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검지쟁
매화검에는 하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매화검의 초식을 오랫동안 수련하면 체질이 변한다. 설태매골(雪胎梅骨)이라고 명명된 이 체질은 몸의 혈도들을 깨끗하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육신이 화산의 무공을 수련하기 적합하게 변화하기에 보다 빠르고 숙련되게 화산무공들을 익힐 수 있다.
이는 호군천도 불과 이년전에 발견한 것으로 우연히 오래전 화산무인의 주해를 보고 알아차렸다. 그후 호군천은 딸인 호매령에게 매화검만 수련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질이 출중한 어린 제자를 새로 들일 계획도 세우고 있다.
화산에서 서창훈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호군천은 매화검의 비밀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작정이다. 그래서 이년간 화산의 다른 무공들을 능숙하게 익혔음에도 계속 매화검만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암향소영(暗香疏影)의 절초도 전혀 효과가 없자 어쩔수 없이 청풍부월검을 사용했다.
암향소영은 옥골선풍과 마찬가지로 매화를 형용하는 시구에서 따온 이름으로 매화를 지칭하는 문구이다. 수많은 검영으로 상대의 눈을 어지럽히는 환검과 상대의 대처에 따라 유연하게 변하는 변검, 그리고 그속에 숨겨진 독사의 이빨과 같은 치명적인 쾌검이 어우러져 매화검의 모든것을 담은 초식이라 할 수 있다.
청풍부월검(淸風浮月劍)은 화산 최고의 무공으로 손꼽힌다. 청풍부월검의 검의는 열두글자로 개괄된다. 사유사무(似有似無), 있는듯 없는듯, 사실사허(似實似虛), 실초인듯 허초인듯, 사변미변(似變未變), 변초인듯 아닌듯.
똑같은 초식이라도 검에 힘을 실었는지 안 실었는지에 따라 다른 효과를 보인다. 초식은 어느 순간에나 허초와 실초가 서로 바뀔 수 있고 어떤 동작에서도 처음 보는 변초가 튀어나올 수 있다. 검법의 위력에 부족하지 않은 수련 난이도 때문에 화산에서도 제대로 익혀낸 자가 드물다.
서창훈 이후로 제대로 익혀낸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청풍부월검이 호군천의 손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청풍부월검은 정해진 초식이 없고 십삼식의 투로(套路)만 있다. 이 열세개의 투로를 얼마만큼 다양하고 효과적으로 연결하여 초식으로 만드느냐에 따라 청풍부월검의 위력이 정해진다.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것만 못하기에 익혀내기가 굉장히 어려운 검법이다.
청풍부월검은 환검의 극의를 보여주는 검법이라고 해야 한다. 화산의 한 무인이 밤하늘을 바라보는데 허공에는 보름달이 밝게 떠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문득 이 바람이 저 하늘의 달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위로 불어올리는게 아닌지 의문이 생겼다. 그저 웃고 지나갈 유치한 생각이었지만 무공을 수련할 때도 계속 떠오르더니 오랜 시간후에 청풍부월검의 십삼식을 만들어냈다.
후에 몇대를 거치면서 십삼식을 가다듬었으나 결국에는 최초의 십삼식으로 돌아갔다. 십삼식을 변화시키거나 초식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청풍부월검의 위력을 떨어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청풍부월검은 천살의 난화유수의 회피법에 상극이었다. 둘다 환과 허를 기반으로 하는데 천살의 경지가 호군천에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검로가 바뀐 호군천이 천살의 몸에 검자국을 내기 시작하자 화산제자들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청풍부월검은 환검의 끝을 엿보는 검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남궁천 역시 강검의 끝을 엿본 자이다. 하지만 천살과 대결할 때 전력을 다하지 않았기에 천살은 처음으로 극의에 다다른 검법을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호군천의 검에 대응을 하려고 하면 항상 한박자 늦었다. 그리고 허와 실을 제대로 구분해내지 못해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몸 여기저기가 검에 베이고 나서야 천살은 선우복명과의 대화에서 얻은 깨달음을 떠올렸다.
'초식에 미혹되지 말자. 이건 초식과 초식의 대결이 아니다. 천살이라는 사람과 호군천이라는 사람의 대결이다. 상대에게 대응하지 말고 내 검을 펼치자.'
청풍부월검의 유와 무에 천살은 유로 대응했다. 허와 실에는 실로 대응하고 변에는 불변으로 대처했다. 상대의 허허실실에 흔들리지 않고 천살 자신의 검로를 고수했다. 호군천의 검에 몸의 상처는 늘어났지만 천살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검을 펼쳐나갔다.
선우가문의 반양검처럼 고급검법들은 최고의 경지를 초식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검법의 검의를 전부 깨달으면 초식은 검법을 가두는 틀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검법을 알게 하는 고마운 존재지만 수준이 높아지면 속박하는 틀이 되어버린다.
천살은 아직 특정 검법의 검의를 전부 깨달을 정도로 검법을 익히지 못했다. 그래서 내공에 비해 검술이나 무공의 경지가 많이 부족했는데 호군천과의 대결을 통해 점점 경지를 끌어올리고 있다. 초식의 극의도 보지 못한 주제에 초식의 틀을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서씨, 동문의 목을 베어버리고 잠잘때 눈이 편하게 감기던가?"
조유천이 말로 시비를 걸어오자 서창훈은 기가 차지도 않았다. 먼저 분쟁을 일으킨 것도 권파이고 사문을 먼저 배반한 것도 권파이다. 그런 주제에 적반하장을 하고 있다.
"그러게 좋게 말로 하지 왜 주먹부터 들었느냐. 사건의 발단은 너희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더냐."
조유천은 서창훈의 대답에 코웃음을 쳤다.
"너희 검파는 백명이 넘고 우리 권파는 삼십여명밖에 안 되는데 다수결로 다음대 장문인을 정하자고? 장문인이 후보를 정하면 그 가운데서 장로들이 선택하는게 전통인데 아예 모든 장문제자를 대상으로 화산파 문도 전체가 다수결을 하자는게 말이나 된다고 생각했느냐?"
서창훈은 조유천의 말을 가볍게 받았다.
"너희 권파의 장문인이 정한 후보 모두가 권파의 제자들이더구나. 너희 권파가 장문인 자리를 독차지하려는 심보가 보이는데 우리는 가만히 손놓고 당하기만 하라는 것이냐?"
"서씨, 우리 권파의 제자들은 응사생사박을 대성한 자가 세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너희 검파의 제자들은 청풍부월검을 익혀낸 자가 아무도 없었다. 최고의 무공을 대성한 자들중에서 장문인을 뽑는게 당연한 일 아니냐?"
서창훈은 평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응사생사박은 조유천의 사부가 창안한 무공이다. 조유천의 사부인 백운존자는 장삼풍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매와 뱀의 싸움을 목격했다. 그 싸움을 목격한 백운존자는 응사생사박이라는 권법을 창안해 냈고 장삼풍은 유인심경(柔靭心經)을 창안했다.
유인심경이 바로 무당의 이유극강(以柔克剛)의 기본이 된 무학이다. 화산과 무당의 사이를 나쁘게 한 최초의 시작이 바로 응사생사박과 이유극강이다. 같은 뿌리에서 다른 형태로 자란 두 열매는 서로 빛깔과 맛을 비교하며 경쟁을 했다. 하지만 응사생사박은 한번도 유인심경을 이기지 못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화산은 무당파의 위에 놓여 있었다. 무당은 그때까지만 해도 무림문파라기보다 유명한 도관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화산과의 비무에서 번번이 이겨나가자 무당의 명성이 강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무당은 화산을 발판으로 삼아 지금의 위치까지 쉽게 올라온 것이다.
"응사생사박으로는 무당을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많이 패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이냐?"
조유천은 느글느글한 어투로 말을 받았다.
"그래서 청풍부월검을 대성한 서씨가 장삼풍의 손에서 세합이나 버티셨군. 참으로 대단히 감축드리오."
서창훈은 현재 명실상부한 정파무림의 제일고수이다. 인중지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장삼풍과의 대결에서 세합만에 패한것은 서창훈의 역린이라고 할 수 있다. 무공, 무위, 경지 전면적으로 패했으니 변명거리도 없는 참패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장삼풍에게 거듭 대결을 요청하며 도발한 것은 청풍부월검을 대성하고 의기양양했던 서창훈이다.
장삼풍과의 대결을 조유천이 언급하자 서창훈은 더이상 화를 참을 수 없어 검을 뽑아들고 조유천을 향해 덮쳐갔다. 서창훈의 기세가 흉흉하자 조유천은 급히 소리 질렀다.
"선우장로, 도움 부탁드리겠소."
조유천은 도를 들지 않고 응사생사박으로 대응했고 선우복명은 반양검을 극한으로 발휘했다. 그러고도 겨우 서창훈의 공격을 막아내는데 그쳤다. 서창훈 역시 호군천과 마찬가지로 청풍부월검을 사용하고 있는데 둘의 경지는 어른과 갓난아기의 차이보다도 더 심했다. 서창훈의 일검일검은 절초처럼 조유천과 선우복명의 목숨을 노렸다.
"조유천, 배은망덕하고 기사멸조를 한 화산의 반도야.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외인의 힘까지 빌려서 화산에 칼을 겨누는 것이냐. 화산의 조상님들을 뵐 낯짝이 있기는 한거냐?"
조유천은 서창훈의 공격에 편하게 숨쉴틈도 없었지만 대답을 늦추지 않았다.
"외인이라니. 전부 화산에서 키운 명화교 소교주의 수하들이니 한집 식구들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매정한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구나. 사십에 가까운 검파 제자들이 인질로 잡혀있는데도 눈썹 한번 까딱하지 않는구나."
서창훈은 조유천의 말에 크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너도 한때 화산의 제자였으니 알 것이다. 화산 제자라면 이런 상황에서 웃으며 죽을 수 있다."
서창훈의 말에 말문이 막힌 조유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간 무공수련은 안 하고 구공(口功 - 입재주)만 수련했나 보구나. 잘 보거라. 화산의 기상과 전통이 담긴 응사생사박이다."
화산의 무공은 화산의 산세를 닮은 기(奇)와 험(險)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백운존자는 매와 뱀의 싸움에서 더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화산의 기와 험에 기초하여 응사생사박을 만들어냈다. 그 뜻은 응사생사박을 완벽히 익히면 무공이 지닌 무의를 초월하는 위력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수백년간 화산파를 지탱해온 화산의 뿌리가 조유천의 손에서 펼쳐졌다. 상대의 목을 베기 위해서는 팔 하나쯤은 웃으며 건네주는 화산의 기개가 조유천의 무공에 엿보였다. 서창훈은 전력을 다하면 조유천의 목숨을 취할 수 있으나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기에 살수를 쉽게 사용하지 못했다. 옆에서 반양검을 펼치는 선우복명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조유천은 천살의 무공이 점차 발전해 나가는 것을 보고 서창훈이 끼어들어 방해를 할까 걱정되어 서창훈을 도발했다. 서창훈도 조유천의 속셈을 대강 짐작하지만 장삼풍이라는 역린 때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조유천과 검을 섞게 되었다. 서창훈은 호군천이 천살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짐작하고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유천은 천살마기의 도움을 받은 천살이 남궁천과 힘겹게 대항하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현재 경지가 훌쩍 오른 상황에서 천살마기만 움직이면 천살이 호군천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서창훈과 조유천은 서로 꿍꿍이를 품고 대결에 임하고 있다.
서창훈이 실수한 부분은 천살의 천살마기를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이다. 조유천이 실수한 부분은 천살마기가 천살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천살이 원하지 않을 때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고 천살이 간절히 염원해도 꿈쩍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현재 천살은 자신의 힘으로 호군천을 이길 생각만 머리에 꽉 차있고 천살마기는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
호군천의 청풍부월검을 상대하며 천살은 자신이 수련했던 초식들과 상대했던 초식들 그리고 목격했던 초식들을 서서히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팔다리와 가슴과 배뿐이 아니라 얼굴에도 몇개의 검상이 추가되었다. 하지만 천살이 호군천의 검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의 검술을 펼치기 시작하자 호군천도 치명적인 일격을 적중시키지 못했다.
점점 초식을 지워가던 천살은 갑자기 강력한 초식이 그리워졌다. 초식을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주제에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본 반작용으로 초식에 대한 갈증을 강하게 느꼈다. 하지만 천살은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려 하지 않고 계속 초식을 잊어가려 했다.
더 높은 경지로 향하려는 천살의 욕심과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야 한다는 이성이 불꽃튀는 싸움을 벌였다. 둘의 부딪힘은 무수한 대화가 오가고 무수한 깨달음들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 과정에 천살의 뇌리에 하나의 초식이 불쑥 떠올랐다. 뜬금없지만 천살의 오래된 고민과 축적된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초식이다.
- 작가의말
조금 늦었습니다. 중간에 일이 좀 있어서 글이 늦게 올라갑니다. 혹시 이번편을 긴 시간 정성들여 썼는데 왜 이정도밖에 안되냐 하실까봐 말씀드립니다.
다음편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초식명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전작 절세신응의 작가의말에서 미리 말씀드린 적이 있는 유성소환입니다. 당문호는 토네이도, 항응은 어스퀘이크, 천마는 메테오라고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미더덕이라고 어릴때부터 귀에 못 박히게 들었습니다.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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