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무림맹
칠변절독의 태극을 이겨내려면 태극의 심독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 음양과 오행의 일곱 기운에 동시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게 가능하려면 일심(一心)을 이룬 절정의 고수거나 분심술과 같은 특이한 심공을 익힌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도 사전에 태극이 정신을 홀리는 심독이고 육체가 일곱가지 독기운에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여태껏 칠변절독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독왕 이후로 없다고 해야 한다. 당가주가 칠변절독의 공격 순서를 아는 것도 독왕이 남긴 기록을 보아서 아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없기에 미리 언질을 줄 수도 없었다.
천살의 의도와 상관없이 움직일 수 있는 불사공이 아니었다면 천살도 육체가 파괴되어 다른 세상으로 향했을 것이다. 지금 태극의 심독에서 벗어난 상태지만 일곱가지 기운이 동시에 들끓으니 천살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음의 기운을 죽이자니 양의 기운이 너무 살아나고 오행 중 하나의 기운을 죽이면 상생의 원리에 따라 곧바로 기운이 보충된다.
천살은 유교 서적들과 불교 서적들만 주로 읽었고 도교 서적들은 점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뜬구름 잡는것 같은 책들만 읽었다.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제대로 된 책을 읽은적도 없기에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인 상생상극의 원리 정도밖에 안된다. 어쩔수 없이 강인한 육체와 불사공 그리고 완성된 단전의 내공으로 버텨볼 수밖에 없었다.
독이라는 것은 일종의 기운이다. 그 기운은 무한하지 않다. 음양과 오행의 기운들이 천살을 죽이려고 날뛰었지만 천살은 불사공으로 신체의 손상을 회복하면서 버텨냈다. 앞의 일곱 단계는 사실 기운을 이겨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이라면 지금은 무작정 버티기에 돌입한 것이다.
화산에서 극성에 들어선 횡련일기공의 경지가 더욱 깊어졌다. 경지의 발전은 없지만 더욱 원숙해 진 것이다. 횡련일기공 덕분에 더욱 강인해진 육체와 혈도, 어떤 손상이든 회복해내는 불사공, 하단전을 완성하고 만혈개문을 이루어 빠르게 회복되는 내공으로 천살은 칠변절독의 마지막 공격을 버티고 버티고 버텼다.
사람과의 싸움이라면 상대의 초식이나 암수를 막기 위해 정신을 분산하여 내공의 회복이 빠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의 공격이기에 정신을 분산할 필요가 없이 모든 정신을 내공을 회복하는데만 집중시키니 독의 기운이 다할 때까지 천살의 내공은 마르지 않았다.
개구리를 겨우 죽일 수 있는 독을 사람에게 주입하면 사람은 몸으로 버텨낸다. 천살도 마찬가지 도리로 칠변절독의 마지막 단계의 태극을 몸으로 버텨냈다. 한방울로 소 수백마리도 죽일 수 있는 독을 두잔이나 무식하게 몸으로 버텨낸 것이다.
칠변절독의 기운이 다하자 겨우 눈을 뜬 천살은 아쉬움에 사로 잡혔다.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단계의 태극을 풀어낼 수 있었다면 교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제멋대로 날뛰는 음양과 오행의 기운들을 직접 제압했더라면 무위가 급상승하여 무력으로 교주를 누르고 새로운 교주가 되었을 것이다.
큰 깨달음은 얻지 못했지만 육체에 많은 것들이 새겨졌다. 머리로는 모르지만 몸은 수많은 경험들을 기억하고 있기에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무위가 안정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몸은 거뜬하고 기분도 상쾌한데 천살의 머리에는 자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당가주와 당무영 그리고 못 보던 사람 몇이나 지켜보고 있는데 천살은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다시 깨어나보니 당무영은 당가의 직계로 편입되었다. 어차피 방계라는 것도 결국에는 같은 핏줄이다. 직계 방계를 나누는 것은 피의 진함이 아니라 힘과 권력의 강약이다. 천살이 칠변절독의 의식을 통과하는 순간 천살과 호형호제하는 당무영은 직계의 능력을 갖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인이 올린 죽을 열사발이나 들이켜고 나서야 천살은 배고픔에서 해방되었다. 옷을 갖춰입고 가주전으로 향하니 청성과 아미의 사람들이 이미 자리하고 천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천살은 외견상 칠변절독을 마시기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움직임 자체가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명화교의 소교주 천살입니다. 청성과 아미의 고인들을 뵙습니다."
청성에서 온 풍천도인과 아미에서 온 연무대사는 천살의 기도를 확인하고 속으로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스물정도의 나이라고 했는데 그 경지가 자신들보다 훨씬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칠변절독을 마시기 전에 보았다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약이나 특별한 심법으로 어린 나이에 내공성취가 높은 자들이 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변절독을 마신 후 몸의 움직임이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무공의 형이나 초식의 수련은 보통 나이에 정비례한다. 천재라고 해도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것이지 세월을 무시할 정도의 재능을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천살의 일거수일투족은 자연스럽기 그지 없어 둘을 놀라게 했다.
이는 칠변절독 덕분에 육체가 더 발전한 이유도 있지만 명현공의 경지가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직 머리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천살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어 평소 움직임에도 명현공의 묘리들이 섞여 있다. 명현공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움이 천살의 몸에 배어있어 실제 무위보다 더 높게 평가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에 당가주와 처음 만날 때는 송백자가 자리에 있었기에 천살은 다소 오만한 말투를 사용했다. 얕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협상해야 할 상대들만 남아있기에 무림의 선배들인 이들에게 존칭을 사용했다.
"명교에서 한씨가 아닌 자가 소교주가 되었다 하여 놀랐는데 과연 인중지룡이오. 일찍 만났으면 우리 청성의 큰 대들보가 되었을 텐데 많이 안타깝소."
아쉬움을 표현하는 풍천도인과는 달리 연무대사는 담담하게 인사를 했다.
"이렇게 만난것도 지난 삼생에서 어렵게 쌓은 인연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협상이나 이런걸 잘 모릅니다. 다만 서로에게 이득이 된다면 손잡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번 일은 제가 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협의한 내용이 최종 결과일 수 있습니다."
"명화교가 선황제에게 밉보여서 마교로 지목당하고 청해호에 갇혀 사는것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황제인 주체와 좋은 사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명화교는 더이상 무림공적이 아닙니다."
천살은 선우복명과 상의하여 정한 말들로 설득을 시작했다. 정보를 어디까지 풀어야 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너무 꽁꽁 감싸고 있으면 이빨이 얼마나 예리하고 발톱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몰라준다. 그렇다고 이빨이 몇개고 발톱이 몇개인지 낱낱이 보여주면 상대가 힘이 생겼을 때 칼자루를 거꾸로 쥘 수 있다.
"우리 명화교를 소림이나 무당과 대적할 수 있는 하나의 무림세력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저희의 제안은 매우 간단합니다. 당문과 청성 그리고 아미가 서무림맹을 창건하는 겁니다. 그리고 점창과 서문가와 같은 인근의 세력들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우리와 상호불가침의 협약을 맺는 것입니다."
천살은 보따리에 넣어둔 한철을 꺼냈다. 세개의 세력과 협상하기 위해 한철 세조각을 가져왔다. 그중 하나는 송백자를 압박하기 위해 당가주에게 선물로 내주었다. 남은 두 조각을 지금 꺼내놓은 것이다.
"오늘 협상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서무림맹에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검 몇자루의 분량은 됩니다."
연무대사는 불호를 나직히 외우기만 했지만 풍천도인은 직접 다가와서 한철을 손으로 만졌다. 청성이 추구하는 것은 무(無)이다. 무애(無碍 - 거리낌 없음)를 화두로 삼은 풍천도인이기에 굳이 마음속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자가 대표로 왔다는 것은 그 판단이 아주 정확하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명교가 우리한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오?"
당가주의 질문에 천살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과는 오래된 묵은 원한입니다. 무당 역시 협행이라는 명분하에 명화교의 수많은 무고한 교도들을 참살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니 선황제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자신과 자신들의 문파의 영달을 위해 무고한 피를 제물로 바친 자들이지요."
소림은 명화교와 직접적인 원한이 있지만 명화교가 도망칠 때 감숙으로 향하는 무인들을 뒤쫓았다. 반면 무당의 도사들과 속가제자들은 광서로 도망가는 일반 교도들을 쫓았다. 소림과는 서로 죽고 죽이는 깔끔한 원한관계라면 무당과는 명화교가 일방적으로 당한 경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희 명화교가 세력이 더 커질것을 대비해 미리 힘을 모으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세 문파에는 백익무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교주의 말씀은 잘 들었소. 명화교의 입장은 충분히 알겠으니 우리에게 상의할 시간을 좀 주시오."
천살은 셋에게 작별을 고한 뒤 당무영을 찾았다. 당무영에게 칠변절독의 공격방식과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알려주려는 것이다. 영문은 잘 모르지만 칠변절독을 이겨낸 뒤 명현공의 경지가 많이 높아졌다. 예전에 이해가 되지 않던 문구들도 이해가 되었고 잘못 알고 있던 문구의 뜻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당형, 공력이 심후해지면 언젠가 한번 도전해 보시오. 오행만 끝나면 바로 해독제를 마셔 목숨의 위험도 없고 명현공의 경지가 높아질 수 있소."
"천형의 은혜는 평생 못 갚을 것 같소. 하지만 내가 당문의 직계로 받아들여졌지만 칠변절독같은 귀중한 물건과 그 해독약을 나한테 주지는 않을 것이오."
당무영의 말에 천살은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가져온 한철의 열배이상 되는 한철이 매장된 곳을 알고 있으면서 왜 그리도 기죽어 있으시오."
천살의 말에 울컥한 당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살에게 허리를 숙였다.
"첫대면부터 목숨을 구원 받았는데 염치 없게도 항상 받아만 가오. 이 빚을 세상이 끝날 때까지 갚을 수 있을지 의문이오."
"당형은 마음속 깊이 담지 마시오."
한편 당가주와 풍천도인 그리고 연무대사는 천살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칠변절독을 이겨냈다고 했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여겼는데 직접 눈으로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자요. 향후 육십년은 명교천하일테니 그 뜻에 순순히 따라주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풍천도인의 말에 연무대사가 이마를 찌푸렸다.
"문제는 지금 온자가 소교주라는 것이오. 교주라는 작자가 엎어버리면 우리로서는 그저 손해만 보는 것이오."
당가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명교의 요구사항은 지금의 무림맹에 참여하지 말고 새로 무림맹을 만들어라요. 만약 우리가 무당을 설득해서 현 무림맹을 탈퇴하고 우리 서무림맹에 가입하게 한다면 협약을 어기지도 않았고 안전도 최대한 보장받는 길이라 생각하오."
당가주의 말에 풍천도인이 질문했다.
"송백 그자의 소문이 그리 좋지 않던데 당가주는 어떻게 보셨소?"
"무공만 그럭저럭 쓸만하고 인물은 아니오. 그릇이 작고 욕심이 많아 서무림맹에 가입하면 분란만 일으킬 것 같소. 하지만 무당정도가 있어야 명교가 경거망동을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풍천도인이 고개를 저었다.
"현 무림맹의 세력으로 명교와 정면대결을 한다면 명교에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오. 하지만 자기 문파나 세력의 이득만 챙기려고 눈이 벌개서 명교의 세력을 전혀 깎아내지 못했소. 나는 점창과 서문가까지 하면 명교가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오."
당가주는 안전하게 무당을 끌어들이자는 입장이고 풍천도인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들으며 사고하던 연무대사가 입을 열었다.
"우선 서무림맹을 만들고 명교와 불가침 협약을 맺읍시다. 그 후에 무당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 받아주고 아니면 마는 것이지요."
결론이 내려지자 셋은 성도에 세울 서무림맹 본부의 규모 및 자금을 얼마씩 부담할지 상의했다. 관리가 엉성한 청성이나 아미보다 당문이 낫다는 생각에 당가주가 서무림맹주가 되었다. 명교와의 불가침 협약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무림맹의 설립은 강호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을 모방하여 지역들마다 여러가지 연합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전작들과 달리 이번 주인공은 혜근(慧根)이 부족합니다. 진리가 담긴 말을 듣고 깊은 정신적 깨달음을 얻는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육체파라 정신적 깨달음 없이도 몸으로 때워 큰 성취를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도 무공이나 싸움에 대한 깨달음 위주입니다. 인생이나 이런쪽으로는 아주 젬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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