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검쌍인
갑자기 나타나 조자운의 목숨을 구한것은 아노이다. 목소리가 전혀 나지 않기에 박수를 쳤지만 조유천이 거들떠보지도 않자 몸을 날린 것이다. 땅에 떨어진 왼팔이 펄떡거리고 가슴의 상처에서 피가 콸콸 쏟아졌지만 아노는 개의치 않고 바닥에 자신의 피로 글을 적어내려갔다.
아노는 바닥에 아홉글자를 적은 다음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더니 죽어버렸다. 출혈이 너무 심해서 손쓸 사이도 없이 죽어버린 것이다. 아노가 적은 아홉글자가 조유천의 눈에 들어왔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천살도 몸을 일으켜 두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오조입화부조자운자(吾趙立華父趙紫雲子), 나 조입화는 부친이고 조자운은 아들이다. 호군천이 거둔 조자운은 아노 조입화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조유천은 아홉글자를 보고 조자운의 얼굴을 한번 보고 다시 죽어버린 조입화의 얼굴을 한번 보았다.
"입화야, 네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조입화는 조유천의 손자이다. 아들이 강호에서 협행을 벌이다가 일찍 죽고 하나 남은 손자였다. 몇번이고 사람을 보내 하나밖에 없는 혈육의 행방을 찾아보았는데 오늘 자신의 손으로 그 목숨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조자운 너는 내 증손이겠구나. 하늘이 이 조유천에게 벌을 주려는 것인가? 계속 눈감고 있지 왜 이제야 눈을 뜨는 것이란 말인가."
그제야 천살은 그때 왜 자신이 아노를 가격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천살이 조자운을 공격하자 아노가 몸을 날려 조자운의 앞을 막아섰던 것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노를 확인하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천살은 조자운의 검에 목숨을 잃을뻔 했다. 아노는 천살이 조자운에게 죽을뻔한 것이 미안해서 자신을 부상입힌 천살을 전혀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잘 대해주었다.
한편 조유천의 가슴에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모든 시고 쓰고 떫고 매운 맛들을 버무리고 있었다. 화산에 권파가 생긴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화산은 전통적으로 검법을 사용하는 문파이다. 하지만 일부 검법에 자질이 부족한 제자들이 한데 뭉쳐서 파벌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백운존자라는 걸출한 존재가 권법을 만들어냈다. 그저 그런 권법이 아니라 응사생사박이라는 희대의 권법과 벽석과 파옥이라는 기본을 다지기 좋은 권법도 만들어냈다. 그리고 기와 험을 기본으로 하는 육합매화권에서 태악삼청봉이라는 고강한 초식도 깨달았다.
그후 검파는 화산의 검법을 변화시키려고 강호의 활동을 자제했다. 그대신 조유천을 비롯한 권파의 제자들이 강호를 주유하며 화산의 명성을 떨쳤다. 백운존자가 만들어낸 권법이 강맹한 것도 있고 새로 만들어낸 완성에 가까운 권법이 생소한 것도 있어 권파의 제자들이 강호에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검법을 익히면서 받았던 냉대와 멸시의 눈빛 때문에 권파의 제자들은 무공의 고하를 불문하고 서로 친형제처럼 지냈다. 무공이 약하다고 얕보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원래 조유천의 제자였던 이무결이 다음대 장문인으로 지목되어 장문인의 제자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장문인이 된 이무결은 권파의 제자들을 중용하였다. 하지만 다음대 장문인을 지정하는 과정에서 권검지쟁이 일어났고 이무결은 검파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했다. 조유천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조입화도 행방불명이 되었고 말이다.
조유천은 처음 검법을 익힐 때 다른 제자들보다 느려서 많은 구박과 조소를 받았다. 그러다 백운존자의 눈에 들어 권법을 익혔는데 적성에 맞아 실력이 일위춸장했다. 그때 받은 울분 때문에 검파를 항상 적대하다 보니 권검지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때 권파가 검파의 자리를 대체하려 하지 않고 권파의 권익만 챙겼더라면 서로 피를 흘리는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권파의 대다수 제자들이 검을 익히며 조롱과 무시를 받아왔기에 검파에 대한 적대감이 대단했다. 공평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검파를 권파의 발밑에 두려고 했다.
오늘도 서창훈은 검파의 패배를 시인하고 권파의 처분에 맡긴다고 말했다. 조유천은 화산의 장문인을 교체하고 자신이 생각하던 원래의 화산으로 돌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원한을 풀려고 했는데 오히려 자신의 친손자의 목숨을 거두었다.
죽기전에 후회로 가득찬 서창훈과 마찬가지로 조유천의 마음 역시 온갖 후회로 들끓었다. 오늘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둘이다. 평생 최대의 원수로 생각했던 서창훈은 천살에게 패한 후 자결했다. 그리고 두번째로 죽은 사람은 조유천의 손자로 조유천의 칼에 죽음을 맞이했다.
조유천이 복수를 포기했더라면, 서창훈의 죽음으로 만족했더라면, 굳이 권파를 검파의 위에 놓으려 하지 않고 검파와 동등한 권리만 챙기려고 했다면, 여러가지 가정들이 조유천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다. 조유천은 서창훈의 검에서 보았던 화산을 떠올렸다. 자신의 권에는 화산이 담겨있는지 질문했지만 긍정적인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화산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비틀린 욕구를 정당화한게 아닌지 궁금했다. 서창훈에 대한 원한이 질투에서 비롯된게 아닌지, 자신은 권파의 형제들의 복수를 하려는게 아니라 그저 자신의 분풀이를 원한게 아닌지 궁금했다. 하지만 조유천은 생각을 멈췄다. 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오늘부터 화산은 권파와 검파의 구분이 없다. 모든 사형제가 가족처럼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새로운 장문인은 알아서 뽑도록 해라."
할말을 마친 조유천은 조입화의 시신을 안아들었다. 다리 하나가 없어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조유천을 제자 한명이 급히 부축하려 했지만 조유천의 제지를 받았다.
"소교주, 뒷처리를 잘 부탁하오. 믿고 맡기겠소."
수하의 손에서 철곤을 건네받아 지팡이처럼 사용하며 조유천은 연무장을 떠났다. 손자의 시체와 팔을 짊어지고 조유천이 사라지자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천살에게 집중되었다.
아노의 죽음은 천살에게도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아노는 화산에서 천살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문득 예전에 아노와 내기를 했고 진 사람이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던 일이 생각났다. 만약 아노가 살아있다면 어떤 소원을 말했을지 궁금했다.
"화산은 알아서 새 장문을 뽑으시오. 그리고 무림맹에서 탈퇴하고 오년간 봉문할 것을 명하오. 서창훈의 죽음으로 나는 화산에 대한 모든 원한을 지우겠소. 단 화산의 제자가 나한테 복수를 원하면 언제든 도전을 받아주겠소."
"호군천이 화산을 대표하여 천소교주와의 약속을 지킬것을 맹세하오."
조자운은 바닥에 흘려진 조입화의 핏자국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예전에 호매령과 유씨 형제들과 함께 처음으로 천살을 찾아갔을 때 아노를 하인취급했던 생각이 났다. 자신은 화산의 죄인이고 아비를 몰라본 죄인이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조자운은 무릎을 꿇고 연무장에서 새벽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살과 고삼은 조유천의 제자들의 등에 업혀 화산에서 내려왔다. 조유천의 다섯 제자는 비교적 개운한 표정이었다. 천살은 이들이 복수를 끝내서 개운한게 아니라 더이상 복수를 할 필요가 없기에 개운해진 것이라 생각했다. 서창훈이 죽어도 그리 마음이 통쾌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한화령에 대한 복수를 끝까지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천살의 입장은 조유천과 다르다. 천살은 철저한 약자의 입장에서 속임을 당하고 해코지를 당한 것이다. 천살이 복수를 포기하려면 한화령이 잘못을 인정하고 천살에게 잘못을 빌어야 한다. 하지만 그날이 영원히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화산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마교의 기습으로 화산의 수십명 제자가 인질이 되었다고 합니다. 서창훈이 자결을 하고 호군천이 장문인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인질로 잡힌 제자들을 구해냈답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 탈퇴하고 오년간 봉문을 한다고 합니다."
사실 화산은 무림맹의 전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림맹에 화산에서도 발언권이 제대로 없는 장로 한명만 형식적으로 보내놓았다. 천살마성을 생포하는데 한번 제자들을 파견하고는 그외에 전혀 무력적인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서창훈은 무림맹의 여러 문파들에게 정도제일고수라는 상징성이 있고 화산 역시 감숙과 가까운 서안지역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문파이기에 아무것도 안하더라도 화산이 무림맹의 일원이라는 명분은 필요하다. 송백자는 화산의 몰락이 기분 나쁘지는 않지만 소림이 법사때문에 빠진 지금 화산까지 탈퇴하면 당분간 무림맹도 쉬어야 한다. 소림과 화산 그리고 무당에서 무림맹 재정의 절반이상을 부담하고 있는데 화산이 빠지고 소림도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종남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조사해라. 화산은 서창훈을 잃었으니 오년뒤 봉문을 풀어도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종남을 키워야겠다."
송백자는 이번 기회에 종남으로 화산을 대체할 계획이다. 종남을 어느정도 키워놓으면 화산과 종남이 서로 경쟁을 하고 견제를 하면서 상대를 방해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무당은 소림이라는 경쟁적수 하나만 남게 된다. 화산이 소림보다는 무당에 더 적대적이기에 화산이 사라지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우호적인 세력들에게 미리 알려서 인심을 다독이도록 해라. 그리고 무림맹을 위해 가장 큰 공헌을 하고 있는것이 우리 무당파라는 점도 주지시키고 말이야."
교주전에는 두명의 특별총관이 있다. 한명은 조(鳥)총관이고 한명은 서(鼠)총관이다. 이 둘은 정보를 담당한 자들로 내부의 정보는 서총관이 외부의 정보는 조총관이 주로 담당한다. 하지만 분공이 명확한 것은 아니고 서로 영역이 겹치기도 하는데 이는 정보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주의 결정이었다.
"특지급으로 올라온 정보입니다. 개봉전임을 확실히 확인했습니다."
사실 특지급으로 올라올 정보가 별로 없다. 아주 시급한 일이거나 아주 중요한 일을 굳이 구분하지 않고 특지급으로 분류한다. 시급할 일은 없으니 중요한 일이라는 뜻인데 교주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중대한 일은 생길것 같지 않았다.
"주체가 복상사라도 했나?"
교주는 본인의 농담이 재밌는지 껄껄 웃었다. 조총관이 밖으로 나가자 내공으로 서신의 봉인을 녹였다. 사실 서신의 내용은 봉투의 안쪽에 적혀있다. 안에 서신이 없기에 누군가 함부로 열어봤다면 흔적이 남게 되는 것이다. 내공으로 봉인을 녹여야만 안의 내용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데 봉인을 녹이는 방법은 교주만 알고 있다.
'천살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멀쩡한 서창훈과 일대일 대결을 펼쳐 서창훈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 서창훈이 부족함을 느끼고 자결을 택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이구나. 천살마성이 내가 생각했던것처럼 간단하지는 않구나.'
"조총관, 들어오게."
조총관이 들어와서 부복했다. 신하들이 황제를 만날 때 올리는 예와 똑같은 예였다.
"괴령도인의 행방을 알아봐주게. 그리고 한선후가 부른다고 전하게. 될수 있을만큼 빠르게 찾아와야 할 것일세."
조유천의 제자는 천살에게 조유천의 서신을 전했다. 천살에게 화산파를 용서해 주어서 감사하다 전하고 자신은 명화교로 돌아갈 생각이 없으니 다섯 제자와 다른 수하들을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천살은 조유천의 서신을 다섯 제자에게 보여준 후 태워버리게 하였다.
자신이 던진 복수의 칼날이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며 천살은 명화교로 향했다. 이제 한화령에게도 복수를 마치고 새로운 목표를 찾아 살아가기를 원했다. 새로운 목표는 무공이다.
- 작가의말
讐劍雙刃, 복수의 검은 양날의 검이다. 양날의 검은 상대를 해치는 동시에 자신이 다칠수도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 제가 표현하고자 함은 지저분함 입니다. 복수라는게 항상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화산의 검파와 권파처럼 서로 가해자이며 피해자인 경우 더 지저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건 모르겠고 이번편이 사이다가 아닌건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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