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초개
화음현에 도착한 후 깊게 잠든 천사성을 깨웠다. 황급히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부끄러워하는 천사성의 모습을 보니 도저히 천살마성이 깃든 아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제 대련임에도 불구하고 검에 필살의 의지를 담던 천사성의 모습을 생각하니 천진난만한 아이로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천사성을 옥녀봉으로 올려보낸 후 서장로와 호군천은 연화봉으로 향했다. 천사성을 다음 장문인으로 정하든지 호매령과 혼인 시키든지 아니면 서장로의 제자로 삼든지 셋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호군천은 세번째에 마음을 두고 있고 서장로는 첫번째에 마음을 두고 있다.
마침 오전 수련을 마친 호매령이 돌아와 안부인사를 올렸다.
"태상장로님을 오랜만에 뵙습니다. 가끔 오셔서 무공도 봐주시고 제가 하는 요리도 맛보세요."
"매령이가 벌써 요리도 할줄 아느냐, 그럼 오늘 한번 솜씨를 부려볼테냐?"
"그럼 무슨 재료가 있는지 살펴보고 올게요. 제 덕분에 요즘 부친이 살쪘거든요."
"근데 매령이 혹시 천사성이란 아이가 기억나느냐? 효자봉에 있다가 옥녀봉으로 옮겨간 그 아이 말이다."
"네, 글공부를 잘하는 그분 말씀이시지요.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네 짝으로 어떻다고 생각하느냐?"
서장로의 질문에 호매령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호매령은 눈을 치켜뜨고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싫어요. 저는 평생 부친을 모시고 살 거예요."
말을 마친 호매령은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나갔다.
"제가 애지중지 키워서 애가 좀 버릇없습니다. 태상장로님과 대화중에 저런 결례를 범하다니. 나중에 제가 단단히 혼내겠습니다."
"장문인은 괘념치 마시오. 내가 먼저 실수를 했지 않소. 그나저나 매령이가 천사성을 저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소."
"저도 매령이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것은 처음 봤습니다. 어지간히도 싫은가 봅니다."
"하긴 두눈에 마기가 가득차 광기를 부리는 모습을 직접 보았을 테니 어찌 두렵지 않겠소. 그럼 두번째 방안은 지우고 첫번째나 세번째만 고민하기로 하기오."
서장로와 호군천은 호매령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두번째 방안은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식사하는 내내 호매령의 얼굴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지지 않자 서장로는 죄지은 기분이었다.
이튿날부터 천사성은 화산의 제자가 되기 위한 수련을 시작했다. 매일 새벽 일어나서 우선 동자공을 수련한다. 동자공의 수련이 끝나면 물지게를 지고 산아래로 물을 길으러 간다. 원래는 아노가 하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천사성의 일이 되었다.
물지게를 들고 천천히 오르는 것이 아니라 뛰어서 내려가 뛰어서 올라와야 한다. 물을 다 길어놓은 후 장작패기를 한다. 장작을 다 패고나면 매화장(梅花樁)을 수련했다. 매화장은 바닥에 나무말뚝을 박아놓고 그 말뚝들을 밟으며 보법과 권법을 수련하는 방식이다.
매화 꽃잎은 대부분 다섯개로 이루어졌다. 매화장도 수십개의 말뚝으로 이루어졌는데 다섯개가 하나의 기본단위가 된다. 그래서 이름을 매화장이라고 지었다. 하체의 수련에 최고의 효과를 보이는 수련방식으로 단계가 올라갈수록 말뚝의 높이가 높아지고 지름이 작아진다.
점심을 먹고 오후가 되면 오전의 일정을 거꾸로 하면 된다. 매화장을 연습한 뒤 장작을 패고 그다음 물을 긷고 동자공을 수련하면 끝이다. 동자공의 수련이 끝나고 서장로가 떠나면 천사성은 홀로 무공검법을 수련했다. 적합한 수련방법을 고안해내어 예전보다 수련효과가 훨씬 좋아졌다.
가끔 호매령의 시녀인 연화가 찾아와서 해진 옷을 기워주고 새옷도 만들어 주었다. 오전 수련을 끝내고 쉬고 있는 천사성에게 연화가 말을 걸었다.
"천공자, 천공자는 매령아씨를 어떻게 생각해요?"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요."
"우리 매령아씨는 천공자를 자주 언급하는데 천공자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니. 매령아씨가 알면 참으로 슬프겠어요."
"연화소저가 말하지 않으면 알 방도가 없잖습니까."
"어차피 천공자는 매령아씨를 신경쓰지 않으니 내가 말하든 말든 상관없지 않나요?"
"혹시 매령소저가 듣고 기분 나빠할까봐 그러는거죠.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연화의 공격을 피하는 방법은 무공검법에도 없었다. 천사성은 연화를 피해서 시원한 그늘을 포기했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연화의 웃음소리가 얄밉기 그지 없었다.
"매령아씨, 오늘 옥녀봉에 갔는데 천공자가 매령아씨의 안부를 묻더군요."
"저랑 얼굴 본게 두세번인데 제 안부는 왜 묻는대요?"
"뭐, 매령아씨가 싫어서 물어보는 거겠죠. 매령아씨가 아프다는 소식이라도 들으면 기뻐할려구요."
"연화언니, 자꾸 장난치면 모른척 할 거예요."
"알았어요. 천공자도 저랑 할말이 없으니 매령소저 안부를 물은거겠죠. 설마 두세번밖에 못봤는데 천공자가 매령소저를 연모하기라도 할까요?"
매령의 빨개진 얼굴을 보며 연화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호매령과 천사성을 맺어주면 조자운도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자운이 한없이 미웠지만 가끔 사무치게 그립기도 하다. 그럴때마다 연화는 조자운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천사성은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매화장을 수련하다가 떨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일년씩 수련해야 다음단계로 넘어간다는데 천사성은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벌써 세번이나 말뚝을 바꿨다.
어제 연화가 다녀가면서 호매령의 이야기를 잔뜩 했다. 매화장을 수련하는 도중 호매령 생각을 하다가 그만 매화장에서 떨어졌다. 다시 마음을 다잡은 천사성은 매화장에 올라가 수련을 계속했다.
호매령은 왼손 중지를 입안에 넣었다. 어제 옥녀봉을 다녀온 연화는 천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가득 해줬다. 바느질을 하며 연화가 해준 이야기를 회상하다가 바늘에 손가락이 찔렸다. 입안에서 꺼낸 중지에서 피가 멎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바느질에 집중했다.
"자운아, 그간 잘 지냈어?"
운대봉의 조사동은 화산파 제자들에게 금지이다. 장문인의 허락이 없이는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 하지만 연화는 화산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끔 남들의 눈을 피해 옷이나 먹을것을 조자운에게 가져다 주었다.
조사동에서 매일 반찬도 없이 만두로만 끼니를 때우는 조자운에게 연화가 가져다준 음식들은 산해진미와 다름이 없었다. 조자운은 젓가락으로 음식을 허겁지겁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매일 자고 밥먹고 무공수련하고 세가지밖에 없다. 잘지내고 못지내고가 어디 있겠냐."
"올해 제자들을 받을 때 천공자도 화산의 제자로 받아들인대. 그것때문에 지금 화산의 제자들이 의논이 분분해."
"천공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뭐 그리 의논할 거리가 된다고 그래? 설마 천공자가 천살성이라는 것이 소문난거야?"
"소문에 의하면 장문인의 제자 아니면 서장로님의 제자로 들어갈 것이라던데."
조자운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화산파의 문규상 장문인의 제자들은 모두 다음대 장문인이 될 자격을 가지고 있다. 만약 장문인의 사형제가 들인 제자의 자질이 출중해 다음대 장문인으로 내정될 경우 원래 사부와 사제의 연을 끊고 장문인의 제자로 들어간다.
"사부의 제자로 들어가면 다음대 장문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서장로님의 제자로 들어간다면 사부보다 배분이 하나 높으니 바로 장로가 된다는 뜻이구나."
연화는 사실 저 소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조자운의 말을 듣고 나서야 그 의미를 이해하고 깜짝 놀랐다. 연화가 원하는 것은 화산파 장문인이 될 조자운이지 그저 조자운이 아니다.
"서장로님의 제자가 되는게 너한테는 좋은거지?"
"태상장로님의 제자로 들어간다면 나를 다음 장문으로 생각하는 것이지. 다만 나는 장문이 된 후 천공자를 태상장로님이라고 불러야겠지."
조자운의 어조는 평이했다. 조사동에 갇혀서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사부님이나 태상장로님이나 뭔가 생각이 있어서 천사성을 거뒀을 것이다. 자신의 알량한 질투심때문에 두분의 계획을 망칠뻔 했다. 이제 더이상 개인의 감정으로 화산에 누를 끼치면 안된다.
"만약 천공자와 매령이 혼인을 한다면 어떻게 되는거야?"
"그럼 천공자는 장문인의 제자가 되어야겠지. 태상장로님의 제자가 된다면 매령의 조사가 되니 배분의 차이로 혼인을 하면 인륜을 어기는 것이 되어버리지."
"그럼 천공자가 서장로님의 제자가 되는게 너한테는 좋은거 아냐? 그럼 넌 장문인이 되고 매령이와 혼인할수도 있잖아."
"매령이와 나는 친형매와 같은 사이야. 여기에 와서야 절실히 깨달았어. 나는 매령이를 여자로 좋아한게 아니라 여동생으로 아낀거야. 천공자는 처음부터 거슬렸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어."
조자운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 천사성을 질투한 것은 매령이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동에서 지내면서 호매령에 대한 감정은 철저히 식어버렸다. 호매령과 혼인하고 화산의 장문인이 되는것은 더이상 조자운의 꿈이 아니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되는 것이 조자운의 꿈이 되었다.
"천공자가 장문인의 제자가 되고 매령이와 혼인하면 너는 화산에서 발붙이고 살 수 없는거 아니야?"
"아니야, 천공자와 매령이가 혼인한다는 것은 천공자에게 장문인의 자리를 넘기지 않는다는 뜻이야. 한명에게 모든 권력이 몰리면 어떤 파탄이 일지 몰라. 지금도 태상장로님이 사부를 적절히 견제해주는 것처럼 균형이 중요해."
"만약 둘이 결혼을 하면 나나 단사제가 장문인이 되겠지. 나일 가능성이 더 높기는 하지만 말이야."
연화는 조자운과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정리를 했다. 연화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지만 이해력이나 통찰력은 매우 부족하다. 조자운과의 대화를 다 정리해보니 천사성이 장문인의 제자가 되어 호매령과 혼인하는 것이 연화에게 가장 좋은 결과이다.
그러면 조자운이 장문인이 될 가능성이 높고 자신은 장문인이 된 조자운과 혼인할 수 있다. 호매령과 천사성이 혼인할 수 있도록 자신이 좀더 힘써야 겠다고 다짐하는데 조자운이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너 내가 한 말을 다른 화산제자들한테 하면 안돼."
"어차피 너랑 매령이 빼고 대화할 사람도 없어. 제자들은 매령이만 쳐다보느라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너도 충분히 이쁜데 뭘."
"왜 갑자기 헛소리 하고 그러는거야!"
벌떡 일어난 연화는 그릇과 젓가락을 주섬주섬 거둔 후 작별인사도 없이 돌아서 나가버렸다. 조자운은 이해가 안가 머리를 긁적였다.
"내 말이 얼굴이 뻘개질 정도로 화낼 이야기인가?"
연화는 조사동을 나와 운대봉을 내려가면서 얼굴의 열기를 식혔다. 그러다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현재 화산에서 결혼을 안한 여자는 자신과 매령 뿐이다. 그러면 저 수많은 화산제자들은 서장로님처럼 평생 혼자 살아야 하는 것인가?
- 작가의말
情竇初開, 남녀사이의 사랑에 눈을 뜨다. 풋사랑과 비슷한 뜻입니다.
서장로는 평생 홀로 지냈고 호군천은 중매결혼으로 이쁜 처자와 결혼했지만 몇년뒤에 사별했습니다. 조자운은 호군천의 많은것을 물려받은 수제자이며 서장로를 우상으로 생각합니다. 연화는 철들어서부터 화산에서만 살았습니다. 밖의 세상이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도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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