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공
한선후는 기쁜 마음으로 밀실을 나왔다. 비록 두통이 있었지만 주화입마나 심마와는 상관이 없는 두통이다. 천신기가 급격히 강해진 부작용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두통에 대해 깊이 생각하려고 하면 두통이 몰려오고 점점 심해지기에 아예 생각을 하고싶지 않았다.
한선후는 뇌호혈을 비롯한 몇개의 혈도가 손상을 입으면서 이성이 옅어지고 본능이 강해진 상황이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대원이 침통한 표정으로 한선후에게 보고를 올렸다.
"교주님, 소공자께서 그만."
한선후는 호위대원의 말을 다 듣지 않고 경공을 시전해 아들의 방으로 향했다. 호위대원이 좋은 말을 할 것 같지 않았고 귀로 들으면 그 말이 현실이 될 것 같아 급히 자리를 피했다. 한원영의 방의 위치는 성물을 숨겨둔 밀실의 위이다. 경공으로 빠르게 움직이던 한선후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왜 이렇게 습해졌지?'
아들의 방에 도착하니 찾을때마다 늘 자신을 반겨주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온기가 사라진 방의 중앙에는 관 한짝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아무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교주는 침대밑도 들춰보고 옷장들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교주가 출관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호위대장과 호위대원들 그리고 장현성이 빠르게 한원영의 방에 도착했다. 교주가 실성한 사람처럼 관을 제외한 다른 곳들을 반복적으로 뒤지는 모습에 호위대장은 마음이 아팠다.
"교주님, 그만 하십시오. 소공자께서는 이미."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호위대장은 눈을 뒤집고 즉사했다. 한선후가 경공으로 다가가서 가슴에 일장을 날린 것이다. 호위대장의 무위도 평범하지 않지만 한선후의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반응도 못하고 즉사했다.
"아니야!"
한선후는 붉게 충혈된 두눈으로 방안의 모두를 쏘아보았다. 호위대원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려고 하자 한선후는 급하게 일장을 날렸다. 무력의 차이가 너무 나서 호위대원은 수비를 했지만 아무 효과도 보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즉사했다.
심기(心氣)가 흐트러지자 체내의 기운들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천신기의 기운은 얌전히 단전속에 있지만 욕심으로 내보내지 않고 몸속에 강제로 잡아둔 잡기운들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내력은 양도 중요하지만 그 순도가 더욱 중요하다. 천신기와 합쳐질 수 없는 기운들은 체외로 배출해야 하는데 탐욕에 찬 천신기는 그런 기운들도 억지로 잡아두었다.
그중 하나의 기운이 머리로 향하며 뇌호혈에 한번의 충격을 더 주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혈육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한선후는 뇌호혈의 충격과 함께 정신줄도 놓아버렸다. 몇년의 시간이 걸려야 정상으로 회복될 수 있는 뇌호혈이었는데 한번의 강한 충격을 더 받으며 이제는 돌아설 길이 사라졌다.
한선후는 고산종(敲山鐘)의 장법으로 방안의 모두를 공격했다. 고산종은 종을 치는 것처럼 상대의 전신에 타격을 주는 내가중수법이다. 어디를 공격해도 상관이 없기에 방어하기 지극히 힘든 장법이다. 막아내려면 한선후보다 더 높은 내공의 경지에 이르거나 대단한 외공을 익혀내야 한다.
장현성은 한선후의 장법의 힘을 전부 받아내지 못하고 타격을 입어 피를 토하고 혼절했다. 한선후는 쓰러진 장현성에게 흥미를 잃고 밖으로 도망가는 호위대원들을 쫓아갔다. 교주가 미쳤다는 외침이 사방으로 퍼지고 호위대원들뿐 아니라 원래부터 장원에 기거하던 하인하녀들과 호위무사들도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한선후는 마음속의 분노를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풀었다. 향긋한 피냄새를 맡으니 답답하던 속이 풀리고 가슴속의 화도 조금씩 사라졌다. 자신의 호위대원들과 장원의 하인하녀 및 호위무사들까지 다 죽인 한선후는 다시 관이 놓여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장현성은 교주의 장법에 타격을 받아 순식간에 숨이 막혀버리며 혼절했다. 그래도 큰 내상을 입지는 않아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교주가 밖으로 도망간 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죽이는 것을 보고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교주가 멀리 도망간 자를 쫓아 장원에서 멀어지자 장현성은 피묻은 옷을 벗어던졌다. 교주가 연공을 하던 밀실안에 숨기로 작정했다. 그 안에 숨어서 교주가 떠날 때까지 버텨볼 생각이다. 자신이 토한 피로 옷에서 비린내가 나기에 벗어던지고 열린 옷장안에서 알맞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경공을 이용해 밀실 입구로 향하는데 두손에 피칠갑을 한 교주와 딱 마주쳤다. 교주정도의 고수라면 자신의 몸에 피 한방울도 튀지 않게 할 수 있는데 살인과 혈향을 즐긴 교주는 일부러 자신의 몸에 피를 묻히며 즐거워했다.
"유손아, 혼자 어디로 가는 것이냐. 내가 방에만 머물러야 한다고 몇번이나 말했느냐?"
유손(有孫)은 한원영의 아명이다. 한씨가문의 대를 이어 손자까지 보라는 의미에서 지어준 이름이다. 한선후는 이름보다 아명으로 부르기 더 좋아했다. 정신이 나가버린 한선후는 한원영의 옷으로 갈아입은 장현성을 자신의 아들로 착각했다.
"몸도 다 낫고 해서 바람을 쐬러 나왔습니다."
장현성은 말을 아꼈다. 키는 비슷하지만 장현성이 나이도 더 많고 목소리도 다르다. 생김새가 다른 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교주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인지 진짜 미친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지만 장현성은 일단 교주의 장단에 맞췄다.
"그 의원이 괴령보다 훨씬 대단한 모양이구나. 괴령도 못 고친 네 병을 다 고쳐내다니. 그 의원을 불러오거라. 내가 큰 상을 내리겠다."
"이미 큰상을 내렸고 의원은 완치되었다고 며칠전에 떠났습니다."
한선후는 기쁜 마음에 큰소리로 웃어제꼈다. 필생의 소원중 하나인 아들의 괴질이 완치되었다. 건강해진 아들이 혼인을 하고 아들을 낳으면 한씨가문의 핏줄은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이 아비가 오늘 기분이 특별히 좋구나. 원하는게 있으면 한번 말해보거라. 내가 다 들어주겠다."
장현성은 그제야 한선후가 진짜로 미쳤음을 인식했다.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 장현성은 용기를 내어 소원을 말했다.
"저는 부친의 무공을 배워서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고 싶습니다."
한선후는 또 한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나를 닮아 포부가 크구나. 하지만 이 아비는 강호를 평정하고 천하를 정복해야 한다. 너를 붙잡고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 비급을 너에게 적어주마."
한선후는 곧바로 몸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장현성은 조심스럽게 한선후의 뒤를 따랐다. 마음속 한편에서 이대로 도망가라고 충동질했지만 한선후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힘듬을 안다. 그리고 한선후의 절세신공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재에 도착한 한선후는 붓을 들고 종이에 글을 적어내려갔다. 최근 밀실에서 얻은 북명신공과 축기공 그리고 압축공을 한데 합친 심법이다. 자식에게 자신의 최고로 강한 무공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한선후는 자신의 깨달음을 붓을 통해 글로 풀어나갔다.
한장의 종이에 이십여자씩 써서 종이 서른두장에 자신의 깨달음과 운기경로를 전부 담았다. 종이들을 순서대로 모은 후 풀로 접착하고 잘 무두질 된 가죽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내어 표지로 만들었다.
순식간에 한권의 비급을 만들어낸 한선후는 붓을 들고 표지에 무공의 이름을 적으려 했다. 그런데 무공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원래부터 있던 무공이 아니라 한선후가 최근에 깨달은 무공이기에 이름이 없는것이 당연하지만 미쳐버린 한선후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공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유손아, 내 가장 강한 무공의 이름이 무엇인지 아느냐?"
"천신공이라고 들었습니다."
한선후는 붓을 들고 천신공이라고 적으려 했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입속으로 나직하게 천신공을 연신 되뇌었다.
문득 언제인가 엿들었던 교도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강해지는 건 좋은데 두달도 못 살고 죽어버렸잖아. 이게 무슨 천신공이야, 천마공이지.'
'이건 천신이 내린 무공이 아니야. 갑자기 강해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아무 징조도 없이 죽어버렸어. 이는 마가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야.'
개봉으로 향하는 도중에 천신공으로 강해진 교도들이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시체를 처리했지만 소문이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무림맹의 첩자들이 부채질을 해서 천신공이 사실은 천마공이라는 소문이 한때 퍼졌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비급의 표지에 네글자를 적은 한선후는 흡족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쏙 드는 이름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비급의 이름에 마자를 넣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쳐버린 한선후는 지금의 이름이 매우 흡족했다.
"유손아, 이 무공을 익혀서 세상 누구보다 강해지거라. 그리고 한씨 가문의 핏줄을 자손만대 이어나가야 한다."
장현성은 한선후가 전하는 비급을 공손하게 받아들었다. 비록 비급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니 그럴듯해 보였다. 특히 마지막에 한선후가 이 무공을 익히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라고 주석을 달아놓은 부분을 보니 흥분을 금할 수 없었다.
"유손아, 네 병이 다 나았으니 이 아비와 함께 사도로 가자. 거기에는 수천의 정예무인과 수만의 충실한 교도들이 기다리고 있다. 이 아비가 곧 강호를 일통한 후 천하를 평정할테니 너는 혼인을 하여 자손을 보는데 집중하도록 하거라."
복마전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있던 천살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났다.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확인하고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천살의 단전속에 웅크린 신화공이 성물이 부서진 것을 알아차리고 슬픔에 빠져버린 것이다. 내공이 전혀 없는 천살은 신화공의 슬픔에 쉽게 동화되어 버렸다.
천살마기가 지금의 천살의 몸을 차지하려면 매우 쉽다. 횡련일기공이 깨져서 사용할 수
있는 내공이 없는 천살은 천살마기에 대한 저항력이 매우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동자공마저 이미 깨졌기에 매우 취약한 상태이다.
그러나 천살마기가 신화공을 견제하는 것처럼 신화공의 견제를 받는 천살마기는 천살의 몸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천살마기가 천살의 몸을 빼앗으려면 전신혈도를 전부 장악하고 하단전도 빼앗아내야 한다. 그렇게 기반을 닦아놓은 뒤 상단전을 차지해서 천살의 영혼을 쫓아내면 천살마기는 이 세상에 진정으로 강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도중에 중단전을 빼앗길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하단전과 중단전이 하나가 되어야 상단전으로 향할 수 있는데 신화공이 하단전과 중단전을 다 차지하고 천살의 상단전을 깨워버리면 천살마기는 영원히 기회가 사라진다.
초화규는 천살을 죽일 수 있는 함정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었다. 돌을 깨서 뾰족하게 갈고 나무껍질을 이어서 밧줄도 만들었다. 몇번의 싸움과 천살의 연무를 훔쳐보면서 천살이 내공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매우 적은 내공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한 초화규는 함정으로 천살에게 부상을 입히기만 하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마음에 꼭 드는 돌을 찾아낸 초화규는 기쁜 마음으로 돌을 갈았다. 무게도 적당하여 밧줄에 매달아서 적당한 시점에 천살을 가격할 수 있다면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웬만한 무공고수도 인식하지 못한 상황에 뾰족한 돌에 뒷통수를 맞으면 목숨이 위험하다.
천살은 명현공을 운용해 초화규에게 다가갔다. 발소리도 나고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났지만 초화규는 돌을 가는데 정신이 팔려 주의하지 못했다. 내공이 없이 펼친 명현공은 그 수준도 매우 낮아 초화규가 돌을 가는데 정신이 팔리지 않았다면 일찍 발견했을 것이다.
천살이 가까워지자 초화규도 기척을 느끼고 열심히 갈던 돌을 버리고 도망쳤다. 천살은 울적한 기분을 풀려고 초화규를 찾았는데 우연하게 초화규의 역모장면을 친히 목격하게 되었다. 도망가는 초화규를 두시진동안 쫓아서 붙잡은 천살은 초화규가 눈물을 흘리며 모친을 찾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팼다. 영문모를 슬픔이 전부 가시자 후련한 마음으로 다시 잠을 청하러 돌아갔다.
- 작가의말
혹시 천살마기가 왜 일찍 천살의 몸을 차지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을겁니다. 미리 간단히 말씀드리면 하단전이 완성된 후에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이 부분은 추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이번편은 천마신공의 탄생배경입니다. 이번편 보시고 이거 실화냐 하고 물으시면 저는 구전동화라고 답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천마와 관련된 무협소설들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이 천마라는 용을 그리는 거라면 지금 용의 몸통을 다 그리고 머리를 그리는 중입니다. 머리를 다 그리면 마지막에 눈동자를 그려야겠죠. 화룡점정을 하면 그다음 외전으로 화사첨족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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