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산화령
"화산의 서창훈일세. 처자는 누구신가?"
"옥골선풍 서장로님이셨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천산파의 대제자 화령(火靈)이라고 합니다. 백미상인(白眉上人)에게 사사하고 있습니다."
천산파의 장문 백미상인은 천축인이다. 어릴때부터 눈썹이 하얗고 머리는 붉은색이었다. 젊을 때 중원으로 한번 발길을 한적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차별을 느끼고 그뒤로 다시는 중원으로 향하지 않았다. 천산파의 대제자를 자처하는 화령의 나이가 어려보이는 것을 보니 그간 제자를 받지 않았던 모양이다.
"천산의 제자가 여기는 어인 일이신가?"
"이번 명화교와 관군의 충돌때문에 향후 정세가 어찌될지 살피러 왔습니다. 무당의 초청도 있어서 겸사겸사 발걸음을 했지요."
명화교는 마교의 정식명칭이다. 중원에는 명교로 많이 알려졌지만 정식명칭은 명화교였고 명화교도들은 명화신교라고 부른다. 명교의 세력권에 포함된 천산파이기 때문에 명화교라 부르는 것이다.
"무당의 초청을 받았으면 무당으로 향할 일이지 화산에는 무슨 볼일이신가?"
이번 개봉에서 무림맹의 결성을 발의하고 결정지을 것이다. 마교의 준동과 북원의 움직임으로 인해 무당의 참여가 없더라도 무림맹을 결성할 예정이다. 장삼풍의 삼년상도 끝난 지금 무당도 더이상 무림맹의 결성을 미룰 핑계가 없다. 그래서 황급히 사이가 좋은 문파들을 불러들여 세력을 과시하려 하고 있다.
"천산파가 변방의 소문파라지만 친구가 없는것은 아닙니다. 소림과 무당의 대결을 예상하고 출발했는데 실상은 삼족정립(三足鼎立)이더군요.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볼까 생각중입니다. 중원으로 출발할 때 사부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거든요."
"아직 식사전이라면 자리에 앉으시게."
서장로는 그제야 화령의 합석을 허락했다. 화령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천사성의 곁에 앉았다. 네모난 식탁이라 다른 자리에 앉을수도 있건만 서장로와 마주앉은 천사성의 옆에 자리한 것이다. 두명의 장한은 자리에 앉지 않고 화령의 뒤에 시립했다.
변방의 문파들은 중원의 문파들과 그 풍습이나 전통이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서장로는 두 사내가 시립해 있는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천사성은 옆에 앉은 화령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와 등뒤의 두 사내가 신경이 쓰였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다.
"천산과 소림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친구로 사귀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간 무당과 교류를 해왔는데 생각해보니 화산과의 거리가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화산의 풍광을 눈에 담았으면 합니다."
"친구를 사귀려면 서로 나이나 취미나 여러가지가 비슷해야 하네. 그래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천산과 화산은 취미가 너무 남다른 것 같소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천산은 친구가 많습니다. 그중에 화산과 비슷한 취미를 가진 친구가 있지 않을까요?"
천사성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탄복했다. 서장로와 화령은 서로 상대가 먼저 자신의 패를 뒤집기를 기다리고 있다. 먼저 패를 보이는 쪽이 협상에서 불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사성의 예상으로는 서장로가 이길 것 같았다.
천산은 무당의 요청으로 중원에 와서 겨우 돌아가는 판국의 윤곽을 조금 파악했지만 화산은 몇년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연화의 수다 덕분에 천사성은 화산과 한편인 문파들이 누구누구인지 대충 짐작을 하고 있었다.
"개봉에 도착하면 천산의 친구 몇몇을 소개해 드리지요. 서장로님에게도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장담드립니다."
"기대하겠소."
곧 식사가 나오자 서장로와 천사성은 식사를 시작했다. 화령은 인내를 가지고 둘이 식사를 끝낼때까지 기다렸다. 식사를 마친 서장로는 화령에게 작별을 고하고 객방으로 향했다.
"개봉에서 친구가 되었으면 하오. 이만 실례하겠소."
서장로의 말투가 살짝 변했다. 하지만 화령은 서장로의 작은 변화에 기뻐하기 보다는 천사성에게 관심이 생겼다. 화령이 등장했을 때 잠깐 눈길을 주고난 후 천사성은 화령을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항상 뭇남성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아야 했던 화령으로서는 천사성의 반응이 신선하기만 했다.
'하오문에 서장로가 데리고 다니는 아이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거라.'
화령이 식사를 마치고 객방으로 올라간 뒤에야 두 사내는 좌석에 앉아 식사를 했다. 식사하는 내내 서로 대화 한마디도 없이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한명은 화령의 객방과 붙어있는 옆방으로 휴식하러 들어가고 남은 한명은 화령의 객방앞을 지키고 섰다.
이튿날 배에서 다시 만난 서장로와 화령은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서로 더이상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천산파 자체로는 화산과 협상할 밑천이 없다. 개봉에 가서 다른 밑천을 보여준 후에야 천산은 협상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화령은 천사성이 여전히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자 자존심이 상했다. 점심무렵에 배가 작은 나룻터에 잠깐 멈추었을 때 화령의 수하가 배에서 내려 음식을 사왔다. 화령은 수하가 건네는 종이를 들고 갑판의 한켠으로 움직였다.
종이에 적힌 정보는 화령의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름 천사성, 나이 불명, 십삼세에서 십오세 사이로 추정, 화산의 서장로가 강호행후에 데리고 온 아이, 정식으로 화산에 입문하지 않았음. 화산에서는 서장로가 제자로 들일 것이라는 소문이 있음.'
'특이사항으로 서장로가 천검산장을 방문할 때 동행.'
화령은 자신이 알고 있던 서장로의 정보를 되새겼다. 서장로는 평생 제자를 받지 않았고 강호에 나설때 항상 홀로였다. 하지만 이번 개봉으로 향하는 중요한 여정에 천사성만 대동한 것으로 보아서는 천사성을 제자로 들이거나 제자로 들이지 않더라도 직접 가르칠 것으로 추정되었다.
'서장로의 총애를 받는 화산의 제자라. 친해두면 도움이 많이 되겠구나.'
이튿날부터 화령은 더욱 화려한 옷과 장식품으로 치장하여 천사성의 눈길을 끌려 했다. 하지만 천사성은 화령에게 눈길 한번도 주지 않고 계속 사색에 잠겨 있었다. 상상으로 무공검법을 익히며 검리와 검의를 곱씹느라 다른데 신경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드디어 개봉에 도착하자 화령과 서장로는 서로에게 간단히 작별인사만 하고 헤어졌다. 화산은 소림에서 처소를 안배하지만 천산파는 무당에서 처소를 안배한다. 소림은 화산을 소림의 속가제자가 장주로 있는 풍운장(風雲庄)에 안배했다.
풍운장에는 화산과 소림에서 온 손님 외에도 여러 문파에서 온 손님들이 많았다. 나름 소림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문파들이 풍운장에 모여있는 것이다. 화산과 무당의 사이가 항상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소림은 화산을 자신들 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서장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사이 천사성은 홀로 방에서 무공검법을 고민했다. 상상속의 움직임을 몸으로 직접 구현하며 그 효과를 알아보고 싶으나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을 서장로에게 들키면 안된다. 자신에 대한 서장로와 호군천의 평가에 많은 오해가 있음을 천사성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화산의 서장로님과 함께 오신 분이 맞으신지요?"
하인의 물음에 천사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장로님을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서장로님은 중요한 회담중이시니 소협께서 대신 손님을 맞이하심이 어떠신가요?"
"알겠소."
천사성은 첫날 존칭을 하자 하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던 일이 생각났다. 하지만 천사성은 자신을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아 나이가 자신보다 많은 하인들에게 말을 낮추는 것이 불편했다. 그래서 최대한 말을 아꼈다.
하인을 따라 객청에 도착하니 풍채가 좋은 중년인 한명이 앉아있었다. 천사성은 다가가서 먼저 포권을 했다.
"서장로님을 모시고 온 천사성이라 합니다. 장로님이 중요한 일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 대신 나왔습니다."
"화산파의 속가제자인 차원태라고 하네. 장문인인 호군천과는 같은 항렬이지. 일전에 장로님이 천축어로 된 책을 구한다는 말을 듣고 성심껏 모아서 가져왔네."
차원태는 화산의 속가제자로 호군천이 장문인이 되기전에 화산에서 무공을 배웠다. 그때는 호군천의 사부가 장문인이어서 서장로를 장로님이라 불렀었다. 지금은 호군천이 장문인이 되어 호칭이 태상장로로 바뀌었지만 차원태는 화산에 오랫동안 발길을 하지 않아 계속 장로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장로님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꼭 잊지 않고 장로님께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후 차원태는 화산의 근황에 대해 물었다. 천사성은 화산의 근황을 잘 몰랐지만 연화 덕분에 주워들은게 꽤 되어 그럭저럭 대화를 이어나갔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나서 차원태는 천사성에게 작별을 고했다. 바래주러 정문까지 나온 천사성에게 돈주머니 하나를 찔러주면서 눈을 찡긋했다.
객청으로 돌아온 천사성은 한사코 도와주겠다는 하인을 물리치고 천축어로 된 책들을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무게도 무겁지만 한번에 옮기려니 책이 시야를 조금씩 가렸다. 행랑의 모서리에서 방향을 꺽은 후 미처 마주오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부딪혔다. 책이 앞으로 쏟아지면 상대의 몸위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에 천사성은 아예 뒤로 넘어졌다.
"네 이놈, 눈은 어디다 두고 다니는 것이냐!"
천사성이 몸을 일으키니 머리를 파랗게 민 젊은 중이 흰수염이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노승을 부축하며 천사성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천사성은 황급히 노승을 향해 사과의 뜻을 표했다.
"죄송합니다 노스님, 제가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노승은 천사성의 사과에 대답을 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살폈다.
"오오, 이건 천축어로 된 지장보살본원경이구만. 이 불경은 시주가 읽으려는 것이오?"
"네, 이미 지장보살본원경을 읽었지만 불경마다 조금씩 표현이 다르고 해석이 다르더군요. 그래서 천축어로 된 불경도 읽으려 하고 있습니다."
"시주는 어떤 지장보살본원경을 읽으셨소?"
천사성은 지장보살본원경의 역자(譯者)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장보살본원경을 노승에게 외워주었다. 잠시 듣고 있던 노승은 손뼉을 쳤다.
"이건 당조때 실조난타가 번안한 것이로구나."
노승은 불경을 줄줄 외우는 천사성에게 감탄했다. 하지만 천사성은 불경 조금만 듣고 역자까지 알아맞추는 노승이 더 대단했다.
"이건 내가 보던 대반야경이오. 시주와 이렇게 부딪힌 것도 인연이니 부디 받아주기 바라오."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는 천사성의 책더미위에 대반야경 한권이 더 얹혔다.
- 작가의말
저 대반야경을 거꾸로 읽으면 역근경이 되는 전개를 바라는 분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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