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색
셋째날에는 원각이, 넷째날에는 팽월이, 다섯째날에는 언장동이 천살과 대결을 했다. 다섯째 날 저녁 표운이 찾아오자 천살은 불만을 토로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오? 이런 식으로 해서 한선후가 미끼를 물겠소?"
"천대인, 지금 이건 보여주기에 불과합니다. 아마 강호에는 이미 무림맹과 천대인이 불화를 일으켜 크게 싸우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겁니다. 금의위는 그 소문을 진실처럼 만들 능력이 있고 말이죠."
천살은 서문고검과 남궁천과의 대결에서 약간의 깨달음을 얻었다. 천살의 본능은 조용히 깨달음을 소화시키기를 원하지만 천살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뭔가 어긋남이 있으니 자연스레 인내심이 줄어들고 여러가지에 불만이 생겼다.
여섯째날에는 무림맹에서도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천살은 조용히 명상을 하며 며칠간의 대련에서 얻은 깨달음을 정리했다. 정리가 다 끝나고 나서도 천살의 마음은 갑갑해 있었다. 이것저것 다 부수고 다니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천살마기는 얌전히 있는데 이게 무슨 조화지? 내가 원래 폭력적인 사람이었는가?'
천살은 태극혜검을 보고 태극을 느꼈다. 천살의 몸속에서는 천살마기와 신화공의 기운이 양립하고 있다. 태극의 깨달음은 천살에게 이 두 기운으로 태극을 이루는게 순리라고 알려주고 있지만 이 두 기운은 천살이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그 괴리감에서 오는 정신적과 심리적인 고통이 천살을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불사공 덕분에 주화입마따위는 걱정도 해본적이 없는 천살이기에 심마와 비슷한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으면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천살이 좀 더 오랜 시간 무공에 대해 고민하고 자아성찰을 했다면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수양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무공성취와 무위는 천살이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커다란 금덩이를 주워서 벼락부자가 된 가난뱅이가 자신은 부자라고 착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사고방식이나 그 알맹이는 가난뱅이때에 비해 크게 나아진것이 없는데 가난뱅이는 자신이 부자이고 자기 수준이 부자들하고 비슷한 수준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송운자나 무당오자중에 태극혜검을 본 자와는 달리 천살은 육체가 완성되었기에 행동이나 무공에 제한을 받지 않았다. 육체의 수준이 정신에 비해 매우 높기 때문에 태극혜검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어도 그렇게 심각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천살은 무당의 제자가 아니고 도교의 용어들에 대해 직관적인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태극혜검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당문에서 칠변절독을 통해 태극이 무엇인지 맛보았다. 오행이 상생과 상극을 반복하고 음양이 어우러지다 반목하며 천살의 몸속에 천태만상을 펼쳤다. 명확히 알지는 못해도 태극혜검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것은 아니다. 무의식은 그 깨달음을 받아들여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하려 하는데 천살 본인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에 무의식과 의식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다.
만약 서문고검이나 남궁천과 같은 고수들과 대련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렀다면 천살은 안정적으로 태극혜검의 깨달음을 수습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며칠사이의 진행이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것을 천살도 의식했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도망가면 된다는 생각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천살의 무의식과 본능은 부자연스러움을 감지하고 그 부자연스러움을 해소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천살에게 여러가지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둘러싼 확고한 사고가 불가능한 무의식과 본능은 태극의 깨달음을 빨리 체화해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를 원하고 있다. 주변환경을 바꾸는 의식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기에 천살 본인이 강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모순과 불균형 때문에 천살은 매우 갑갑한 마음이 된 것이다. 경험이 부족하고 심계가 깊지 못한 천살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어렴풋하게 힘을 더 키우면 이러한 갑갑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무의식과 본능이 천살에게 보낸 신호가 미약하게나마 천살의 의식에 접수된 것이다.
천살은 저녁이 되어 표운이 오기를 기다렸다. 갑갑한 마음에 표운을 닦달하려는 것이다. 표운이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지 못하면 약조를 깨고 혼자서 명화교의 무리를 덮쳐 교주와 통쾌하게 싸울 작정이다. 계속 실력을 키우면 언젠가는 천살 자신의 힘만으로 복수가 가능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통쾌하게 싸우고 부수고 싶다.
저녁이 되자 모옥 밖에서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표운은 무공이 별로이지만 경공은 뛰어나기에 발걸음 소리가 훨씬 작고 규칙적이다. 지금 다가오는 자는 무공수준이 아주 낮은 자로 보였다. 의문이 든 천살은 모옥의 문을 열고 다가오는 자를 확인했다.
다가오는 자는 여자였다. 긴장 때문인지 두려움 탓인지 숨소리가 약간 거셌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피부는 백옥처럼 희고 도자기처럼 매끄러워 보였다. 이마는 넓지 않으나 시원하게 틔였고 눈썹은 가늘지만 진했다. 그 밑에 자리한 눈동자는 샛별같이 아름답고 눈매는 순진무구해 보였다.
오똑한 코는 하늘의 장인이 정성을 들여 빚은 듯 흠잡을 데 없었다. 밑에 앵두빛 입술이 자리하고 있는데 아랫입술이 조금 두껍지만 전체적인 청순한 외모에 흠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과 코처럼 사람의 눈길을 끄는 매력이 있어 얼굴 전체가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에 천살은 기억을 헤집었다. 풍운장에서 한번 본적이 있는 여자다. 물론 천살은 이름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통해 이름을 얼핏 들었지만 확연한 기억으로 남아있지는 않다.
"남궁세가의 남궁청아입니다. 가부는 남궁 천자 쓰십니다. 날씨가 쌀쌀한데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 하지요."
남궁청아의 말에 천살은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모옥안이 지저분하고 더러워 소저에게 보이기 부끄럽소. 할 이야기가 있다면 여기에서 하시오."
남궁청아는 자신이 가져온 술과 안주를 들어보이며 말했다.
"술 한잔 하고 가볍게 대화를 하려고 합니다. 설마 제가 무공이 약하고 여류지배라서 거절하는건 아니겠죠?"
천살은 저벅저벅 걸어서 꽤 굵은 아름드리나무로 향했다. 검을 꺼내서 나무를 베어낸 천살은 세토막을 내어 하나는 밥상으로, 두개는 의자로 만들었다. 남궁청아는 자신이 가져온 술과 술잔 그리고 안주를 급조한 밥상위에 차린 후 수건 하나를 갓 만든 의자위에 펼쳐놓고 그위에 앉았다.
'이 남자 생각보다 괜찮네. 모옥안에 들어가면 내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까지 해주는 걸 보면.'
남녀가 같은 방에 있는 모습이 목격되어도 큰일나는 시대이다. 설사 아무 일이 없었다 해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된다. 남궁청아가 모옥에 들어가자는 말은 사실 매우 큰 용기를 낸 셈이다. 천살이 그것을 거절하자 남궁청아는 천살에게 품었던 두려움이 조금은 가시고 호감이 생겼다.
"천소협은 이 남궁청아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술이 몇잔 들어가자 남궁청아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샛별같던 눈도 흐릿한 기운이 서렸는데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서로 묵묵히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는 상황이 어색해서 남궁청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로 얼굴을 본게 오늘이 두번째이고 대면으로 치면 오늘이 첫대면이오. 무슨 생각을 가질만한 단계는 아닌것 같소."
남궁청아는 손으로 입을 막고 호호거리며 웃었다. 웬만한 여자가 이런 행동을 했으면 가식적으로 보이고 짜증이 났을 수도 있겠지만 남궁청아가 하니 웬지 품위가 넘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이 남궁청아가 매력적이지 못한 건가요 아니면 천소협의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한 건가요?"
천살은 가슴이 울렁거렸다. 남궁청아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가 대놓고 호의를 표시하고 여차하면 몸도 던질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목석처럼 가만히 있을 수 있다면 그건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때 천살의 뇌리에는 호매령이 불쑥 떠올랐다. 한화령이 아닌 호매령이 생각나자 천살은 당황한 채 입을 열었다.
"남궁소저는 내가 본 여인들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할 수 있소. 다만 이 천모의 마음속에는 다른 여인이 있소."
'천살은 동자공을 익힌 몸이다. 그 동자공을 반드시 깨뜨려야 한다. 하지만 이게 중요한게 아니다. 네가 천살의 씨를 받아낼 수 있다면 네 자식이 장차 남궁가의 가주가 되고 천하제일고수가 될 수도 있다. 이 아비도 천살과 생사대결을 하면 한시진이상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천살과 혼인한 한화령은 현재 회임중이다. 무슨 뜻인지 잘 알것이라 믿는다.'
"천소협이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 이렇게 깊을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아내분이 회임한지 몇개월이나 되었다고 들었어요. 영웅호색이라고 몇개월간 참으셨으면 이 남궁청아에게 마음이 동할 만하지 않나요?"
남궁청아는 일부러 한화령의 회임을 들먹였다. 천살이 동자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한화령이 부덕한 일을 저질렀음을 암시한다. 한화령의 배신을 은근슬쩍 언급하며 천살의 자존심을 건드리면 쉽게 넘어오리라 생각했다.
"이 천살은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남궁소저가 이 천살을 이리 대하는데는 필히 연유가 있을 것이오. 사람과 사람사이에 목적이라는 벽이 있으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법이오."
남궁청아는 천살의 화법에 감탄하고 말았다. 남궁청아의 조신하지 못함을 꾸짖으면서도 남궁청아의 기분이 나쁘지 않게 배려해 주었다. 마교의 소교주가 흉악하고 잔폭한 사람이라 예상했는데 생각밖으로 배려심이 넘치는 남자였다.
"이미 수치심 따위가 남아있지 않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부가 천소협을 매우 좋게 보아 저에게 천소협과 합방을 하여 천소협의 아이를 가지라 했습니다. 만약 남궁가의 사위로 들일 수 있다면 더 좋구요. 어차피 가문이 시키는대로 시집을 가야 할 운명인데 천소협과 같은 소년영웅과 맺어질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요."
남궁청아의 말은 천살의 마음을 격동케 했다. 여자가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말이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말일 것이다.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며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때 또 호매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참으로 미안하오. 이 천살은 부인이 살아있는 동안 다른 여자에게 한눈도 팔지 않을것을 맹세했소. 남궁소저는 출중한 여인이니 필히 나보다 훨씬 나은 배필을 만나 평생을 행복하게 사실 수 있을 것이오."
그뒤로 둘은 대화가 없이 술과 안주를 싹 비웠다. 남궁청아는 사뿐 일어나서 천살에게 포권을 했다.
"이 남궁청아가 마지막으로 천소협에게 묻겠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고개만 끄덕이면 모옥에 들어가 천소협을 기다리겠습니다."
천살은 숨을 크게 몰아쉰 후 대답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떨림이 없기를 바랐다.
"날이 어두우니 가는 길에 발밑을 조심하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
돌아서서 걸어가는 남궁청아의 눈에는 언뜻 이슬이 맺혔다. 모든 일이 끝나자 수치심이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성공하면 성공한대로 실패하면 실패한대로 괴로운 것이 남궁청아의 입장이다. 남궁청아는 돌아가는 길에 한화령을 비웃었다.
'참으로 복도 없는 여인이구나. 저런 남자다운 남자와 혼인을 하고도 외도를 하다니. 동자공 따위는 핑계일 것이다. 동자공만 익혀서 저렇게 강할 수 있다면 세상 무인들이 전부 동자공을 익혔겠지.'
- 작가의말
누가 혹시 길을 가다 천살을 만나면 제 대신 싸대기 날려주세요. 왜 저런놈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 의문입니다. 입안에 넣어주는 밥을 뱉어내다니, 나는 천살을 저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이번편에서 선호작이 우수수 떨어질게 눈에 보입니다. 다음 글부터는 정상적인 사람을 주인공으로 선택해야겠습니다.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