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현신공
아침이 밝자 고삼과 당무영은 나루터로 향했다. 고삼이 배에 오르자 배주인이 고삼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다.
"혼자 왔다고 해서 어제 선금을 돌려주지 않소. 관례이니 그렇게 아시오."
배주인이 명현공을 운용한 당무영을 발견하지 못하고 고삼에게 선금을 못 돌려준다고 못박았다. 배주인은 선금을 공짜로 벌었다고 속으로 좋아했지만 선금의 열배나 되는 당무영 몫의 금액을 손해보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고삼은 주의를 집중해서 주변을 느꼈다. 가까운 거리에서 무언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두눈을 똑바로 뜨고 그곳을 바라보았음에도 당무영이 그곳에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고삼의 귀로 전음이 들려왔다.
'그곳이 아니다. 나는 다른곳에 있다.'
고삼은 기지개를 켜는 척 하며 팔을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곳으로 뻗었다. 당무영이 확실히 그곳에 없음을 느낀 고삼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반면 당무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명현공을 사용하면 항상 어느정도 거리에 뭔가 부자연스러움이 생긴다. 이 부자연스러움이 규칙적으로 생기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명현공을 시전하는 사람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
배에서 내려 객잔에서 밥을 먹을때를 제외하면 당무영은 계속 명현공을 운용했다. 무창에 도착한 후 다시 배를 구해서 개봉으로 향했다. 개봉은 황화유역이고 고삼과 당무영은 장강을 타고 내려왔다. 무창에서 배를 갈아탄 후 장강 최대지류인 한수를 타고 북으로 향했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상류의 수위가 낮은 관계로 걸어서 황하의 지류인 위하에 도착했다. 위하를 통해 황하의 물길에 몸을 실은 둘은 개봉에서 배를 내렸다. 개봉성에 들어간 당무영은 벼랑을 타는데 필요한 도구를 제작하기 위해 만물상을 찾았다.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고 제작하는데 사흘의 시간이 걸렸다.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삭조와 밧줄을 통해 서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죽옷을 만들었다. 도구의 준비가 끝나자 남은 돈을 전부 소모해서 금창약과 내상약을 구매했다. 천살이 큰 부상을 입었을 가능성을 대비한 것이다.
준비한 물건들을 가지고 소림으로 향하던 도중 마주오는 나무꾼을 발견하고 당무영은 고삼에게 말했다.
"소림에 가기 전에 한번 제대로 되는지 시험을 해보자."
맞은편에서 나무를 두단 짊어진 나무꾼이 걸어오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 걸으면 나무꾼과 둘이 부딪히게 된다. 나무꾼은 짐이 없는 둘이 비켜주기를 바랐지만 둘이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하자 한숨을 푹 쉬며 옆으로 움직이려 했다.
그때 둘중에 반듯하게 생긴 남자가 갑자기 사라지자 나무꾼은 구레나룻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이 본게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구레나룻도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나무꾼은 나무짐을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에 찬 도끼를 뽑아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대낮에 귀신이 나올리 없으니 요괴라고 생각되었다. 자신이 벌목을 너무 많이 해서 나무요괴가 찾아온게 아닌지 겁이 더럭 났다.
멀리 걸어간 뒤 명현공을 거둔 당무영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도끼를 들고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나무꾼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명현공을 운용한 후 고삼의 팔을 잡자 고삼도 명현공의 효과를 받은 것이다. 둘만 있을때 연습을 했지만 실제로 사람이 보는 앞에서 펼친적은 처음이다. 효과가 확실히 입증되자 소림에 침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해졌다.
중간중간 경공을 펼쳤기에 저녁이 어두워지기전에 등봉현에 도착했다. 객잔에 들어가 저녁을 시켜 먹었다. 밤에 복마동으로 향할 예정이기에 방을 잡지는 않았다. 등봉현에서 소림의 무승으로 보이는 스님들이 많이 보이자 당무영은 점소이에게 질문했다.
"소이야, 저녁때가 되었는데 저 스님들은 왜 소림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냐?"
"객관은 어디 산속에서 지내다 오셨네요? 요즘 마인과 천마신공 때문에 천하가 떠들썩한데 말이에요."
당무영은 엽전 몇푼 쥐어주며 말했다.
"급히 길을 재촉하느라 소문에 무심했구나. 무슨 일인지 좀 상세히 말해보거라."
"천살이라는 자가 천마신공이라는 무공의 비급을 천하에 뿌렸다고 하네요. 그 비급을 익힌 자들이 마인이 되어 도처에서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네요. 그 마인들을 처단하고 비급을 회수하기 위해 소림의 스님들이 밖으로 나간다네요."
"혹시 또 조심해야 할 것이 없느냐? 보다시피 여기저기 다니는게 일이라서 말이다."
"마교의 사장로가 천살의 하수인이라 하네요. 마교는 청해호에 있다고 하니 그쪽으로 발길도 하지 말라네요."
점소이도 손님들 말을 귀동냥한 것이기에 구체적으로 무언가 상세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당무영은 명현공으로 무림맹에 잠입해서 정보를 더 얻어볼까 고민하다가 우선 천살을 구하기로 했다. 자신들이 하루라도 늦어서 천살이 죽거나 상처가 회복하기 힘들 지경까지 간다면 평생 미안함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밥을 배불리 먹은 둘은 지체하지 않고 움직였다. 천살이 죽으면 천하에 환란이 닥친다고 했으니 아직 살아있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목숨이 붙어있다고 해서 살아있는게 아니다. 강호에는 왜 죽을줄 알면서도 칼을 드는 자들이 그렇게 많겠는가. 바로 제대로 살기 위해서이다.
소림이 가까워지자 당무영은 명현공을 운용했다. 그리고 고삼의 팔을 잡고 움직였다. 고삼이 복마동의 위치를 잘 아는 까닭에 둘은 헤매지 않고 복마동으로 향했다. 복마동으로 향하는 도중 불경을 외우는 불승 두명을 만났다. 불경을 외우고 있던 젊은 불승은 갑자기 손에 든 불경을 집어던졌다.
"도훈 네 이놈, 왜 소중하게 다뤄야 할 불경을 집어던지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태스님. 갑자기 눈에 헛것이 보여서 그만 실수했습니다."
"혼란은 질서의 일부이고 질서는 혼란의 혼란이다. 너도 보고 나도 보았는데 왜 너만 그것을 그저 넘기지 못하는 것이냐? 아직도 마음공부가 많이 부족하구나."
달빛을 빌어 불경을 외우던 도훈은 뭔가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자 예전에 복마동앞에서 느꼈던 답답함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곳을 향해 불경을 집어던진 것이다. 무공을 한번도 익혀본적이 없는 명혜 스님도 그것을 느꼈다는 말에 도훈은 생각을 달리했다. 그때는 천하제일마두인 천살이 마공으로 침입한 것인데 만약 동일한 수법이라면 무공을 익히지 못한 명혜 스님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해야 맞는 것이다.
발각된 줄 알고 멈칫했던 고삼은 당무영이 팔을 잡아끌자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그때 수염이 허연 노스님의 말이 귓속에 박혔다.
'혼란은 질서의 일부이고 질서는 혼란의 혼란이라. 혼란한게 다시 혼란하면 질서가 된다는 말인가? 이미 혼란한데 어떻게 또 혼란할 수 있는거지?'
혼란의 본질은 무질서함이다. 그런 무질서함이 혼란의 질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무질서한 질서에 혼란이 생기면 혼란이 혼란이 아니게 된다. 혼란이 혼란하지 않으면 그것은 다른 의미의 질서이다. 노스님의 말의 혼란은 혼란이 아니고 질서는 질서가 아니다. 불교의 가르침을 받은적이 없는 고삼이기에 말 그대로 받아들이려니 머리가 아파왔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혼란도 질서다. 세상에는 혼란이라는 것이 없다. 질서를 모르기에 혼란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새롭게 얻은 심법도 무언가 질서가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해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당무영도 이번 일을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의심을 지우는 순간 확신이 된다. 부자연스러움을 발견하고 의심했지만 그 의심이 성립되지 않으니 누군가 숨어있는게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는구나. 굳이 부자연스러움을 없애려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넘치면 넘치는대로 모자라면 모자라는대로 그 쓸모가 있다.'
한마디 말로 세사람에게 각각 다른 깨달음을 선사한 명혜스님은 다시 눈을 감고 불경을 낭송했다. 부자연스러움을 하나만 느낀 도훈과는 달리 명혜스님은 부자연스러움을 세개나 느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하며 개의치 않았다.
복마동 안은 깜깜했지만 둘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명현공 덕분에 주변의 사물들이 더욱 잘 느껴진 것이다. 눈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곧 적응하여 복마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복마동 안에는 여기저기에 건드리면 소리를 내는 기관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천살이 수십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몰래 복마동에 침입했던 것을 생각해 굳이 보초를 세우지 않고 소리를 내는 기관을 잔뜩 만들었다. 매우 은밀하게 잘 만들었지만 명현공 덕분에 당무영과 고삼은 하나도 걸려들지 않았다.
복마전 입구에 도착한 둘은 당무영이 만든 가죽옷을 입은 후 밧줄로 서로를 연결했다. 둘중 한명이 실수를 하더라도 다른 한명이 버텨주면 추락을 모면할 수 있다. 손에 삭조(朔爪)를 낀 둘은 밑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당무영이 삭조를 돌틈에 박고 멈추자 고삼이 움직였다. 경사가 가파르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안쪽으로 파여들어갔다. 기어오르는 것도 힘들지만 내려가는것은 배로 힘들다. 고삼은 공력을 운용하여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밧줄이 팽팽해지자 바위틈을 찾아 삭조를 꽂아넣은 후 남은 손으로 밧줄을 두번 당겼다.
다시 당무영이 아래로 움직였고 고삼이 혹시모를 사고를 대비해 석벽에 바짝 달라붙었다. 당무영이 적당한 자리를 잡고 다시 밧줄을 두번 당기자 고삼은 삭조를 뽑아내고 다시 움직였다. 중간중간 휴식할만한 공간들이 나오는 바람에 둘은 조금씩이나마 긴장을 풀고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체감상 두시진 정도를 내려오니 밑에서 어렴풋한 빛이 보였다. 빛이 없는 곳에서만 자란다는 발광이끼이다. 이곳을 벗어나기전까지 자신들의 주식이 될 이끼라는 것을 모르는 둘은 그저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중간에 당무영이 두번, 고삼이 세번 미끄러진 적이 있었지만 삭조 덕분에 추락을 면했다. 사흘이라는 준비기간중 대부분을 이 삭조를 만드는데 투자했다. 다행히 삭조가 버텨줘서 둘은 추락하지 않고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거의 도착할 즈음이 되자 삭조가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다. 다행히 하단부분은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 않기에 삭조가 없이 악력으로 버티면서 내려왔다. 바닥에 도착한 둘은 큰소리로 외쳤다.
"천형, 이 당무영이 왔소. 내 말이 들리면 아무 소리라도 내시오."
"대형, 나 고삼입니다. 대형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잠을 자던 천살은 꿈결에 둘의 외침을 듣고 처음에는 자각몽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더 또렷하게 들리자 벌떡 일어나서 음혈을 잡았다. 음혈의 촉감이 손에 느껴지자 꿈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히 느껴졌다.
조심조심 걸어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혹시 누가 수작을 부리는게 아닌지 의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삼이 이성을 잃고 교주의 명에 따라 자신을 공격했던 일도 잊지 않고 있다. 교주가 판 함정일수도 있다는 생각에 천살은 천천히 걸어갔다.
당무영의 얼굴과 총기가 돌아온 고삼의 두눈을 확인한 천살은 그제야 기척을 냈다. 셋이 반갑게 상봉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초화규의 얼굴은 썩어들어갔다.
'젠장, 파놓은 동굴안에 들어가 꽁꽁 숨어있어야겠다. 나는 왜 구출하러 찾아오는 놈 하나 없는것이냐? 초씨 가문의 개자식들은 전부 뒈져버렸냐?'
- 작가의말
이제 넷이 되었으니 심심할 때 고스톱을 쳐도 되겠습니다. 무림고수들이 밑장빼기를 하면 장난이 아닐 듯 합니다. 초화규는 둘이 천살을 구출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생각하고 예전에 파놓은 동굴에 며칠 숨어있을 작정입니다. 해코지를 당할까봐요. 그런데 천살이 무공이 회복되지 않아 안 나간다고 하면 초화규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명혜스님 재등장 했습니다. 옛날에 풍운장에서 천살과 부딪힌 후 불경을 건넸던 스님입니다. 그 불경에 응담록이라고 지호스님이 남긴 글이 있었지요.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