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성한
"나는 화산의 속가제자인 유백이라 하오. 여기는 화산파의 장문대제자이신 조자운이고 여기는 화산장문의 영애이자 삼제자이신 호매령이오. 그리고 여기 둘은 나의 형제로 유중과 유숙이라 하며 역시 화산의 속가제자요."
천사성은 인사를 들으며 한명한명에게 포권으로 인사를 올렸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건만 잡서들을 읽으며 이런것을 익힌 것이다. 자신이 논어따위만 읽었으면 손님을 어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을 것이니 잡서가 훨씬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책들은 천공자가 공부하는 책인가요?"
호매령의 달달한 목소리에 천사성은 흠칫했다. 하지만 처음 무방비로 보았을때와는 달리 어느정도 심리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정신이 호매령에게 팔려 조자운이 자신을 향해 이를 가는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미 다 공부가 끝난 책들입니다. 저에게는 필요 없는 책들이니 가져가셔도 무방합니다."
천사성은 이들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오고 첫 질문이 책에 관한 것이자 공부할 책이 필요해서 찾아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천사성의 대답에 호매령은 감탄의 기색이 어렸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데 이미 저 수북한 책들의 공부가 끝났다고 하니 대단하다고 느껴진 것이다.
반면 조자운은 천사성이 자신들을 책을 구걸하러 온 거지취급을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호매령이 있는 자리에서 화를 내면 속좁아 보일까 억지로 참았다. 유백은 열여섯살의 나이에 여섯살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이미 십년간 글을 읽었다. 조자운의 안색이 나쁜것을 눈치챈 유백은 천사성에게 무안을 주어 조자운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천공자가 이미 백권이 넘는 책들을 독파했다니 이 유백은 감탄을 금할 수 없소. 공자께서 백행효위선(百行孝爲先 - 모든 일에 효가 첫번째다) 이라고 했는데 천공자는 어찌 생각하시오?"
"저의 우견(愚見 - 어리석은 견해)을 말씀드리자면 효는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공자께서 인의예지신과 충효를 강조한 것은 사람들이 인간의 도리를 지켜야 이 사회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자께서는 '대신들이 충성하지 않으니 충성이 미덕이 되었고 자식들이 효도하지 않으니 효자가 본보기가 되었으며 여자들이 정조를 지키지 않으니 열녀에게 비석을 세워주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저로서는 당연한 일을 꼭 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성현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어지러우면 이런 당연한 것들을 지키라고 구구절절 강조하셨겠습니까? 누구나 충을 당연히 여기고 효를 행하며 서로 양보하고 서로 예의를 지키는 세상이 되면 논어는 전부 불태워도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유백은 천사성의 말에 답이 궁해졌다. 어차피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이다. 천사성의 대답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으면 물고 늘어지려 했는데 허점은 커녕 유백은 생각도 못해본 문제였다. 어린 나이인데도 생각의 수준이 자신과 다르자 유백은 조용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천공자의 생각은 또래답지 않게 깊군요. 제가 글공부를 하다가 막히는 부분이 몇개 있는데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더군요. 천공자께서 가르침을 주셨으면 합니다."
호매령이 살갑게 말해오자 천사성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사람마다 입장과 환경의 차이로 의견이 다를 수 있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자신의 생각을 넓히는데 좋으니 제 부족한 의견이라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천사성 본인의 생각이 아니고 잡서들에서 본 내용들이다. 논어나 맹자와 같은 딱딱한 책들과는 달리 잡서에는 기상천외한 견해들이 많아 천사성의 생각을 넓혀주었다. 효에 대한 이야기나 방금 호매령에게 한 말도 사실은 잡서의 말을 좀더 멋있게 꾸민것 뿐이다.
그뒤로 주로 호매령이 질문하고 천사성이 대답했다. 조자운은 천사성과 호매령이 환담을 나누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날이 어두워지는 것을 핑계로 작별을 고했다.
"가끔 시간이 나면 가르침을 받으러 찾을게요. 부디 귀찮다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부족한 식견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호소저와의 대담에서 저도 많은 것을 깨우쳤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시간 되기 바랍니다."
조자운은 끝까지 혀에 기름을 바른 천사성이 더 미워졌다. 호매령을 노리는 천사성의 검은 심보가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길에서도 호매령이 온통 천사성의 이야기뿐이자 조자운의 기분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호매령이 처소로 돌아가자 조자운은 유씨 형제들과 함께 연무장에 있는 식당(食堂)에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유씨 형제들이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조자운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며칠동안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던 조자운은 호매령의 시녀인 연화를 불러냈다. 연화는 조자운과 마찬가지로 호군천이 거둬들인 고아인데 조자운과는 달리 무공에 재능이 부족했다. 호군천이 연화를 서안의 무관에 입양보내려고 했는데 연화가 거절하고 호매령의 시녀를 자처했다.
"연화야, 요새 매령이 이상한 점 없더냐?"
"요즘 매일 천사성인가 하는 아이의 얘기를 입에 달고 있어요. 어떤 아이인지 저도 궁금할 지경이예요."
연화는 호군천이나 호매령의 소식을 정기적으로 조자운에게 전해주었다. 덕분에 조자운은 다른 제자들이 모르는 많은 화산파의 내막들을 알 수 있었다. 호매령이 천사성에게 푹 빠졌다는 생각이 조자운의 조급증을 불러일으켰다.
조자운이 작별인사를 건네고 다급하게 떠나자 연화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호군천이 자신을 입양보내려 하기전까지 연화는 자신이 호군천의 친딸인줄 알았다. 하지만 자신을 평범한 무관의 속가제자에게 입양보내려는 것을 알고는 충격에 빠져 조자운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연화와는 달리 일찍 철이 든 조자운은 자신과 연화는 입양된 고아일 뿐이라고 연화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어릴적부터 조자운에게 마음이 있었던 연화는 호매령의 시녀로 남겠다고 주장하며 화산에 남았다. 몇년의 시간동안 연화는 조자운에게 중요한 정보들을 알려주며 환심을 사려 했지만 조자운의 모든 마음은 호매령에게 가 있었다.
항상 든든하던 호군천은 자신의 친부가 아니었고 짝사랑하던 조자운의 마음은 호매령에게 가 있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 대한 원망을 쏟을데 없었던 연화는 호매령이 한번 언급한 천사성을 들먹이며 조자운의 애를 태웠다. 작게나마 복수를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연화는 콧노래를 부르며 처소로 돌아갔다.
유씨 삼형제는 갑자기 굳은 얼굴로 불러낸 조자운을 바라보며 바짝 긴장해 있었다. 셋은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군가 실수한 사람이 없는지 무언의 탐문을 시작했다. 하지만 셋의 생각이 길어질 겨를이 없이 조자운이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은 화산파의 존망과 연관되어 있어서 아무에게나 발설하면 안되는 것이다. 내가 너희 셋을 수족같이 믿기에 해주는 말이니 너희는 친부모에게도 누설하면 안된다."
셋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중대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유가장이 조자운이라는 튼튼하고 싱싱한 동앗줄을 꽉 잡았다는 뜻이다. 돌아가면 부친한테 당당하게 화산과의 친분을 제대로 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며칠전 효자봉에서 보았던 천사성은 사실 화산의 제자가 될수 없는 자이다. 그자는 겉보기에 평범해 보여도 사실은 천살성의 기운을 품은 흉신악살이다."
유씨 삼형제는 조자운의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조자운이 아는 일을 장문이나 서장로가 모를리 없다. 굳이 조자운이 셋에게 비밀이랍시고 얘기해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사부님이나 태상장로님은 그자에게 속고 있다. 두분 다 마음이 여리셔서 그자의 겉모습만 보고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계획이 하나 있는데 너희가 따라줘야겠다."
조자운은 세 형제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시키면 최소한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너희 셋은 내일부터 그자를 찾아가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으켜라. 그자는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고 글공부만 했으니 너희 셋의 적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너희의 목표는 그자의 흉성을 불러일으켜서 사부님과 태상장로에게 그자가 위험한 자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다. 만약 이 임무를 훌륭히 완성한다면 너희 셋은 나뿐이 아니라 화산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한 것이다."
유백은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우선 시원하게 대답했다.
"대사형이 가리키는 방향이라면 불바다라도 뛰어가야지요. 내일부터 우리 삼형제가 화산과 대사형을 위해 악당이 본모습을 드러내게 하겠습니다."
유백의 통쾌한 대답에 조자운은 마음이 흡족해졌다. 연화에게 사년전에 서장로가 천살성을 데려왔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그 정보를 이렇게 써먹을 줄은 몰랐다.
"최근 내가 무공에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일이 잘 풀리면 너희한테도 전수해 줄 테니 부디 이번일에 최선을 다하거라."
장문인의 제자이자 화산의 대사형인 조자운은 속가제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공을 배운다. 일초반식이라도 배워두면 구명절초로 써먹을 때가 있을 것이다. 유씨 삼형제는 조자운이 던진 미끼를 덥썩 물었다.
이튿날 유씨 삼형제는 오전에 하는 공동수련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후 곧바로 효자봉으로 향했다. 천사성을 만난 유백은 다짜고짜로 대련을 요구했다.
"천공자도 장로님의 밑에서 사년이란 시간을 있었으니 적지 않은 배움이 있었을 것이오. 우리 속가제자들은 화산의 진체를 좀처럼 접할 수 없는데 비무를 통해 서로 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 작가의말
嫉妬成恨, 질투가 원한이 되다. 이번편 두명의 인물에 해당됩니다. 이런걸 일석이조의 소제목이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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