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망회회
그날 밤 표운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청아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천살은 표운이 오지 않은것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자꾸 남궁청아의 얼굴이 떠오르고 호매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끔은 한화령의 얼굴도 떠올랐다.
천살은 한화령의 외도에는 별 생각이 없다. 어차피 부부의 명만 있고 부부의 실이 없는 유명무실한 부부관계이다. 예전에 개봉에서 자신에게 해코지한 일과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지 않은것에 대한 원한이지 외도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다. 이미 한화령을 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노력하지 않은 잘못은 인정한다. 하지만 잘못의 크기를 따지자면 네가 훨씬 더 클 것이다.'
천살은 한화령과 부부의 연을 맺은 후 둘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천살의 잘못이라면 그것 하나밖에 없다. 당시 상대적 약자의 입장이었던 천살은 원한관계를 해소할 방도가 없었다. 천살의 용서는 용서가 아니라 굴복일 뿐이다. 상대적 강자의 입장인 한화령이 먼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 뒤에도 너는 사과를 하지 않고 나를 해코지하려 했고 결국에는 외도까지 했다. 아마 너는 외도마저 내가 합방을 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천살은 한선후에 대한 원한은 한선후의 목숨으로 풀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한화령에 대한 복수는 계속 고민중이다. 회임을 한 한화령을 죽이면 뱃속의 아이도 죽는다. 아이를 낳은 후 죽이면 아이는 어미없는 아이가 되어버린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 죄없는 자에게까지 피해가 가는것이 옳은지 천살은 고민되었다.
'고민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복수의 순간이 되면 그때 마음가는대로 하자. 그리고 평생 후회하지 않으면 된 것이다.'
원래부터 갑갑하고 어딘가 불편했던 마음을 남궁청아가 제대로 헤집어 놓았다. 날이 밝자 천살은 무림맹에서 누구라도 오기를 기다렸다. 누가 오든 최선을 다해 두드려 패서 갑갑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고 싶었다. 그런 천살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무림맹측에서는 누구도 오지 않았다.
천살은 저녁까지 표운이 오지 않으면 명화교의 무리를 혼자 덮치기로 결심했다. 알수 없는 불안감과 조급증이 천살을 괴롭혔다. 만약 송운자가 태극혜검을 보고 무공을 잃고 폐인이 된 일을 알았다면 그 연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고 혼란한 마음을 어느정도 수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모르니 갑갑한 마음이 더 갑갑해져 폭력적인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랐다.
유교의 성인들은 마음을 잘 다스리라고 강조했다. 천살이 가장 먼저 배운것이 성인들의 가르침이라 알게모르게 유교사상이 천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논어나 장자와 같은 책들에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를 맞닥뜨리고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나자 폭력으로 해결할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저녁이 되자 또 누군가 찾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표운은 아니었다. 천살이 명상을 멈추고 일어서서 모옥문을 열었다. 천살의 모든 예상을 벗어나서 밖에 연화훈이 서있었다.
"어찌된 일이냐? 네가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것이냐?"
연화훈은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했다.
"존주, 고일과 왕쌍말을 죽인 흉수를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나와 존주를 찾아온 것입니다."
천살은 연화훈의 말에 고일과 왕쌍말의 복수도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복수만 생각하고 둘은 잊고 있었는데 연화훈 덕분에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존주의 부인인 한화령이 외도를 하다가 둘에게 들켜서 독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둘은 한화령에게 인사를 올리다가 머리를 숙인 상태에서 무방비로 목덜미가 당한 것입니다."
연화훈은 한화령이 외도를 들키자 직접 둘을 찾아갔고 인사를 올리는 둘을 급습해서 독으로 죽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을 한화령의 시비에게서 들었다고 말했다.
"한화령이 고일을 죽이는 장면이 시비에게 목격되었고 한화령은 그 시비도 죽여서 입막음을 했습니다. 그 죽은 시비와 사이가 좋던 시비가 모든 사실을 알아내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한화령은 임신한 몸으로 교주를 따라다니다 거동이 불편해져서 명화교가 마련한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연화훈이 천살에게 한화령의 은신처를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천살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뱃속의 죄없는 아이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기 때문이다.
"아직 복수의 때가 아닌 듯 하다. 나와 함께 있으면 너도 위험하니 어서 몸을 숨기고 내가 복수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거라."
"알겠습니다. 급히 달려오느라 목이 마른데 물 한잔만 주십시오."
천살은 손수 물을 대접에 부어서 연화훈에게 건넸다. 연화훈은 도망오느라 체력이 다 소진되었는지 대접을 받아들고 몸을 휘청거렸다. 천살이 손을 내밀어 부축하자 연화훈은 한손으로 대접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천살의 팔을 잡았다.
"으아아악!"
연화훈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연화훈의 손에 낀 반지의 독침이 천살의 호신강기를 뚫지 못하고 발각되었다. 천살이 연화훈의 손목을 거세게 거머쥐자 연화훈은 통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천살은 모옥의 문을 닫은 후 연화훈의 사지를 부러뜨렸다. 혀를 깨물지 못하게 이빨을 다 부숴버린 후 아혈을 풀어주었다.
"내가 듣기에 말이 안된다 싶으면 네 뼈마디 하나씩 부러뜨릴 것이다. 고통없이 편하게 죽고 싶으면 아는 것을 그대로 말하거라."
한화령은 천살과 혼인을 했지만 합방을 하지 못했다. 남녀지사에 왕성한 호기심이 생긴 한화령은 은밀한 취미가 생겼다. 바로 하인과 하녀들의 정사를 훔쳐보는 것이다. 그러다 하루는 고일과 하녀의 정사를 훔쳐보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고일은 훔쳐보는 자가 있자 대노하여 뛰쳐나갔다. 하지만 상대가 한화령인 것을 확인하고 급히 머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한화령은 수치심과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에 낀 반지의 독침을 뽑아 고일의 목덜미에 꽂았다.
고일과 잠자리를 하던 하녀도 목을 졸라 죽인 뒤 고일의 시체는 침대에 눕히고 하녀의 시체는 화골산으로 없애버렸다. 고일의 시체까지 사라지면 더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에 남겨둔 것이다. 화골산의 양이 부족한 것도 있었고 말이다.
한화령이 하녀의 시체를 화골산으로 없애는 장면을 목격한 다른 하녀가 있었다. 왕쌍말의 조사과정에서 부자연스러운 태도가 들켰고 끊임없는 추궁하에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왕쌍말은 한화령이 하녀를 죽인것이 고일을 죽인것을 들키지 않기 위한 입막음이라 생각하고 증거를 찾으려고 했다.
왕쌍말은 연화훈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연화훈에게 고일을 죽인 흉수를 찾아냈고 증거까지 확보했다고 거짓으로 자랑했다. 연화훈이 교주가 심은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기에 한 행동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왕쌍말 역시 한화령에게 목숨을 잃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연화훈의 뼈 하나가 부러졌다.
"한화령은 그날 아침 일찍 저택을 나갔다. 왕쌍말을 죽인자는 따로 있을 것이다. 한번만 더 거짓말을 하면 이번에는 뼈 두개를 부러뜨린다."
연화훈은 이빨이 모두 빠져 말이 줄줄 샜다. 그래서 비명소리도 처녀귀신이 우는 소리처럼 을씨년스러웠다.
"한화령이 이 독반지를 주면서 왕쌍말을 죽이라 명했습니다. 저는 그저 명에 따른 죄밖에 없습니다."
고일을 죽인 후 한화령의 마음은 불안으로 가득차 있었다. 고일을 죽였다고 해서 한화령에게 해코지를 할 사람은 없다. 다만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인것과 그 죽인 이유가 부끄러운 이유이기에 마음에 불안함을 느낀 것이다. 그러다 장현성과 눈이 맞아 외도를 하게 되었다.
왕쌍말이 눈치를 챈것 같다는 말에 한화령은 연화훈에게 왕쌍말을 제거하라 명하고 자신의 독반지를 건넸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자신을 불안하게 하는 사도를 떠나 장현성과 함께 지냈던 것이다. 이빨이 빠져 발음이 줄줄 샜지만 연화훈은 용케 사실의 전말을 천살에게 전달했다.
"그럼 네가 한화령의 은신처를 알고 있다는 것도 유인책이겠구나. 왕쌍말을 대신해 너에게 충분한 고통을 주고 싶지만 약속을 지키겠다. 편한 죽음에 감사해라."
연화훈의 목을 부러뜨린 천살은 연화훈의 시체를 밖으로 내다 버렸다. 중원의 풍습상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것을 매우 큰 불행으로 여긴다. 명화교가 화장을 고집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시체가 황야에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다.
한선후는 초조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렸다. 한화령을 미끼로 함정을 파고 천살이 빠져들기를 기대한다. 연화훈이 제대로 해낼 수 있기를 기대하며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수하가 서신을 들고 들어오자 경공을 사용해 수하의 서신을 낚아챘다.
'실패, 연화훈 사망. 천살 미동(未動 - 움직이지 않음)'
한선후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어리자 한화령은 풀썩 주저앉았다. 무림맹에서 천살에 대한 미인계가 실패했다는 서신이 왔다. 실패의 이유가 한화령이 살아있는 한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것이다. 서신에는 어떠한 요구사항도 없었지만 무엇을 원하는지는 명약관화였다.
한선후가 성정이 냉혹하고 딸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필경 피로 이어진 부녀사이이다. 딸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한화령을 미끼로 하는 함정을 파고 연화훈을 보내 천살을 함정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하지만 천살이 걸려들지 않자 연화훈은 독침으로 천살을 살해하려 시도했고 결국 실패했다.
"장현성, 네가 보내주거라."
교주의 말에 장현성은 망설였다. 교주가 자신을 시험하는 것인지 진심인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화령의 뱃속에는 자신의 아이가 있다. 첫 관계를 가졌을 때 한화령이 처녀임을 확인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으로 장현성의 망설임이 길어지자 교주는 고삼에게 명했다.
"고삼, 네가 한화령의 목을 잘라라."
흐리멍텅한 눈을 한 고삼은 허리춤의 음혈을 뽑아들었다. 교주는 검법보다는 장법위주로 무공을 익혔기에 천살의 음혈을 고삼에게 주었다. 고삼의 검은 실용적이나 외형이 투박해 자신의 체면이 구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화령은 소리를 내어 애걸하지도 못했다. 그저 한선후와 장현성을 번갈아보며 애원의 눈빛만 보낼 뿐이다. 한선후는 한화령의 눈길을 담담하게 받아냈고 장현성은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고삼의 음혈이 목을 베는 순간 한화령은 문득 천살이 생각났다.
"소금상자에 담아 무림맹으로 보내거라."
천살을 유혹하여 동자신을 깨뜨리는데 실패한 남궁청아는 천살과의 대화를 그대로 옮겼다. 그리고 천살의 마음속에 다른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이 한화령은 아닌 것 같다는 사견도 덧붙였다. 그 덕분에 한화령은 목을 베이였고 또 다른 한 여인의 운명이 큰 변환점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화령의 목이 무림맹에 도착한 것과 거의 동시에 두명의 손님이 무림맹을 방문했다. 젊은 한쌍의 남녀는 누가 봐도 천상의 배필이라고 칭할 만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사형과 사매의 사이일 뿐이다.
"화산의 제자 조자운이 원각대사와 무림의 여러 명숙께 인사를 올립니다."
"화산의 호매령입니다. 천살에게 복수할 기회가 있다고 하여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부친을 상하게 한 복수를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 작가의말
고일, 고삼, 왕소이의 이름만 보면 없는 집안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첩자가 있다면 자신의 이름을 연패라고 댄 연화훈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입니다.
연화훈이 죽은 후 시체를 밖에 버리는 것으로 더 큰 복수를 표현했습니다. 시체가 땅에 묻히지 못하는게 뭐 그리 대단하냐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저때는 시체가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것, 시체가 완전하지 못하는 것 모두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팔다리가 잘려서 찾지 못하면 나무로 가짜 팔다리라도 만들어서 관에 넣는것이 저때 풍습입니다.
복수는 언제든 이루어집니다. 고일을 죽인 한화령이 고삼의 손에 음혈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주인공이 직접 복수를 하는것을 원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가해자가 상응한 벌을 받는 것만으로도 복수는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결국에는 놓치는게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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