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간죽
"사부님, 함께 하산했던 사형제들과 사숙들은 전부 정체불명의 자들에게 공격당했습니다. 사숙들이 크게 반항하지 못하고 점혈되는 것을 보면 준비를 단단히 한 것 같습니다."
지금쯤 서안에 도착했어야 할 단손경이 갑자기 나타나 호군천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하는 말을 했다. 항상 깔끔한 용모를 유지하는 단손경이었지만 옷이 땀에 푹 절어있다. 화산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도포와 비슷한 옷은 검인지 도인지 모를 날카로운 병장기에 의해 여기저기 찢겨져 있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단손경은 검도 버리고 도망왔다. 호군천은 단손경에게 쉬라고 명하고는 급히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제자 한명을 서창훈에게 보냈다. 화산을 적대하는 무리들이 하산한 제자들을 공격하고 곧바로 화산으로 향할 것 같다고 전하게 했다.
급히 도착한 서창훈이 단손경에게 이것저것 캐물었지만 알아낸 것이 전혀 없다. 사숙이 몇합 버티지 못하고 점혈당하는 것을 보고 단손경은 곧바로 몸을 돌려 도망을 쳤다. 함께 도망친 제자들이 여럿이지만 단손경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화산에 도착한 제자는 없다.
그러나 서창훈과 호군천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연화봉의 아래에 수많은 횃불들이 밝혀지더니 길게 늘어서서 올라오고 있었다. 상대는 굳이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 하다.
"태상장로님, 기습을 시도해 볼까요?"
호군천의 말에 서창훈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렇게 대놓고 올라온다는 것은 무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들을 인질로 삼았기에 화산파가 도망을 칠 걱정도 없는 것이다. 호군천은 어린 나이에 장문인이 되어 강호경험이 부족해 위협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하다. 다만 문파의 경영에는 재능이 있어서 지금까지 장문인의 역할을 잘 해냈다.
"강적이네. 무공을 모르는 자들까지 전부 연무장에 집합시키게."
호군천은 화산의 제자들을 모두 연무장에 모이게 했다. 연무장에 횃불을 밝혀놓고 불청객의 방문을 기다렸다. 상대도 연무장에 밝혀진 횃불을 보고 헤매지 않고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숫자를 헤아리던 호군천의 심정은 암담해졌다. 단손경을 제외하고 하산한 모든 제자들이 포로가 되어 연무장 반대편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 옆에는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자들이 짧은 도를 들고 서있었다. 여차하면 목을 베어버릴 정도로 살기를 풀풀 풍겼다.
천살과 선우복명 그리고 다섯 제자와 함께 가장 마지막으로 연무장에 발을 들인 사도무천은 감개가 무량했다. 꿈속에서는 몇번이고 밟아본 연무장인지 모른다. 하지만 항상 그 연무장이 불타면서 악몽이 되곤 했다. 수십년간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던 연무장에 다시 돌아오니 가슴이 벅차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어이, 서씨, 그간 발 뻗고 편하게 지내셨소?"
서창훈의 눈이 커졌다.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서창훈이지만 너무 의외의 상황이라 놀라움을 금치 못한 것이다. 거기에 상황이 예상했던 모든 경우보다 훨씬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그래서 서창훈은 미처 사도무천이 중간이 아닌 옆에 서있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유천, 무슨 낯짝으로 화산의 땅에 기어들어온 것이냐? 기사멸조의 죄를 범하고도 낯짝을 들고 다닐 수 있었더냐?"
사도는 조유천의 모친의 성씨이다. 명화교에 투신하면서 성을 바꾸고 이름도 무천으로 바꾸었다. 하늘이 눈을 뜨고 있다면 권파의 제자들이 그렇게 무참하게 살해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유천은 서창훈의 질타에 가벼운 웃음으로 대응한 뒤 천살에게 말했다.
"소교주께서도 회포를 나누시지요."
"서장로, 호장문, 오랜만에 뵙습니다. 명화교 소교주 천살이라고 합니다. 몇년간 먹여주고 재워준 은혜에 보답하려고 화산을 특별히 찾았습니다."
그제야 천살을 발견한 서창훈과 호군천은 상황의 엄중성을 확실하게 느꼈다. 조유천과의 앙금은 화산파 내부의 일이다. 포로된 화산제자들의 목숨을 구할 가능성이 어느정도 존재한다. 하지만 마교가 개입되었다면 희망이 사라진다. 그리고 몇년간 애타게 찾다가 마교로 투신한 게 확인된 천살이 소교주의 이름으로 복수를 천명하며 화산에 나타났다.
사실 천살이라는 자가 마교의 소교주가 되었다는 정보는 무림맹의 수뇌부에 전달되었다. 하지만 송백자가 특급정보로 지정하면서 외부유출을 막았기에 화산에서는 미처 그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것이다. 장로 한명만 무림맹에 보내두었기에 무림맹에 대한 영향력이나 정보를 얻는 능력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천공자가 소교주가 된 것을 축하드리오. 화산에 은혜를 입은 줄 알면 보답할 궁리부터 하는게 인간의 도리가 아니겠소? 병장기를 들고 찾아오는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소."
호군천의 말에 천살은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 은혜를 갚으려는데 화산의 여러분이 거절할까 걱정되어 조금 과격한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화산의 모든 분들에게 화산이 저에게 베푼 은혜를 똑같이 갚아드리려는 것입니다. 순순히 따른다면 피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화산의 제자들을 몇년이고 가두겠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화산의 대부분 제자들과 사도무천의 수하들은 천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서창훈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화산이 너에게 은혜는 없다고 쳐도 너에게 잘못한 것도 없다. 마교의 종자와 도리를 따지고 싶지는 않지만 네 더러운 심보를 잘 살펴보거라."
천살의 어투는 여전히 공손했다. 일말의 적대감도 느낄 수 없었다.
"서장로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화산의 여러분들을 모셔다가 잘 먹이고 잘 입힐 작정입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편하게 눈을 감을 때까지 명화교가 여러분을 돌봐드리겠습니다."
천살과 말을 더 섞으면 화산이 마교에서 사정을 봐달라고 애원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래서 호군천은 검을 뽑아들고 천살에게 도전장을 보냈다.
"내가 사형제중 무공이 제일 부족하여 모두를 위해 희생하라는 의미에서 장문직을 맡았소. 마교는 무공이 강한자를 우두머리로 뽑는다 들었는데 소교주면 마교에서 두번째로 강하겠군. 감히 무명소졸이 마교의 소교주께 도전장을 내밀어 보겠소."
호군천은 자신을 낮추고 천살을 높임으로 조유천과 마교장로로 보이는 고수가 개입할 명분을 막아버렸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교주의 체면을 불구하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호장문의 미덕은 강호에 널리 알려저서 귀가 어두운 이 천모도 얻어들었습니다. 무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 호장문은 낙심하지 마시고 지금처럼 씩씩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개자식은 혓바닥으로 소교주의 자리를 얻어낸 것인가?'
호군천은 천살의 대답에 부아가 치밀었다. 천살의 말투는 시종일관 공손했지만 말속에는 항상 뼈를 담고 있다. 마음의 수양이 부족하다 느낀적은 없었지만 천살과 몇마디 대화를 나누니 화가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 마음이 격동하기 시작했다.
"조유천, 설마 조석성옥을 사용한 것이냐?"
화산에는 금지된 술법 하나가 존재한다. 조석성옥(雕石成玉)은 이름 그대로 돌을 잘 깍아서 옥처럼 귀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나이가 많은 고수가 자신의 내공을 희생해서 어린 제자의 혈도들을 타통해주는 방식이다. 몇번으로 나눠서 할수 있는것이 아니라 한번에 끝내야 하기에 극도로 위험한 술법이다.
내공은 사용하고 나면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조석성옥은 전신 혈도를 외부에서 대신 타통해주는 것이고 한번에 끝내야 하기에 내공을 바닥까지 끌어다 써야 한다. 만약 조석성옥을 끝내지 못하면 피시술자는 죽음에 이른다. 그렇기에 시술자는 진원까지 바닥바닥 긁어서 시술을 성공시킨다.
설사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시술자는 내공을 무리하게 운용하였기에 목숨이 위태롭고 설사 목숨을 보전한다고 하더라도 내공을 회복하는데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다. 시술과정에 손상을 입은 단전과 혈도가 자연치유되기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산이 강호에서 어느정도 지위를 확보하자 금지되었다.
서창훈은 천살의 경지가 조유천보다 더 높은것을 확인하고 질문을 한 것이다. 동시에 호군천이 천살을 경시하지 못하게 주의를 주려는 목적도 있다. 호군천은 무공에 대한 자질이 부족해 매화검을 오래 수련했지만 자하신공의 수련은 매우 빠른 성과를 보였다. 웅혼한 내공 덕분에 초식이 평범한 매화검으로도 강한 위력을 내기에 쉽게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화산의 장문인이 스물정도 된 마교의 소교주와의 대결에서 실수라도 하면 화산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전음으로 조심하라고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것이 뻔하니 조유천에게 질문하는 형태로 깨우쳐준 것이다.
"서씨도 노안이 된 모양이군. 이 몸의 경지가 서씨보다는 못하지만 강호에서 눈높이를 맞출 자가 몇이나 되겠소."
조석성옥으로 고수가 쉽게 된 제자는 무공초식이 서툴러서 대성하기까지 십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조석성옥을 거치지 않고 지금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천살의 초식도 무시할 수 없다. 호군천은 서창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억지로 가슴속의 화를 눌렀다.
소교주가 된 후 천살은 음혈의 무늬를 가리는 약물을 씻어버렸다. 약할 때는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적의 방심을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러 이빨과 발톱을 자랑하며 허세라도 부려야 할 때이다. 소교주의 지위에 알맞는 강함을 보여줘야 쉽게 보지 못하고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호군천은 자운검을 들었다. 정식 이름은 청하자운검(靑霞紫雲劍)이다. 몇가지 철을 섞어서 만든 보검으로 푸른 검신에 자색의 무늬가 나있다. 평소에는 편하게 자운검이라고 부르며 대대로 화산의 장문인이 사용하는 장문검이다.
호군천과 대결하는 천살은 불편함을 느꼈다. 분명 천살도 배운 매화검이고 무공서도 여러번 읽어보았다. 검의를 더 확실히 느끼기 위해 수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호군천의 매화검은 천살이 알고있는 매화검과 달랐다. 아예 다르면 모르겠는데 조금씩 다르니 차라리 낯선 무공을 상대하는게 더 편할 것 같았다.
호군천은 남지독화(南枝獨花)의 초식을 사용했다. 겨울에 피어나는 매화에 감탄하여 모든 나무가 앙상한데 남쪽 가지에만 꽃이 피는구나 라며 매화를 칭송한 시구로 명명한 초식이다. 검첨이 내공의 힘으로 검화(劍花)를 피워내는데 그중에 하나만 실초이고 나머지는 전부 허초이다.
하지만 천살은 허초속에 실초를 숨기는 정도밖에 하지 못하지만 호군천은 허허실실의 경지를 이루었다. 수많은 검의꽃은 전부 실초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전부 허초가 될 수도 있다. 허가 실이 되고 실이 허가 되는 것이 가능한 경지인 것이다. 이는 깨달음의 경지가 아니라 초식이 뼈에 새겨질 정도로 수련하면서 익해낸 경지이기에 천살이 아무리 내공의 제약이 없다고 해도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살은 매화검의 초식으로 응수할까 하다가 필승을 장담할 수 있을 때 사용하기로 하고 사진군에게서 훔쳐배운 회피초식을 운용했다. 사진군의 초식의 이름을 모르기에 천살은 낙화유수(落花流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꽃잎은 때가 되면 떨어지고 물은 가능하면 항상 흐르려 한다. 명현공과 결합하여 만든 회피초식은 상대의 초식을 분석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대의 공격에 반응하여 몸이 알아서 피하는 방식이다. 사진군의 회피초식은 본인의 의사가 어느정도 반영되지만 천살의 회피초식은 나몰라라 하며 초식에 모든것을 맡겨버리는 무책임한 초식이다.
천살을 향해 짓쳐들어오던 매화를 닮은 검의꽃은 낙화가 되어 유수에 쓸려갔다. 천살의 움직임이 정교하지 못하자 영약 따위로 내공의 경지를 강제로 끌어올렸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정묘하기 그지없는 회피초식을 사용하자 호군천은 천살에 대한 평가를 상향시켰다.
- 작가의말
梅花間竹, 매화만 그리면 그림이 심심하니 중간중간 대나무를 그려줍니다. 일종의 그림을 구성하는 동양화의 방식입니다. 여기서는 매화검에 다른 초식을 섞는 호군천의 별호입니다.
다음편부터 사도무천의 이름이 조유천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번 편 천살과 호군천의 대화, 사이다 축에 낄 수 있나요? 좀 더 악에 받쳐 험한 말을 해야 하는지 의견을 구합니다. 통계가 끝난 후에 관련 댓글을 지울 것이니 댓글수가 천을 넘을까 걱정하실 필요 없이 마음껏 의견을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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