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파미전
이가장이 위치한 봉상부는 서안과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다. 이가장의 식솔들 대부분이 화산파의 속가제자이다. 이가장은 군대에 화살을 군납하는 군상(軍商)으로 그 위세가 작지 않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화산파의 도움이 있다.
사실상 화산파의 사업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가장이 화산파에 기대는 부분이 많다. 화산파가 이가장을 내세워서 군납사업을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감히 입을 열어 말하지 못했다. 화산파는 제자가 백명도 되지 않는 문파이지만 그 속가제자는 군과 관 그리고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수많은 서안지역의 권문세가들이 화산파를 통해 얼기설기 엮여지다 보니 화산파가 하나의 권력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화산파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검파와 권파의 피를 흘리는 싸움이 끝난 뒤 속가제자를 많이 받고 정식제자를 적게 받은것이 의외의 성과를 가져온 셈이다.
그런 이가장에 아침 일찍 도복차림을 한 도사들이 찾아왔다. 도호가 쌍말인 도사는 이가장의 가주에게 은근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이가주도 화산파의 유래는 잘 알것이오. 원래 화산파는 도문이었소. 그런데 지금 화산에서 검만 잡고 도경은 읽지도 않는 자들이 우리 화산파의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 것이오. 그간 출가인으로서 속세인들과의 다툼을 최대한 피해왔는데 최근에 조사님께서 계시가 내려왔소."
지금의 화산파는 구화산파의 개문조사인 백운선생을 조사로 모시고 있다. 즉 쌍말도인이 언급한 조사님은 이가주에게도 조사님인 것이다. 이가주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앉은 자세가 많이 단정해졌다.
"다행불의필자폐(多行不義必自斃 - 불의를 많이 행하면 알아서 망한다)라고 했소. 지금 화산파의 간판을 내세운 자들은 무공을 수련해서 사람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지 언제 공덕을 쌓는것을 본적이 있소?"
"조사님께서는 곧 화산의 이름을 도용한 자들에게 큰 벌을 내릴 것이라 하였소. 조사님이야 우화하여 등선한지 오래니 하늘 높은 곳에서 법사(法事)를 해서 벌을 내리는데 그 도력에 무고한 속가들도 피를 볼 것 같단 말이오."
이가주는 쌍말도인의 말에 겁을 덜컥 먹었다. 신선이 내리는 벌은 인연의 실을 타고 멀리 퍼진다. 화산파에게 내리는 벌이 이가장까지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적을 태운 재를 물에 풀어서 마시고 화산의 방향으로 절을 세번 하시오. 그리고 화산과의 연을 끊었음을 주변에 널리 알리시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천지가 그 사실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소."
이가주가 반색하며 부적을 받으려 하자 쌍말도인은 손을 뒤로 물렸다.
"조사님을 위한 일이라 돈얘기를 하면 안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노전(路錢)이 다 떨어졌소. 다른 자들에게도 부적을 전해줘야 하는데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오."
이가주의 눈짓에 총관을 맡은 셋째가 잽싸게 은자 오십냥을 가져왔다. 쌍말도사는 은자 열냥만 받고 나머지는 사양했다.
"이 정도면 남은 부적들을 전부 전달할 수 있겠소. 이후 들리는 가문들에 이가장의 은덕을 널리 알리겠소."
도사들은 갈길이 급하다며 이가장을 떠났다. 경공을 사용해서 날듯이 뛰어가는 도사들의 신형을 확인한 이가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주, 저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오?"
"믿어서 낭패를 볼 건 없다. 그리고 저자들이 무공으로 우리를 겁박해도 할말이 없는데 내준 은자도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는 걸 보니 실없는 자들이나 사기꾼은 아닌것 같구나. 쌍말도사가 시킨대로 하자꾸나."
사기꾼을 그만둔지 시일이 좀 되는 왕쌍말은 희희낙낙하며 은자 열냥을 동행한 자들과 나눴다. 남은 자들은 왕쌍말이 입을 털 때 옆에서 무게를 잡은 것과 이가장을 떠날 때 왕쌍말을 부축해서 경공을 시전한 것밖에 없다. 왕쌍말은 굉뢰장이라는 소리만 요란한 무공 하나만 제대로 익혔고 경공에는 아예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왕형, 그런데 왜 열냥만 받고 남은 돈은 거절한 것이오?"
이번일에 동원된 자들은 대부분 사도무천의 수하들이다. 선우가문에서는 선우장로만 손을 빌려주기로 했고 천살의 세력에서는 연화훈과 왕쌍말 그리고 고삼만 동원되었다. 고일과 당무영은 호위대의 수련과 관리를 맡았다.
연화훈과 왕쌍말 그리고 몇몇 말재주가 있는 자들이 무공이 강한 자들을 데리고 속가들을 돌아다녔다. 세가 강하면 뭉쳐서 함께 찾아가고 세가 약하면 지금처럼 흩어져서 각자 분배된 임무를 완수했다.
"아우, 은자는 부외수입이오. 원래 예상에 없던건데 열냥이라도 챙겼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 하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저들이 우리 말을 더 믿어줄 것이오."
왕쌍말에게 말을 건 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질문을 계속했다.
"왕형, 그런데 상대를 설득하든 못하든 상관없다고 했소. 그러니 굳이 저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니오?"
왕쌍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우는 지금처럼 하다가는 한평생 출세가 어려울 거요. 화산의 속가들을 흔드는 목적이 화산파의 전력을 분산시켜 일거에 소멸하려는 것이오. 그런데 누구도 속아 넘어가지 않으면 화산에서 속가들을 다독이러 사람을 파견하겠소? 속지 않은 자들이 화산에 이 일을 알리고 속은 자들은 주변에 화산과 연을 끊었다고 소문을 크게 내야 하오. 그래야 화산이 사태의 엄중성을 알고 제자들을 하산시킬 것이오."
질문한 자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화교는 내부에 알력이 있지만 명분상 단일세력이기 때문에 음모궤계와 세력다툼이 심하지 않다. 그래서 명화교의 무사들은 무림맹에 비해 순진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서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퍼져서 미리 계획한 대로 움직이며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가문을 방문했다. 이 모든것은 정밀한 계산을 거친 것으로 화산파에 여전히 호의적인 속가들이 보낸 전갈이 거의 동시에 화산에 도착할 수 있다.
천살과 선우복명 그리고 사도무천은 화음현과 멀지 않은 곳에서 노숙을 하며 하산하는 화산파 제자들을 생포하려 하고 있다. 아직 화산에 소식이 전해지려면 이틀정도 남았기에 천살은 사도무천의 제자들과 대련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천살이 음혈을 사용하는 관계로 사도무천의 제자들도 짧은 도를 들었다. 천살이 힘겹게나마 다섯 제자와의 대련을 이어나가는 것을 구경하며 사도무천과 선우복명은 천살의 무공을 품평 하였다.
"아직도 초식의 숙련도가 높지 않소. 그런데 실전에서 초식의 활용능력이 놀랍도록 뛰어나오. 마치 백전노장처럼 능숙하오."
말 그대로 천살의 움직임은 아직도 군더더기를 완전히 없애지 못했다. 하지만 초식의 선택과 초식을 변형해서 사용하는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런건 그저 타고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내공의 운용이 더 놀랍소. 초식은 엉성한데 내공의 흐름은 물흐르듯 자연스럽소. 혹시 통혈지신(通穴之身)을 이룬게 아닌지 의심되오."
통혈지신은 전신의 혈도에 내공을 저장하여 급한 경우 단전이 아닌 혈도의 기운을 움직여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내공과 외공의 구분이 의미 없어지는 경지로 내공으로도 외공으로도 이룰 수 있는 경지이다. 이는 사도무천은 이루었지만 선우복명은 이루지 못한 경지이다.
"나는 통혈지신보다 만혈개문(萬穴開門)이 더 의심스럽소."
사도무천의 말에 선우복명은 내심 놀랐다. 만혈개문은 사도무천도 이루지 못한 경지이다. 교주도 만혈개문을 이루지 못한 눈치인데 천살이 진정 이루었다면 대단한 경지이다.
"체질이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특이한 체질 때문인지 모르겠소."
천살의 체질이 내공에 적합한 것인지 아니면 천살성의 기운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전장에서 천살마기의 위력을 확인한 사도무천과는 달리 선우복명은 천살마성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다섯이 동시에 천살을 향해 공격을 시도했다. 천살의 몸이 소금밭에 던져진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다섯의 공격을 전부 피해낸 천살의 음혈이 다섯을 동시에 공격했다. 선우검파의 초식을 흉내낸 칠성연주를 다섯으로 줄여서 일검에 다섯을 동시에 공격한 것이다.
"저 움직임은 구유음풍선의 초식과 비슷하군. 초식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언젠가 한번 사씨 가문의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본적이 있소."
천살은 사진군이 한번 사용했던 궁유극미의 회피법을 흉내낸 것이다. 운기법이나 초식에 깃든 무의는 다르지만 궁유극미를 보고 만든 것이기에 외형상 비슷할 수밖에 없다.
"저 검법은 반양검의 후예사일과 비슷하오. 눈으로 보고 비슷하게 해내는 천재가 진짜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
한번 본 초식이나 움직임을 쉽게 따라하는 것은 천살이 타고난 재능이다. 정신적 깨달음은 부족하지만 육체적 깨달음은 쉽게 얻는다. 그리고 한번의 실전에서 얻어가는 경험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다. 그런 재능을 타고난 자가 불사공 덕분에 쉽게 죽을 걱정까지 없으니 천살마성이 아무 몸에나 깃든 것이 아닌듯 하다.
천살의 일검에 다섯명의 연수가 파탄났다. 여럿이 한명을 협공할 때 연수가 깨지면 오히려 위력이 감퇴하는 경우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련은 천살의 승리로 돌아갔다.
서창훈은 효자봉에서 선천기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선천지기가 더 충만한 곳으로 훌쩍 떠났으면 좋겠으나 화산은 자신이 없으면 안된다. 화산이 무당과 소림의 위로 도약할 수도 있는 중요한 시기이기에 자신의 욕심만 채울 수 없다.
"태상장로님께 장문제자 조자운이 인사 올립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 장문인께서 태상장로님을 청하십니다."
마교와의 전장에 한번 다녀온 후 조자운은 훨씬 성숙해졌다. 남궁천과 검을 섞는 천살에게 자극을 받은 것이다. 또다른 기대주였던 단손경은 나이를 먹어가며 무공의 진보를 멈추었기에 다음대 장문인은 조자운이 확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화봉에 도착해보니 수많은 속가제자들이 분분히 인사를 올렸다. 간단히 인사를 받아준 후 자리에 앉아 호군천의 이야기를 들었다. 구화산파 얘기가 나오자 서창훈은 이마를 찌푸렸다.
"혹시 종남파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오?"
종남파는 송나라때 성세를 누린 무림문파이다. 도문이기는 하지만 혼인도 마음대로 하기에 속세문파와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원나라때 탄압을 받아 세력이 크게 죽었다. 명나라가 들어섰지만 화산파의 존재로 인해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원나라때 화산의 도인들이 원의 박해를 피해 종남으로 가서 종남파의 비호를 받았고 종남에 뿌리를 내렸다.
"그쪽으로 알아보고 있기는 한데 제 생각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일의 규모가 종남 따위가 가능한 게 아닙니다."
"소림은 여유가 없을 것이고 무당일 가능성은 어떠시오?"
새로 황제가 된 주체는 소림에 만명의 스님이 참가하는 법사를 부탁했다.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한다. 소림의 중이 부족하여 다른 절의 중들도 청해야 하기에 소림은 요즘 눈코뜰새 없다.
"개방의 도움이 있다면 무당뿐 아니라 가능한 문파나 세력이 몇몇 더 있습니다. 배후를 캐는 동시에 속가들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오는 도중에 몇몇 속가들이 화산과의 인연을 끊었다는 소문이 크게 퍼지고 있다고 합니다."
화산의 힘은 속가에서 나온다. 물론 무공은 속가 전부를 합쳐도 본산의 정식제자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죽이는 걸 빼면 속가들이 화산보다 훨씬 더 능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사태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배후를 찾아 징치해야 한다.
"무공이 강한 제자 한명에 일반 제자 몇명씩 딸려서 각 지역으로 보내겠습니다. 화산의 이름이 있기에 무력다툼은 생길것 같지 않습니다."
사도무천이 드리운 낚시찌가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凌波微顫, 능파는 두가지 뜻이 있는데 급한 물살을 묘사하는 말과 물위를 걷는듯한 여자의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를 묘사하는 말로 씌입니다. 여기서는 두번째 뜻입니다. 파도를 타고 미약하게 떨린다는 뜻으로 낚시찌를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진짜 격세지감이 듭니다. 당문지예때만 하더라도 6천여글자로 끝냈을 내용을 지금 몇편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문지예처럼 썼다면 지금까지 내용이 삼십편 정도로 충분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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