괄목상대
호매령이 저녁준비로 분주할 때 천살은 고천양과 대화를 나누었다.
"너는 여기에서 효아에게 천양신공을 가르치면서 이들을 보호하도록 하거라. 나는 한선후를 유인하기 위해 소문을 퍼뜨리겠다."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하오문을 찾아가서 천하에 소문을 내게 할 생각이다. 초화규가 소림의 복마전에 갇혀 있다고 말이다. 그 소문을 들으면 한선후가 찾아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화규는 신화공을 훔쳐서 도망친 자이다. 한선후가 소문을 들으면 분명 신화공을 되찾으려 생각할 것이다. 천살은 꽁꽁 숨어있는 한선후를 신화공으로 낚아낼 생각이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대형이 다른 사람이 된것 같다.'
저녁에 천효가 잠든 후 천살은 불사공을 천효에게 넘겼다. 대성을 이룬 불사공이기에 천살의 마음에 동조하여 큰 저항없이 천효의 몸으로 건너갔다. 불사공이 무난하게 천효의 몸에 안착하자 천살은 조석성옥으로 천효에게 추궁과혈을 했다.
등허리가 땀에 흠뻑 젖은채 두손을 부지런히 놀리는 천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간 종적도 없이 사라졌던 천살에 대한 섭섭함이 다 사라졌다. 그날 남궁천 등과 싸우고 사라졌다는 소문밖에 접하지 못한 호매령은 자신때문에 동자공이 깨져서 천살이 해를 당한것 같아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찾아나서려 했다. 하지만 태기가 든 것을 발견하고 어쩔수 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천살과 재회하기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천살의 뒷모습은 땅에 쭈그리고 앉아서 흙장난을 하던 천효의 뒷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끝없이 치밀어오르는 행복감에 호매령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조석성옥이 끝나자 미리 준비한 따뜻한 물에 천효의 몸을 깨끗이 씻겼다. 천살은 한선후가 아직 제거되지 않았으니 천효의 존재가 들키면 안된다고 호매령에게 설명한 뒤 작별을 하고 떠났다. 고천양은 가까운 집을 웃돈을 얹어서 구매하여 이곳에 머무르며 이들 모자를 지키기로 했다.
천효는 자고 일어나니 부친이 떠났다는 말에 울적해졌지만 고천양이 무공을 가르쳐준다는 말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천양신공은 어린 천효가 익히기에 조금 무리이지만 무식한 고천양은 그런걸 잘 몰랐다. 고천양 자신도 여덟살때부터 횡련태보를 익혔기에 아프지도 않은 내공심법을 익히는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운기를 잘못해서 작은 문제가 생겼지만 그때마다 불사공이 빠르게 회복시켜 주었다. 대성에 이른 불사공이기에 가끔 잘못된 운기에 강제로 개입해서 운기경로를 바꿔주기도 했다. 불사공의 도움으로 천효는 천양신공을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하오문의 근황은 굉장히 좋지 않다. 우선 무영신투의 정보를 마교에 팔아먹은 죄로 수뇌부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무영신투는 하오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대부분 제자들이 하오문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래서 수뇌부를 잃고 하오문내부에도 서로 갈등이 생겨버렸다.
그때 상황을 수습하고 새로운 수뇌부가 다시 하오문을 이끌었다. 하지만 천마신공을 판 죄로 금의위에게 걸려 무림맹과 금의위에 의해 또 한번 뿌리가 흔들렸다. 수뇌부의 태반이 목숨을 잃었고 주요 골간들이 죽거나 혹은 크게 다쳐서 강제로 은퇴했다.
그래서 이번 수뇌부는 매우 젊은 자들로 구성되었고 여섯명이 번갈아 가면서 문주직을 맡기로 했다. 한명이라도 살아있으면 그자를 중심으로 새롭게 수뇌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두번이나 수뇌부를 재구성하면서 적지 않은 재화의 소재가 불분명해졌다.
"현문천, 반갑다. 네가 하오문주일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개방의 소방주였던 현문천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빠른 속도로 일어섰다. 개방은 현재 사분오열되었고 현문천 일파는 하오문에 소속되었다. 무력이 극도로 부족한 하오문이기에 현문천이 여섯 문주의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너는 누구냐?"
"이거 섭섭하구나. 나는 천살이다."
천살이라는 이름에 현문천은 더욱 크게 놀랐다. 차라리 예전에 딱 한번 본적이 있는 천살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자객이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천하에 위명이 자자한 대마두가 찾아오자 현문천은 더럭 겁을 집어먹었다.
예전에는 개방 소속이었고 현재는 하오문의 문주이다. 천살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무림맹이나 금의위에서는 모르는 사실도 알고 있다. 바로 무영신투를 통해 훔쳐낸 무형지독을 마교가 천살에게 사용했다는 사실도 현문천은 알고 있다.
현문천과 하오문 기타 문주들의 추측으로는 천살의 힘이 무림전체의 힘의 절반에 미친다. 최근 예전에 자신으로 인해 폐인이 된 무당의 장로들을 치료해준 미담이 들려왔지만 곧바로 종남의 봉문선언에 의해 묻혀버렸다. 혼자 힘으로도 무림을 쥐락펴락하는 천살이 황실과 결탁하거나 세력을 이루면 어떻게 될지 상상하기도 겁난다.
그렇잖아도 남궁가와 당문이 천살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있다. 아미와 청성 그리고 서문세가도 천살에게 우호적인 태도였고 무당도 딱히 천살과 적대하지 않는다. 천살이 마음을 먹는 순간 무림일통은 당연한 것이고 황실을 전복하고 새로운 왕조를 여는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것이 하오문의 판단이다.
그런 강한 힘을 가진자가 야밤에 찾아왔으니 분명 쉬운일을 시킬리가 없다. 현문천은 머리를 급하게 굴렸다.
'천하에 둘도 없는 무적의 병기를 원하는 것일까? 아니면 천하제일의 미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영초? 도대체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서로 안면도 있는 사이이니 편하게 말하마. 소문 하나 내줘야겠다. 명나라뿐 아니라 북원이나 서역까지 소문이 널리 퍼졌으면 한다."
현문천은 한시름 놓았다. 소문을 빠르게 널리 내는것은 돈이 조금 들기는 하지만 하오문이 가장 잘하는 일이다. 기루나 주점에서 소문을 슬쩍 내면 알아서 널리 퍼진다. 서역으로 가는 장사치들도 많이 알고있기에 그쪽에 부탁하면 문제 없을 것이고 북원과도 몰래 장사를 하는 자들이 있기에 그자들을 통해 소문을 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누구의 부탁이라고 거절하겠습니까. 분부만 내리십시오."
"초화규라는 자가 소림의 복마전에 갇혀 있다. 무림맹이 만들어지고 이년쯤인가 될때 장문산과 모용남매에 의해 포로되어 소림사에 갇혔지. 대충 이정도로 소문을 내주면 된다. 최대한 빠르게 말이다."
현문천은 눈앞에서 지워지듯이 사라진 천살의 모습에 놀라서 엉거주춤 다가가 손을 휘저었다. 눈속임이 아니라 천살이 실제로 사라진것을 확인한 현문천은 그자리에 주저앉았다.
"원래 우리 여섯이 번갈아가면서 문주직을 맡기로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무공도 출중하시고 개방이라는 거대방파의 소방주 경험이 있는 현문주가 혼자서 쭉 맡는게 좋을 것 같소."
"나도 찬성하오. 인품도 그렇고 우리 하오문에 과분한 분 아니시오. 괜히 우리가 문주랍시고 현문주께서 잘 만들어놓은 하오문을 어지럽히지 말고 이대로 믿고 맏기는게 사람의 도리인 것 같소."
현문천은 천살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 다른 문주들을 소집했다. 그런데 천살이라는 말에 겁먹은 다른 자들은 딴소리만 하고 있었다. 현문천이 하오문 문주직을 쭉 맡고 이번일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혹시라도 천마의 비위를 거스르면 현문천 혼자서 감당하기를 바라는 속셈이다.
"어허, 여러분, 천형은 소문처럼 흉악한 사람이 아니오. 예전에 거지인 나를 얼마나 상냥하게 대해줬다고 그러시오. 문주직은 원래대로 하고 이번일에 다들 최선을 해주시기 바라오."
현문천이 극구 거절했지만 결국 현문천이 정식으로 하오문주가 되었고 남은 다섯은 부문주가 되었다. 몇년간 실행되던 공동문주제도가 천살의 등장으로 바뀌어버렸다.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천살과의 친분을 과시할 수 있다. 그러면 하오문 내부의 적들과 살수 따위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거대 문파와의 마찰도 걱정이 없다. 금의위도 이제는 나한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현문천은 이렇게 된바 천살의 부탁을 잘 처리하여 천살의 환심을 살 궁리를 했다. 천살과 친분이 있다고 하면 하오문 내부의 반란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살수들도 현문천을 건드릴 생각을 감히 못할 것이다. 거대문파와 금의위는 아직까지 현문천의 바람과 기대가 섞인 예상뿐이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가능성이 높다.
천살은 소림의 복마동을 찾아 복마전으로 향하는 입구에 기의 그물을 쳤다. 송운자 정도의 경지가 아니면 감지조차 못할 것이다. 이 기의 그물로 누군가가 통과하면 천살은 곧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한선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천살은 소림과 먼 곳에 정착한 듯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
'개봉은 너무 가깝고 한선후를 제거하기 전까지는 천효가 내 아들이라는 것이 소문나서는 안된다. 화산과 개봉을 제외하면 어디가 적당할까?'
다시 화음현으로 향하는 도중에 초화규가 소림의 복마전에 갇혀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하오문의 일솜씨가 괜찮은 듯 하니 이후에 많이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살은 어디에 정착할지 고민했다. 한선후가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소림으로 움직일 것이다. 이미 천살이 개봉에 자리잡았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신화공의 미끼에도 한선후가 쉽게 움직이지 않을것이 걱정된 것이다.
화음현에 가기 전에 서안에 들려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장난감들과 여러가지 먹을것을 구매했다. 크게 짐을 한보따리 들고 빠른 걸음으로 성문을 향해 걸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더 구매하기 위해서 경공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성문에 도착해서 경공을 시전하려고 하는데 털빛이 검은색으로 빛깔이 좋은 말 한필이 빠른 속도로 성문을 향해 달려왔다. 성문이 가까워지자 속도를 줄인 기수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번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이오. 다들 와서 구경을 하시오."
등의 죽통에서 여러장의 종이를 꺼낸 기수는 성문벽에 종이를 풀로 붙이기 시작했다. 슥슥 풀을 바르고 종이를 붙이는 모습이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등에 죽통이 두어개 더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더 뛰어야 할 듯 싶었다.
방의 첫머리에서 우겸의 이름을 본 천살은 대견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주관이 강해 성현들의 말씀이라도 이해 안된다 싶으면 이의를 제기하던 우겸이다. 그 강직한 성격 때문에 시험지에 바른말을 써서 낙방할까 걱정했는데 장원을 해버렸다.
화음현으로 가니 천효가 십여일만에 돌아온 아빠와 선물들을 반겼다. 저녁식사시간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천살은 우겸이 장원급제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동생이 진짜 장원급제를 했다는 말입니까? 제가 다 뿌듯하군요."
고천양의 말에 호매령이 천살에게 질문했다.
"부군께서 잘 아는 동생이 이번에 장원급제 했다는 말씀인가요? 우리 효아도 그런 훌륭한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스친 천살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경사로 가서 사는건 어떠시오? 우동생에게 내가 부탁해서 효아의 글선생이 되게 하겠소. 글재주뿐 아니라 인품도 아주 훌륭한 사람이오."
그 말에 고천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꼬박꼬박 고형이라 불러주는 아주 훌륭한 인품을 가진 선비이다.
경사라는 말에 천효도 장난감에서 눈을 떼고 호매령의 입만 주시했다. 며칠간의 경험으로 집안의 권력자가 누군지 감을 잡은 것이다. 경사는 없는게 없는 별천지라고 했다. 늘 당과로 위세를 떨던 대장아이도 경사에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효아를 위해서 우리 경사로 가요. 효아는 공부에 열중해 이후 꼭 장원급제 해서 엄마와 아빠를 기쁘게 해야 한다."
- 작가의말
벽휘동 : 폐하, 천마가 경사로 향한다 합니다.
황제 : 여긴 왜 온다는 것이냐.
벽휘동 : 자식 공부 때문이라 하옵니다.
황제 : 제길, 이 교육열. 과거시험을 취소할까보다.
벽휘동 : ...
황제 : 무슨 방법이 없느냐?
벽휘동 : 국가의 돈으로 천마 일가족을 조선에 여행을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강남이라는 곳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 확율이 이빠이 높습니다.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