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불가언
"사매, 이건 미친짓이야. 지금 당장 가서 못하겠다고 말해. 사매가 말하는게 힘들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
조자운은 원각을 비롯한 무림명숙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서지 못했지만 호매령과 단둘이 남자 큰소리로 질책했다. 무림맹은 천살의 동자신을 파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한 사람이 호매령밖에 없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이미 남궁청아가 실패했으니 호매령까지 실패하면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단순히 천살을 죽이는 것이라면 무림맹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천살마성이라 죽이면 안되고 생포해서 살려둬야 한다. 송운자도 그저 아직 죽을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만 알고 언제까지 살려둬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형, 나도 화산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해요. 부친의 복수뿐 아니라 이번일에 성공하면 무림맹에서 화산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준다고 했어요."
"사매, 지금 사매는 그저 일시적인 충동일 뿐이야. 시간이 흐르면 후회할 것이라고."
"사형, 저는 어린아이가 아니예요. 충분히 고민하고 한 결정이니 더이상 언급하지 않았으면 해요."
충분히 고민을 한 것이 아니다. 무림맹의 말을 듣고 충동적으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서창훈이 죽은 뒤 화산의 앞날이 밝지 않다는 것만 안다. 수많은 속가들이 이탈해서 종남의 품으로 들어갔다. 화산을 다시 살리기 위해서는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한다.
"사매, 화산을 위해서라면 걱정 안해도 된다. 십년의 시간만 지나면 나도 태상장로와 비슷한 수준의 무인이 될 수 있다."
"십년의 시간이 지나면 이미 많이 늦었어요. 화산의 성세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지 몰라요. 그리고 십년뒤에 사형이 고수가 된다는 보장도 없어요. 그러니 더 이상 저를 말리지 말아주세요. 남녀가 단독으로 오래 함께있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니 이만 나가주세요."
천살은 모옥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무공에 대한 명상이 아니다. 연화훈은 한선후가 보낸게 확실하다. 이곳은 무림맹과 금의위의 통제를 받는 곳이다. 연화훈 따위가 무림맹이나 금의위의 허락이 없이 천살의 모옥까지 도착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림맹이 한선후와 결탁했는지 아니면 금의위가 한선후와 결탁했는지, 아니면 셋이 짝짜꿍이 맞았는지 궁금했다.
만약 셋이 손을 잡았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한선후와는 이미 원수사이이니 이상할게 없다. 하지만 금의위와 무림맹이 왜 한선후에게 적대하는 자신을 적대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연수를 깨고 복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고민되었다.
'머리가 아프다. 아는 정보가 너무 적으니 아무 판단도 서지 않는구나. 간단하게 가자. 우선 한선후에게 복수를 시도하고 남은 것은 그후에 생각하자. 만약 무림맹과 금의위가 진짜 나에게 적대를 한다면 그 이유를 알아내고 제거하면 되겠지.'
명상을 통해 아무 결론도 얻은게 없지만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자신은 이제 갓 약관에 들어섰다. 복수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 있고 모르는것은 방법을 대서 알아내면 된다. 마음을 굳힌 천살은 모옥을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했다. 무당에서부터 사용한 검을 허리춤에 차고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짐으로 싸면 끝이다.
밖에서 자박자박 발걸음소리가 들리자 천살은 코웃음을 쳤다. 무림맹이 자신을 적대한다는 가정하에 남궁청아를 보낸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동자공의 공력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동자신을 유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아무 피해도 오지 않는다.
모옥문을 연 천살은 그자리에 굳어버렸다. 밖의 발걸음소리가 남궁청아가 아님은 알았다. 남궁청아에 비해 무공의 경지가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도 못한 호매령이 눈앞에 나타나자 그만 얼어붙었다.
호매령은 하나의 바구니와 하나의 함을 들고 있었다. 호매령은 함을 밖에 놓은 후 모옥안으로 발을 들였다. 천살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엉겁결에 비켜섰다. 호매령은 가지고 온 술과 안주를 바닥에 차려놓은 후 털썩 주저앉았다. 천살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호매령의 앞에 가서 앉았다.
"밖의 함은 한화령의 수급이예요. 고삼이라는 자에 의해 참수당했다고 들었어요. 제 말이 믿어지지 않으면 가서 확인해 보세요."
천살은 멍한 상태에서 고삼이 걱정되었다. 아무래도 고일의 일을 알고 한화령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 생각했다. 만약 고삼이 고일의 복수를 한 것이라면 그 수급이 왜 호매령의 손에 있는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의심이 갔겠지만 천살의 생각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와서 술 한잔 받으세요."
호매령이 준비한 술은 형수노백간(衡水老白干)이었다. 한나라때부터 유명한 술로 술의 성질이 강하기로 유명하다. 웬만한 주당도 세대접만 마시면 사흘동안 잠만 잔다는 열주(烈酒)이다.
천살은 술 한대접을 비우고 안주를 집었다. 호매령도 생각보다 쓴 술맛에 얼굴을 찌푸리고 급히 안주를 입에 넣었다. 내력이 강한 천살은 불사공까지 있어 술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호매령은 얼굴뿐 아니라 목과 손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천살, 술 한잔 더 받어."
호매령은 가끔 사형제들과 함께 술을 몇잔씩 마셨다. 하지만 화조(花雕)와 같은 황주로 술의 성질이 부드러웠다. 무림맹에서 준비한 형수노백간이 독한 술인줄 모르고 대접째 들이킨 호매령은 이미 만취한 상태이다.
"너 그때 왜 그랬어? 지금도 네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대체 왜 그랬는데."
호매령의 말에 천살은 마음이 아팠다. 힘이 없어 사람에게 그리고 상황에 휘둘린 적이 많았다. 호매령은 그저 취해서 주풍을 부리는 것인데 천살에게는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들렸다.
"난 말이오, 참으로 복도 없는 사람이오. 어릴 때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 나를 제외하고 마을사람 전부가 죽었소. 그래서 숙부집에 입양되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이 불길한 아이라고 숙부가 없을때면 돌을 던지기도 하고 회초리로 때리기도 했소."
천살은 만취한 호매령을 앞에 두고 신세한탄을 시작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당무영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이다. 호매령이 만취한 상태이기에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그렇게 천살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숙모가 식칼로 자신의 배를 찔렀던 일, 서창훈에게 구원을 받고 화산으로 향한 일, 유씨 삼형제에게 구타를 당하며 무공을 배운 일, 서창훈과 함께 서문가에 가서 장형산과 비무를 했던 일, 화산의 제자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던 일 등을 풀어놓았다.
개봉의 풍운장에서 점혈당한채 강제로 진실을 들어야 했던 일, 화령에게 구원받았으나 이용가치가 사라지자 인육백정들에게 넘겨진 일,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천살마기가 발작한 일, 소림에 끌려가 인육백정들과 한패거리로 오해받아 복마전에 던져진 일도 담담히 말했다.
복마전에서 굴을 파고 탈출하려다가 뒷부분이 무너져서 며칠간 고생고생 다시 공동으로 돌아온 일, 마교장로 초화규를 만나고 초화규의 내공을 받아 공동을 다시 기어오른 일, 중간에 초화규를 떨궈낸 일과 소림에서 도망가다 계곡에 떨어져서 혼절한 일 등도 가볍게 언급했다.
명화교로 가서 무사로 지내며 밀수꾼들과 숨박꼭질을 했던 일, 남궁천을 비롯한 자들이 자신을 생포하려 했던 일, 덕분에 혼원공을 익혀서 고수의 반열에 오른 일, 횡련일기공을 익히고 내공과 외공을 동시에 익혀낸 일, 신화동에 가서 여섯의 협공을 받고 구사일생으로 도망간 일 등도 말했다.
불사공을 익힌 일이나 신화공을 익힌 일, 천산에서 한철을 얻어 음혈을 제작한 일 등은 얘기하지 않았다. 서안에서 우연히 유씨 삼형제를 만나 불구로 만든 일도 숨겼다. 그 후에 소교주가 되고 수하들을 받은 이야기, 한화령과 혼인한 이야기, 조유천과 함께 화산으로 향했던 이야기, 황제인 주체와 대면했던 이야기, 사천에 가서 당문의 절독을 복용했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교주에게 북명신공으로 내공을 탈취당한 이야기와 괴령이 자신의 육체를 빼앗으려 했던 이야기, 무당에 가서 비무를 했던 이야기까지 하니 더이상 할말이 없어졌다. 수많은 이야기를 토해내자 천살의 가슴은 후련해졌다. 말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호매령을 바라보니 얼굴이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천살이 말을 멈추자 호매령은 그제야 자신이 어떤 꼴인지 자각하고 급히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술에 취해 처음에는 그저 듣기만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천살의 이야기속에 빠져들어 천살과 함께 웃고 울었다. 자신의 부친과 서창훈이 천살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 알게 되었고 위기에 처한 화산이 천살 덕분에 멸문지화를 피했음도 알게 되었다.
"자, 한잔 받고 마음 풀어. 사내 자식이 말이야."
천살의 이야기에 빠져 취기가 어느정도 가셨지만 호매령은 술취한 말투를 유지했다. 천살의 이야기를 듣고 슬픈 기색을 비치기 싫은 것이다. 자신은 하나도 견딜 수 없는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고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천살에게 동정을 보이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되었다.
천살이 입을 다물자 호매령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서안에 몇번 가본걸 빼면 거의 화산을 벗어난 적이 없는 호매령이기에 천살의 이야기에 비하면 심심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눠본 경험이 없는 천살로서는 호매령의 이야기가 매우 재미있었다.
"내가 말이야, 임마, 내가 널 좋아했다고. 그게 아니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내가 널 좋아한다는 거야. 그래, 바로 그거야."
호매령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입에 술을 부어넣었다. 충동적으로 무림맹의 요구에 응했고 두려움을 안고 천살을 찾아왔다. 굳이 무림맹의 요구에 응한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아 화산을 위해서라고 자기합리화 했다. 술에 만취해서야 자신이 사실은 천살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 사내자식이 말이야, 여자가 이렇게 말하면 막, 옷도 벗고 막 그래야지. 너 혹시 여자랑 자본적이 한번도 없냐? 으헤헤."
호매령의 얼굴은 남궁청아에 비해 부족함이 보인다. 미의 기준이 아무리 주관적이라고 해도 남궁청아의 얼굴은 호매령에 비해 확실히 낫다고 할 수 있다. 호매령의 몸매는 초영란에 비할바가 아니다. 한화령과 명화교의 이대미녀로 뽑히는 초영란의 몸매는 그야말로 대단하다. 호매령의 기품은 한화령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 어려서부터 교육을 제대로 받고 자란 한화령은 굳이 꾸미지 않아도 고귀한 기품이 흘러 넘친다.
하지만 천살의 눈에는 호매령이 셋을 합친것보다 훨씬 나아보였다. 또렷한 이목구비는 남궁청아처럼 세밀하지 않지만 시원한 멋이 있다. 초영란처럼 여성스러운 몸매는 아니지만 무공수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와 길다란 팔다리는 호쾌한 멋이 살아있다. 한화령과 같은 고귀한 기품은 없지만 보는 사람이 호감을 가지게 하는 상큼한 미소가 있다.
호매령이 어떤 생각으로 찾아온건지 천살도 알고 있다. 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회피했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동자신을 굳이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호매령이 올때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지금의 호매령은 천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인정한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천살은 모옥의 문을 닫고 안으로 단단히 걸었다. 밤은 점점 깊어갔고 천살과 호매령의 사랑도 점점 깊어갔다.
- 작가의말
緣不可言, 인연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전개는 그대로이지만 덜 답답하게 바꾸었습니다. 원래 전개는 이것보다 세배정도 더 답답했을 겁니다. 여러분의 댓글을 읽고 많은것을 깨우쳤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무엇이고 이 글을 읽어주는 분들은 왜 읽어주실까 많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재미로 읽는 무협에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글에서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표현의 방식은 많이 고민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고민은 천마를 끝낼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 아직 명확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원래 전개대로 계속 끌고 가겠습니다. 다만 표현방식에 더 많이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가족을 포함한 욕이나 인신공격만 아니라면 어떤 댓글이라도 환영합니다. 제 멘탈이 생각보다 많이 강합니다. 돈이 필요했다면 영웅문을 판타지화해서 표절하고 뻔뻔하게 유료화하고 완결할 수도 있는 멘탈입니다. 가끔 강한 비평을 쓰고 삭제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우연히 세분정도의 댓글을 읽었습니다. 제가 읽은 후 몇분 지나지 않아 삭제하셨더군요. 덕분에 깨우친게 많습니다. 제가 이렇게 표현하려고 해도 읽은 분은 저렇게 받아들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연참에 집착하지 않고 댓글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며 글을 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판타지는 시작부분만 기획하고 뒷부분은 막 써내려갈 작정입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많이 해서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만족할 수 있는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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