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교준동
"너는 내일 나와 함께 개봉으로 가야겠다."
며칠이 지나자 답답하던 마음이 많이 나아졌다. 다시 수련에 열중하고 있는데 서장로의 한마디가 천사성의 일상을 깨뜨렸다. 지난번 천검산장으로 갈때의 흥분은 없다. 천사성은 이 모든것이 연화 탓이라고 생각되었다.
여행준비를 하느라 하루 수련을 쉬기로 했다. 이번에 개봉으로 향하는 것은 천사성과 서장로뿐이 아니다. 천서상과 서장로가 먼저 개봉으로 향하고 호군천이 사형제들과 함께 며칠뒤에 개봉으로 출발한다.
천사성은 짐정리를 대충 끝낸 후 오랜만에 무공검법을 펼쳐보았다. 어차피 다 암기한 내용이라 꼼꼼하게 읽지 않고 대충 눈으로 훑기만 했다. 무공검법서를 덮고 한참 고민하던 천사성은 다시 검법서를 펼쳤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책을 펼쳐 꼼꼼히 살폈지만 전혀 단서가 없었다. 천사성은 다시 첫장부터 빠른 속도로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번을 반복하고 나서야 겨우 실마리를 잡았다.
검법서의 내용에 집중해서 개의치 않았는데 초식들마다 글씨체가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묵구탐식에 있는 수백개의 찌르기들도 서로 다른 필체로 초식의 설명이 씌여있었다. 자신의 수련을 되새기며 글자들을 바라보자 깨닫는 바가 있었다.
검법서를 작성한 자가 알고 그랬는지 무의식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글자를 쓸때 해당 초식이나 동작의 검리(劍理)가 필체에 녹아들었다. 똑같은 글자도 이 동작에서는 날렵하게 저 동작에서는 힘있게 씌여져 있었다. 일부 무공서가 그림으로 초식의 동작을 표현하는데 무공검법은 글씨체로 그 동작의 요체를 표현하고 있었다.
수련하기 전에 글씨체가 다른것을 알아차렸더라도 그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년에 가까운 시간을 수련하다보니 그 차이를 인식하고 나아가서 그안에 숨겨진 의미를 깨달았다. 천사성은 검법서를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이튿날 화음현에서 마차를 타고 서안으로 향하는 길에서 천사성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무공검법은 달랑 네개의 초식이라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검리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어제 글씨체에서 깨달음을 얻은 천사성은 그 수많은 검리들을 조합하고 농축시켰고 초식의 동작들도 많이 압축하였다.
일례로 묵구탐식의 수백개의 찌르기를 스무개정도로 줄였다. 하지만 자신이 한일이 맞는 것인지, 옳은 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수백개에서 갑자기 확 줄이니 수련은 편해지겠지만 초식의 위력이 줄어들까 걱정인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는 것이냐?"
서장로의 물음에 천사성은 공손히 대답했다. 연화로부터 자신이 천살성임을 알게 된 후로부터 서장로의 은혜를 더욱 깊이 느끼고 대하는 태도가 많이 공경해졌다.
"어리석은 고민이 있습니다. 무공 초식은 복잡하고 다양한게 좋을지 간결하고 확실한게 좋을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고민이 맞구나. 복잡하든 간결하든 효과만 좋으면 그만이 아니냐?"
"장로님은 고수셔서 보시고 바로 판단할 수 있으시지만 저같이 무공을 모르는 자들이야 어찌 효과가 좋은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서장로는 천사성의 말에 흥미가 생겼다. 이는 어떤 검법이 훌륭한 검법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나아가서 검은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도 될 수 있다. 서장로가 이 고민을 시작한 것은 사십이 다 되어서이다. 그전까지는 무공수련에 막힘이 없어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았다.
"훌륭한 검법은 균형이 있어야 한다. 하나의 초식속에 공격과 방어 그리고 회피가 다 깃들어야 한다. 물론 초식마다 공격이나 방어 혹은 회피에 집중할 수는 있지만 회피의 초식이라도 방어와 공격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된다."
"그리고 검법 전체에 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공격하는 초식과 방어하는 초식 그리고 회피하는 초식들이 적절이 존재하고 그 초식들이 서로 연계가 되어야 한다. "
서장로는 검지와 중지를 곧게 세운 후 앞으로 찌르기를 시전했다. 손에 검이 들려있지 않지만 천사성의 눈에는 바위를 가를 힘을 품은 검이 번개같이 쏘아져나가는 환영이 보였다.
"화산의 태악삼청봉이다. 이것을 검법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이 초식의 위력 때문이다. 내가 한때 방어와 회피의 초식을 만들어 태악삼청봉의 초식과 함께 완전한 검술을 만들려고 시도해본적이 있는데 결국 실패하였다."
"태악삼청봉은 일단 시전하면 내기와 외기를 타기 때문에 나도 자의로 멈출 수 없다. 그 내기와 외기를 전부 거스르면서 이 초식을 멈출수 있다면 천하제일검이라는 말에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서장로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천사성에게 사고할 시간을 주었다. 천사성의 두눈에 다시 총기가 돌아오자 서장로는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태악삼청봉은 하나의 초식일 뿐 검법이 될 수 없다. 하지만 태악삼청봉도 원래는 하나의 검법이었고 무수히 많은 초식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떤 천재가 줄이고 줄여서 결국 태악삼청봉이라는 극강의 초식으로 압축한 것이다."
"태악삼청봉으로 압축된 검법은 여자들에게 적합한 환검인 옥녀검일수도 있고 화산 최고의 검법인 청풍부월검(淸風浮月劍)일수도 있다. 하지만 의외로 기본무공인 육합검이나 매화검일수도 있다."
"하나의 완전한 검법은 검리가 명확하고 검의가 확실하며 포함된 초식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초식이 복잡한지 간결한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하나의 검법을 접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을 네 마음대로 바꿨을 때 검의나 검리가 변화하는지, 변화한다면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 판단해야 한다."
"위력이 강하다고 좋은 검법인 것이 아니다. 그 검법에 깃든 검리와 검의가 어느 수준인지가 그 검법을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
말을 마친 서장로는 눈을 감고 명상에 들었다. 천사성에게 말하다 보니 본인도 작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장삼풍이 왜 그렇게 많은 제자를 받아들였는지 알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로 가다듬는 과정에 알고 있었지만 유념하지 않았던 것들을 깨닫게 된다.
서장로가 눈을 다시 떠보니 천사성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장삼풍을 따라잡기 위해 제자도 들이지 않고 개인수련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장삼풍도 제자들을 가르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을 것 같았다.
한참뒤에 눈을 뜬 천사성은 입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왜 탄식을 내뱉는 것이냐? 문제가 있는 것이냐?"
서장로는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가끔 천재성이 뛰어난 아이들은 무공수련을 시작할 때 자신에게 커다란 벽을 만들어 놓는다. 그것을 깨지 못하고 평범한 무인으로 전락한 천재를 한두명 보아온 것이 아니다. 혹시 천사성이 그런 경우라면 어떻게든 도와서 그 벽을 허물어버려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검리와 검의를 포함한 검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탄식을 했습니다. 세상에 그런 검법이 있을리가 만무하죠."
"그런 검법이 있다 쳐도 인간이 익혀낼 수 있을 것 같으냐. 삼풍자가 우화등선하기전에 태극혜검을 남겼다고 하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기는 하구나."
사실 천사성이 탄식을 뱉어낸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서장로의 말에 깨달음을 얻어 무공검법의 네개 초식을 융회관통했다. 그렇게 네개의 초식을 서로 연결하고 검의와 검리를 다시 정리하고 보니 무공검법의 한계가 보였던 것이다. 내공의 사용을 배제했기에 완전한 검법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내공이 모이지 않는 천사성에게는 최고의 검법이나 다름없지만 말이다.
서안에 도착하니 화룡표국의 표두들이 천사성을 대하는 태도가 유독 공경스러웠다. 서장로의 언행에서 자신이 곧 화산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천사성은 표두들의 반응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표두들의 존경심은 천사성의 배경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과 비무당시 천사성이 무공을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다는 말을 표국주에게서 얻어들었기 때문이다.
개봉까지는 대부분 물길로 가면 된다. 표국주는 서장로가 없는 자리에서 천사성에게 돈주머니를 주며 여비에 보태라고 하였다. 화산의 태상장로인 서장로에게 직접 돈을 찔러줄 수는 없으니 천사성에게 주는 것이었다. 천사성도 잡서들을 통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사양하지 않았다.
천검산장으로 향할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큰 배에 탔다. 배에는 십여명의 선원들을 제외하고도 오십이 되는 손님들이 타고 있었다. 뱃멀미가 심해서 드러누운 사람들을 제외하고 남은 사람들은 갑판에 옹기종기 모여앉았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따리장사를 하는 장사치들이라 서로 정보교류에 정신이 없었다. 어느 길로 가면 통행세를 얼마 내야 하는지, 어느 지방에 어떤 특산이 있고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런 와중에 천사성의 주의를 끄는 대화가 있었다.
"지난달에 감숙위에서 마교와 변방군이 한차례 충돌이 있었는데 변방군의 병사 백삼십여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네. 그런데 지금 북원의 군사들도 변경에 모여들고 해서 곧 큰싸움이 날 예정이네. 쌀값이 폭등하고 가죽과 솜 그리고 철의 가격이 몇배로 뛸 걸세."
"소문에 의하면 마교와 북원이 손을 잡고 명나라를 전복하려고 한다네. 혹세무민을 일삼더니 이제는 외세와 손잡고 국가를 전복하려 하고 있소. 장담컨대 마교의 잡졸들은 언젠가 천벌을 받을 것이오."
계속해서 마교가 어쩌고 하며 말을 하던 사내는 갑자기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일어섰다. 하지만 주위를 살펴봐도 누구 소행인지 알 수가 없자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화제를 바꿔 마교가 아닌 다른 얘기를 했다.
점심은 간단하게 건량을 먹었지만 저녁은 객잔에서 먹었다. 배는 나루터에 정박했고 손님들은 짐을 들고 객잔으로 향했다. 일부 돈을 아끼는 자들은 갑판에 잠자리를 폈다. 서장로와 천사성은 소면 두그릇에 야채 두접시를 시키고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혹시 두분은 화산파에서 나오신 분들인가요?"
천사성이 돌아보니 자색 무복을 갖춰입은 여자가 말을 걸고 있었다. 나이는 열여섯 정도로 어려보였고 뒤에는 수하나 보표로 보이는 자 두명이 서있었다.
- 작가의말
세상의 모든 검의와 검리를 포함한 검법을 배우려면 흰털 원숭이를 찾으라. 강남에서 제일가는 검법학원으로 유명한 흰털 원숭이의 아미학원, 천하제일고수를 꿈꾸는 어미들이여, 자식의 손목을 잡고 여기로 향하여라.
제 글에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는 표현이 가끔 있는데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는 뜻입니다. 무협에서 초점이란 단어를 쓰기 그래서 총기로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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