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안마성
천살은 매우 당황했지만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선우검파가 자신을 지목한 것까지는 예상했다. 하지만 선우검파가 무공이 아닌 기세싸움으로 비무를 시작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묵직한 살기가 천살을 덮쳐왔다. 수준낮은 자들의 살기는 날카롭게 느껴진다. 대신 가벼운 살기라서 무시하거나 피하거나 흩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선우검파의 살기는 묵직하여 실체가 있는 것처럼 천살을 눌러왔다.
살기와 같은 기세를 다루는 것은 무공과 큰 연관이 없다. 기세를 다루는 것은 의지이고 의지는 그 사람의 정신수양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천살의 무공수위를 짐작하지 못하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선우검파는 천살의 무위가 별로 볼게 없다고 여겼다.
장우민은 천살이 기본기만 사용하기에 무위를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장우민이 찌르기만 수련하는 것은 자신의 초식수련을 보여주기 싫어서이고 비무에서도 찌르기만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무공수위를 숨기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선우검파정도의 고수가 되면 기본기를 보고 무위를 유추한다. 단순히 기본기만 수련해서는 기본기가 발전하지 않는다. 초식이라는 것은 검증을 거친 싸움방식이다. 초식의 모든 자세와 움직임은 의미가 있기에 초식을 수련해야 기본기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고 기본기가 정교해진다.
천살은 제대로 된 초식을 익힌적이 없고 무공검법에 기초하여 응익검을 깨달았다. 하지만 응익검은 수많은 사람이 익히고 오랜 시간 다듬어 완성된 검법이 아니다. 천살이 실전을 거치며 응익검을 계속 변화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고수와의 대결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에 고수들의 눈에는 부족한 초식이다.
그렇기에 천살의 기본기는 무공검법을 보고 익히고 만상무결을 통해 검증한 기본기이다. 무공검법이 내공을 배제한 검법이기에 모든 기본기와 초식은 내공을 익힌 무인이 사용하기에 부족한 점이 있다. 그것을 만상무결을 통해 조금씩 수정해가고 있지만 고수와의 대련과 실전의 경험이 부족해 과정이 매우 느리다.
그래서 선우검파는 천살의 무위가 장우민보다 아래라고 느꼈다. 제대로 된 발경법을 배워 일정 수준이하의 무인들에게는 절대적으로 강하지만 일가를 이룰 정도의 고수앞에서는 햇병아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물론 무위가 높다고 대련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은 아니다. 무공마다 상성이 있고 무공을 익힌 사람에게 어떤 약점이 있을수도 있다. 천살과 장우민이 실제로 싸우면 누가 이길지 선우검파도 확신은 없다. 다만 둘다 가볍게 이길 자신이 있는 것뿐이다.
그래서 선우검파는 천살의 정신수양이 어느정도 되었는지 알아보려 했다. 사람의 의지력이나 집중력 등 여러가지는 손아귀힘과 비슷하게 타고난 부분이 많이 차지한다. 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이 무조건 의지력이 강한건 아니다. 의지력이 강한 사람이 고난을 많이 겪어야 비로소 그 의지력이 드러나는 것뿐이다.
천살은 검에 기세를 싣는 방법을 안다. 하지만 선우검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상대에게 기세를 쏘아내는 재주는 없다. 비무를 통해 몸이 어느정도 풀리고 집중력이 어느정도 가다듬어진 후라면 어찌어찌 대처했을 수 있겠으나 지금은 선우검파의 살기를 피하지도 흩어내지도 못하고 묵묵히 견디고 있는 중이다.
강한 살기는 천살의 육체에 곧 죽을것이라는 조작된 정보를 전달했다. 머리로는 그저 살기일 뿐이라는 것을 알지만 몸은 다르게 반응했다. 죽음의 위기인듯 하자 불사공이 눈을 비비며 깨어났다.
피의 흐름이 빨라지고 전신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몸의 반응능력이 최고조로 올라가고 모든 육체적인 능력이 균형을 이루었다. 천살은 자세를 조금 바꿔서 일정 영역을 자신의 통제아래 넣었다.
선우검파는 천살의 몸이 작고 부드러운 움직임을 통해 자세를 바꾸는 것을 보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경지에 이른 고수들만 일정 권역을 자신의 통제하에 넣는것이 가능하다. 통제하의 권역에 준비없이 들어가면 잘 준비된 함정에 발을 딛는것과 마찬가지다. 천살이 보여주는 들쭉날쭉한 무위에 선우검파는 기존의 판단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자 선우검파는 집중력을 높이고 천살에게 향하는 살기의 밀도를 높였다. 더욱 농밀한 살기가 천살을 향해 덮쳐갔다. 때마침 불사공이 마련한 무대가 마음에 든 천살마기가 고개를 들었다.
천살마기가 침습하자 천살은 의념을 단전과 여러 혈도에 집중시켰다. 예전에는 담중혈만 지키는 것이 가능했지만 그간 작지 않은 발전을 이루어 하단전과 중단전 그리고 그 주위의 혈도들까지 지켜내려 했다.
천살마기는 남궁천과의 대결후 물러날 때 중단전인 담중혈에 조금의 천살마기를 심어놓았다. 그리고 지난번 흡기공으로 내공수련을 할 때 천살의 의념이 떠나자마자 하단전에도 약간의 천살마기를 침투시켰다. 천살이 의념을 집중해서 지키고 있지만 두 단전안의 천살마기까지 깨우면 천살을 장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난번에 남궁천이라는 자의 무위를 확인했고 지금 지켜보고 있는 교주의 무위는 남궁천보다 훨씬 강했다. 남궁천따위가 다섯정도는 와야 겨우 교주와 대등하게 싸움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천살마기는 천살을 장악하려 들지 않았다.
천살마기가 온몸의 수많은 혈도들을 장악해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혈도에서 혈도로 기운을 움직이는 것으로 천살마기는 천살의 육체를 장악했다. 천살로서는 천살마기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처음 알아낸 것이다.
천살마기는 천천히 혈도들의 기운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러갈래의 기운이 복잡한 혈도들을 거쳐서 마지막으로 인중에 모이자 천살의 몸에서 거센 살기가 쏘아져나갔다. 천살은 천살마기의 운기경로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일곱갈래의 기운들이 어떤 경로로 움직였고 어떤 속도로 운기되었는지 복기했다.
선우검파의 살기는 묵직한 바위같이 천살을 눌렀다. 천살의 살기는 거센 물살과 같이 선우검파의 바위를 흔들고 부수려 했다. 동시에 바위가 뿌리박은 토양이라 할 수 있는 선우검파에게도 거세게 몰아쳐갔다.
'눈동자가 검은색이군.'
교주와 선우검파는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갑자기 변한 천살의 무위에 천살마성의 기운이 발작했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천살의 눈동자는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천살의 내공이 강해지며 육체의 완성도가 높아졌고 불사공이 육체를 가능한 한계까지 끌어올렸기에 천살마기가 예전처럼 천살의 모든것을 장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선우검파는 검을 들어 천살을 향해 찔러왔다. 기세싸움을 걸어오다가 갑자기 검을 찔러오자 예상하지 못했는지 천살은 허둥거리다 겨우 피해냈다. 사실은 천살마기가 움직여줄려니 하고 기다리다가 움직임이 없자 천살이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이다.
기세싸움을 하며 집중력이 끝모르게 치솟아 올랐고 육체도 불사공 덕분에 충분히 뜨거워졌다. 천살의 정교하기 이를데 없는 기본기에 선우검파는 또 한번의 혼란을 느꼈다. 지금 기본기대로라면 천살의 무위는 선우검파와 비슷해야 한다. 비슷하다고 한 것은 선우검파가 반양검이라는 절대라 칭할 수 있는 검법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초식대결에 신경을 쓰다보니 둘의 살기는 서서히 약해졌다. 선우검파의 살기가 약해지면 천살이 거기에 맞춰 기세를 죽이는 것뿐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검을 맞대는 비무에 신경 쓰느라 살기가 천천히 풀리는 모습이었다.
선우검파는 반양검의 초식을 잘게잘게 토막내어 일부만 가져다 사용했다. 천살은 거기에 맞춰 기본기로 대응해 나갔다. 하지만 기본기의 연결이 기가 막혀 가끔 초식을 사용한게 아닌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격렬한 비무에도 천살의 호흡이 고른것을 확인한 선우검파는 더이상 비무를 끌어도 소용이 없겠다 여겨 처음으로 반양검의 초식을 사용했다.
후예사일(後羿射日)이라는 초식은 언뜻 이름만 들으면 찌르기 초식일 것 같았다. 하지만 활을 아홉번 쏴서 아홉개의 태양을 떨군 예와는 달리 후예사일은 베기 초식이다. 한번의 베기로 아홉번의 찌르기로 노릴 수 있는 아홉개 사혈을 동시에 노려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절초이다.
천살은 겨우 여섯개의 사혈만 막아냈다. 남은 세개는 뒷짐을 지고 있던 교주가 대신 막아줬다. 천살은 선우검파의 검이 여섯개의 사혈만 노린다고 생각했는데 세개의 공격이 더 숨겨져있자 패배감이 차올랐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기권하겠습니다."
선우검파는 교주에게 잠시 휴식을 취할것을 요청했다. 기세로 대결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천살과 교주가 자신의 공격을 막는 수법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희미한 깨달음이라 지금 바로 갈무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천살도 휴식하는 동안 선우검파의 마지막 초식을 회상했다. 무공검법의 검의와 검리 그리고 만상무결의 무리를 통해 초식을 유추하려고 애썼다. 많은 고민을 거친 후 천살이 내린 결론은 선우검파의 초식은 동시에 아홉개의 공격을 포함하는데 자신이 부족해서 여섯개만 간파한 것이라 생각했다.
천살의 생각은 진실에 거의 가깝다. 선우검파의 후예사일은 아홉개의 사혈을 노린다. 상대하는 자는 무위나 성격, 성별, 키, 몸무게 등 여러가지 요소로 인해 아홉개중 일부를 인식하고 수비해 나간다. 후예사일을 사용하는 자는 그러한 것들을 간파해서 상대가 알아낼만한 목표는 허초로, 상대가 인지하지 못할 목표는 실초로 바꿔 시전해야 하는 것이다.
아홉개 전부 실초로 사용해도 강한 초식이지만 시전자가 허실을 제대로 섞으면 거의 무적이라 칭할 수 있는 초식이 바로 후예사일이다. 똑같은 자에게 백번 사용해도 초식의 요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후예사일이다.
휴식이 끝나자 선우검파와 사진군의 비무가 시작되었다. 선우검파는 자신이 깨달음을 갈무리하자마자 비무의 시작을 선포하는 교주에게 경외를 느꼈다. 천살은 선우검파가 가볍게 이겨내리라 예상했는데 비무의 진행은 천살의 예상과 완전히 달랐다.
사진군의 별호는 청풍선(淸風扇)이다. 가전무공인 구유음풍선(九幽陰風扇)을 익혔고 용의 뼈로 만들었다는 용골선(龍骨扇)을 무기로 사용한다. 소음공을 익히고 구유음풍선의 무공을 익힌 사진군은 반양검을 익히고 소양공의 내공을 익힌 선우검파와 서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선우검파의 반양검은 환공(幻功)의 일종인 구유음풍선의 앞에서 강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소양공의 내공으로 사진군을 공격해도 소음공의 내공에 의해 해소되었다. 반면 사진군은 무공초식의 위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선우검파에게 공격을 전혀 적중시키지 못했다.
강사성과 화운의 대결을 보는듯 하지만 둘의 무공수위와 둘이 사용하는 무공의 완성도가 달랐다. 사진군도 자질은 나쁘지 않지만 교주로부터 소음공을 배운 후로부터 초식수련을 게을리 하고 소음공의 음한내력에 적응하는데 신경을 쓰다보니 초식이 엉성했고 무위도 평범함에 속했다. 그저 무공의 상성으로 인해 선우검파와 비슷한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결국 사진군이 패배를 인정하고 실전비무가 끝났다. 교주는 제자들에게 자유수련을 명했다. 이대로 시간을 보내다가 교주가 원하는 때에 합동수련이 끝난다. 천살은 밤이 되자 교주의 모옥으로 찾아갔다.
- 작가의말
제 글을 읽는 분들중에 미성년자가 계신가요? 야밤에 교주를 찾아가서 육체거래를 제안하는 천살로 인해 다음 글은 19금 설정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자공을 버리고 천마신공을 교주로부터 배우는 천살을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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