들과 함께 화전을 떼먹은 자들에게서 돈을 받아내러 발품을 판 경험이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고삼은 선배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아 돈받을 일이 생기면 항상 불려나갔다. 당무영을 꼭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머리를 짜서 생각해낸 방법이다.
총관은 고삼을 아래위로 훑어본 뒤 하인을 시켜 당무영에게 말을 전하게 했다. 잠시뒤 하인이 당무영이 기루에 간적이 없다고 말을 전해오자 총관은 고삼을 쫓아내려 했다.
"그 당무영이라는 자를 불러오시오. 그날 온 손님이 맞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나도 돌아가서 할말이 있지 않겠소? 이대로 돌아가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턴데 그래도 괜찮겠소?"
보통 돈도 없이 기루에 와서 술을 마시는 자들은 어느정도 알려진 자들이다. 기루에서도 신분이 확실한 자들이기에 외상을 준다. 그런 자들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고삼처럼 덩치가 좋은 자들이 위압감을 조성하고 목소리가 큰 자들이 문앞에서 누구누구가 화전을 떼먹었다고 크게 떠드는 것이다. 그러면 체면때문에라도 외상을 갚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총관은 고삼의 말에 하인을 다시 보내서 당무영을 불러오게 했다. 총관중에서 막내이고 가장 권력이 적은 접객총관은 자신의 대처 미흡으로 당문의 명성에 먹칠을 하면 다른 총관들에게 꾸지람을 받는다. 혈족이라 체벌같은건 없지만 최소 보름동안 잔소리를 들어야 하니 차라리 체벌이 더 그립다.
당무영은 외출을 자주 하지 않고 마교에서 당문으로 돌아온지 오래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 자신을 사칭해서 공짜술을 먹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상대가 기어코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겠다는 말에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갔다. 방계 주제에 독혈대 대장이 된 것 때문에 질투와 시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데 여기서 버티면 안좋은 소문이 순식간에 부풀려질 것이다.
얼굴을 수북히 덮은 구레나룻때문에 단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당무영은 결국 고삼을 알아보았다.
"이놈, 못본지 얼마 되었다고 장난이 많이 심해졌구나."
"죄송합니다. 반가운 마음에 장난을 조금 쳤습니다."
당무영은 고삼을 데리고 근처의 주루로 향했다. 중요한 손님이면 객방을 내어줄수도 있지만 고삼은 마교 소속이고 함께 천살의 호위대를 관리하던 사이이다. 가문으로 들이려면 신분을 밝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고삼의 신분이 걸리는 부분이 많다.
주루에서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운 둘은 근처의 호수로 향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호수가 아니라 저수지를 만들려다 지반이 가라앉는 바람에 형성된 호수이다. 고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당무영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말거라. 엿듣는 자가 없다."
"당대협, 대형이 소림사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가 가서 구출해야 합니다."
당무영은 천살이 무림맹의 남궁천 등과 대결을 벌인 일까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뒤로 천살의 소문은 강호에서 사라졌다. 고삼의 말을 듣고서야 교주와 소림의 함정에 빠져서 소림의 복마전이라는 곳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혹시 은자가 충분하느냐? 소림까지 가려면 여비가 적잖이 필요할 것이다."
"은자는 아흔냥정도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할까요?"
잠시 계산을 하던 당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물가가 성도의 두배이상 되지 않는 한 충분할 것 같구나. 더이상 지체할 필요도 없으니 바로 출발하자."
당무영은 고삼과 함께 당문으로 가서 말 두필을 얻어냈다. 성도에 도착한 뒤 당문이 경영하는 마방에 말을 돌려준 뒤 곧바로 나루터로 향했다. 공교롭게 이튿날 아침에 출발하는 배가 있어 예약을 해놓은 뒤 기루로 향했다.
"기루에서는 술만 마시고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 눈과 귀가 많은 곳이다."
당무영은 방계라는 꼬리표 때문에 독혈대의 대장직을 맡고 있지만 가문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중요정보들도 접촉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문이 천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조심했다. 천살을 구하러 간다는 것이 들키기라도 하면 방해를 받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화포에 두방이나 맞은 상태에서 복마전에 떨어져 기식이 엄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무영은 조급한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느냐?"
당무영이 대가리 꼬리 다 잘랐지만 고삼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다른 자들이 들어도 괜찮은 일이라 고삼은 수적들에게 유인당해 섬에 갇힌 일을 당무영에게 들려주었다. 고삼이 호수를 벗어난 방법을 듣자 당무영은 껄껄 웃었다.
"그러지 말고 물에 잘 뜨는 나무토막에 검과 은자를 매달고 헤엄쳐서 나오면 되지 않았느냐?"
고삼이 잘 생각해보니 뗏목을 만들어서 검과 은자만 올려놓고 자신은 헤엄쳐서 나오면 되었다. 굳이 자신까지 뗏목위에 올라갈 필요가 없은 것이다. 바닥에 가라앉은 배에 집착을 하다보니 사고가 제한된 것이다.
"대협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고삼은 자신의 머리가 둔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깨달음을 잊지 않기 위해 입속으로 부단히 되뇌었다. 나지막하게 읊조렸지만 당무영의 귀에도 잘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귓등으로 흘렸는데 갑자기 집착을 버리는 것이 명현공의 무의라는 생각이 들면서 당무영도 입속으로 되뇌이게 되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모든것이 자연스러워지고 명현공의 경지가 더 높아질 수 있다. 계속 명현공에 대해 고뇌를 하며 당무영과 고삼은 기루로 들어섰다.
"손님, 혼자 오신 겁니까?"
기루의 대문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환이 고삼에게 물었다. 고삼은 입속으로 되뇌이던 것을 멈추고 당무영을 찾았지만 방금전까지 함께 있던 당무영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전까지는 고삼도 다른데 정신을 집중하면서 당무영이 계속 느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당무영이 사라진 것이다.
"당대협, 어디 가셨습니까?"
고삼이 나직이 외치자 당무영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사환은 아무도 없던 곳에서 사람이 하나 나타나자 겁에 질려 엉덩방아를 찢었다. 당무영의 그림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몸을 일으켰다.
"두분 대협 상루로 모시겠습니다."
당무영의 대단한 재주에 놀란 사환은 서둘러 둘을 상루로 안내했다. 상루는 기루의 사층으로 신분이 있는 자들만 들이는 곳이다. 손님을 접대하는 예기들도 금기서화에 능한 재녀 소리를 들을만한 고급기녀들이다.
삼층은 중루라고 하는데 돈이 많은 자들이 방을 잡고 기녀를 불러 즐기는 곳이다. 이곳은 예기들보다는 함께 술을 마셔주는 주규(酒糾)라 불리는 기녀들이 시중을 든다. 술을 마시는 도중 은근한 신체접촉도 있기에 사내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하루는 일층과 이층인데 방으로 나뉘지 않고 예기수업을 받는 동기(童妓 - 어린기생)들이 손님들에게 연주와 노래를 들려준다. 가끔 재주꾼들이 성도에 방문하면 이곳에 청해다 재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상루는 붉은 천으로 장식을 해놓고 홍초로 붉을 밝혔다. 온갖 붉은색으로 도배되어 마음을 들뜨게 했다. 주문도 필요없이 빈속에 마시기에도 부담이 없는 소흥 여아홍과 간단한 안주가 올랐다. 술과 안주를 먹는 사이 예기들이 들어와 연주와 노래를 하고 시도 읊었다. 손님이 원하면 바둑상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고삼이 기둥서방을 했던 기루는 몸을 파는 기루이다. 그래서 이런 고상한 놀이를 즐기는 경우가 없다. 거기에 당무영의 당부도 있어 말을 아끼며 술과 안주만 축냈다. 늦은밤이 되어 기루를 떠난 당무영과 고삼은 나루터 근처에 가서 방 하나 잡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사환의 입을 통해 당문의 고수로 추정되는 유령인에 대한 소문이 성도에 은밀히 퍼지고 있음을 당무영은 꿈에도 몰랐다.
주체는 벽휘동의 보고서를 몇번을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다 빼고 읽어보면 이번 일은 실패이다.
'마교 교주 한선후는 팔 하나를 버리는 대가로 틈을 만들어내서 도주했습니다. 마공을 익힌 한선후의 내공이 너무 심후해 협공한 일곱명이 더 지쳤다는 관찰자의 보고입니다. 한선후는 마교로 돌아가지 않고 서북쪽으로 도망쳤습니다.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이간계를 펼친것이 주효했다고 생각됩니다.'
'마교의 대장로라 불리우는 사장로가 천살의 심복으로 추정됩니다. 감숙의 마인들은 사장로가 직접 만들어냈고 귀주의 마인들의 주변에서도 사장로의 수하들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두명의 광증이 도진 귀주마인은 결국 심맥이 터지면서 죽어버렸습니다. 남은 셋 중 한명이 광증이 도졌고 두명은 사장로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도망친 두명의 귀주마인 중 하나는 종적이 사라졌고 하나는 치명상을 입고 낭떠러지에 떨어졌는데 시체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각지에서 출현한 마인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마교에 침투한 첩자들에게 확인을 받은 결과 마인 전부 사장로의 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확보한 비급을 비교해본 결과 글씨체가 동일하고 내용도 똑같습니다. 총 열네장으로 구성된 천마신공은 현재 존재하는 내공들과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운기법이 적혀있습니다. 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은 수련자체가 불가능하고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자들만 수련이 가능합니다. 내공을 익힌 자들보다 외공을 익힌 자들이 더 쉽게 익혀낼 수 있습니다.'
'불민한 저의 실책으로 천살의 꾀에 속은 것 같습니다. 천살과 손을 잡은 것은 사장로이고 한선후만 천마신공을 익힌 것처럼 꾸며 둘사이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허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금의위와 무림맹의 힘을 빌어 한선후를 처단하고 사장로가 마교를 차지할 예정이었습니다. 이에 비추어 볼 때 한선후가 천살에게 위협이 되는 것 같다는 판단입니다. 천살이 복마전에 숨어들어간 것은 한선후를 피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 복마동에서 대결할 때 천살의 약점이 한선후에게 들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마교의 교주자리를 돌려주는 것을 미끼로 한선후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한선후와의 협상을 위해 지금의 마교는 이대로 두고 금의위와 동창 그리고 무림맹의 모든 힘을 마인의 주살과 비급의 회수에 투입할 것을 건의드립니다. 그리고 대동에 더 많은 인력을 투입해 마인의 약점을 더 빠르게 파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사료됩니다.'
- 작가의말
제목만 보고 천살의 탈출을 예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고삼이 섬에서 탈출했고 당무영이 당문에서 탈출을 합니다. 사실 당무영은 갇혀있는게 아니라서 탈출이라고 하기 좀 그렇지만요.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