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몰카천마
백화점 주인이 되자 초영란은 곧 이사를 했다. 이사는 사외이사 초선이 책임졌다. 천마도 이참에 가족들과 같이 지내기 위해 숙소에서 나왔다. 숙소를 나가는 천마를 세 사람은 눈물을 머금고 환송했다. 네 남자가 방 하나에서 비벼자던 나날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며칠의 시간이 지나자 초영란은 이 모든게 꿈이나 몰카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백화점을 건네받을 때까지만 해도 아들인 천마가 아이돌이자 한류스타이기에 방송국에서 몰카를 찍는 것이라고 추측했다. 천마가 방송컨셉 때문에 일부러 옷을 허줄하게 입고 나온 것이라 상상했다.
그래서 내내 기쁜 기색을 전혀 내지 않고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숨겨져 있을 카메라를 의식해 고개 각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했고 품위있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 소리도 없자 드디어 몰카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노출된 옷을 입고 집안 곳곳을 활보해도 뛰쳐나와 제지하는 제작진이 없었다. 티비를 성인채널에 고정시켜 놓았는데도 아무 조치 없었다. 그제야 실감이 난 초영란은 몰래 욕실에서 펑펑 울었다.
천마가 겨우 잡은 행사때문에 밖으로 나가고 초영란과 초선만 집에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초선이 쪼르르 달려가자 걱정된 초영란이 질문했다.
"우리딸, 모르는 아저씨가 사탕 주면서 따라오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탕만 받고 냅따 튀라고 했어요."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티가 풀풀 나는 모범답안에 초영란은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어떤 악조건에서도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찾아내야 한다. 초영란을 키워준 할아버지 초화규가 남긴 가훈이다.
화면에 검은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에 이어폰까지 풀장착한 사내가 보이자 초선은 깜짝 놀랐다. 보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엄마, 닌자가 우리집 찾아왔어요."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대천그룹 경호1팀의 팀장 변절자라고 합니다. 사모님을 정중히 모셔오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누구의 지시를 받았나요? 나는 들은게 전혀 없는데요."
그때 초영란의 전화가 울렸다. 변절자는 전화를 받아보라는 시늉을 했다. 낯선 번호를 잘 받지 않는 초영란이지만 한번 받아보기로 했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대천 그룹 회장실 비서팀 팀장 화운입니다. 제 약간의 계산착오로 인해 경호팀의 도착보다 조금 늦게 전화를 드렸군요.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저희 대천그룹의 천리마 회장과 회장 사모님께서 초영란여사님을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밖의 경호팀이 안전하게 모실 겁니다."
초영란은 그제야 깨달았다. 어느 방송사인지 몰라도 스케일을 참 크게 잡았다. 백화점 부분은 그저 프롤로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부분에서 분량을 뽑아낼 생각은 포기하고 초영란을 안심시킨 후 이제야 진정한 몰카를 시작하는 것이다. 비록 립싱크 댄스가수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초영란은 연기모드로 들어갔다.
"대천그룹이면 재계 일위의 그룹 아닌가요. 평판도 아주 좋은 천리마 회장님의 부름이니 당연히 응해야지요."
'천리마 회장의 외동아들이 나이 마흔이 넘는데도 장가를 가지 않았다지? 남자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있다던데. 몰카니까 비슷한 나이대의 대역을 사용했을거야. 천리마 회장과 사모님은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대역을 쓰기 어려우니 아마 대천그룹의 유일 후계자라며 사십대의 남자가 접근해 올거야.'
난생 처음 타보는 리무진 안에서도 초영란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초선은 이것저것 열어보고 싶었지만 엄마의 눈치가 보여서 꾹 참았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싶은걸 참느라 허벅지를 몇번이나 꼬집었다.
한편 행사를 마친 천마와 아이들은 고추와 옥수수 그리고 감자를 반포대씩 짊어지고 서창훈의 봉고차로 옮겼다. 서창훈은 운동하다가 다친 부상때문에 힘든일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함을 금치 못했다.
"형, 그런데 이거 다 실으면 우리 중 한명이 내려야겠는데요. 무게나 부피가 딱 한사람 사이즈예요."
말이 씨가 됐다. 커다란 리무진이 일행의 앞에 멈추더니 검은 복장에 검은 선글라스 그리고 이어폰을 장착한 자들이 우르르 내렸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저는 대천그룹 경호0팀의 팀장 고려삼이라고 합니다. 회장님의 지시로 도련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지요."
초영란을 실은 리무진은 천리마회장의 커다란 저택으로 스며들었다. 팀장 변절자는 초영란과 초선을 정중하게 안내했다. 초영란의 예상대로 들어간 곳에는 잘생긴 남자 한명만 자리하고 있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보였다. 그리고 웬지 낯설지 않았다.
"엄마, 혹시 오빠 분장한거 아냐?"
초선도 뭔가 눈치를 챈 듯 귓속말을 전해왔다.
"바보 딸내미야, 이 어미가 내 자식도 못 알아볼까봐. 몰카 찍으려고 일부러 네 오빠랑 비슷한 사람 찾아온거지. 여기저기 숨겨진 카메라가 많을테니 표정관리 조심."
초선에게 작은 소리로 신신당부한 후 초영란은 모델걸음으로 걸어서 남자의 맞은편에 착석했다. 천치는 미모의 여자가 몸을 배배 꼬며 걸어와서 자신의 앞에 앉자 그제야 반응했다.
'몸이 어디 불편한가 보구나. 괜찮은 여자 같은데 참 안됐다.'
"혹시 대천그룹의 유일 후계자이신가요?"
"맞습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천치라고 합니다."
비록 십수년을 집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 받은 교육의 위력은 대단했다. 멍해있던 눈에 총기가 돌아오고 얼굴에는 푸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엉덩이를 의자에서 약간 뗀
상태에서 상대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은 후 품속에서 명함 한장을 꺼내 건넸다. 그 과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초영란도 감탄하게 했다.
'천마가 출세하긴 했구나. 몰카에 이렇게도 리얼리티를 부여하다니.'
대천그룹 부회장 천치, 01010071007
'저런 멋진 아빠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초선은 천치의 몸에 배인 품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품격 있지만 상대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가끔 너무 정중스러워 부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천치는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여기 제 명함이에요."
초영란도 갓 만든지 며칠 안되는 명함을 천치에게 건넸다.
"이 백화점은 현장로 회장님걸로 알고 있는데 그새 인수하셨나 보네요. 참 대단한 수완이십니다. 가장 아끼는 외손자에게 줄 선물이라고 누구한테도 팔지 않는다 들었는데."
'오, 설정 오지는구만. 열여덟 꼬맹이 전화 한통에 백화점 넘기고는 나더러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개연성은 어디 가서 뒈졌나?'
"공짜로 받았어요. 제 아들이 전화 한통 하니까 조건 없이 넘기던데요."
천치는 초영란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대천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앞에서 기죽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현회장님이 그릇이 좀 크지요. 하지만 그분도 상응한 이득을 얻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이 준비한 답을 꺼내놓는구나. 표정변화도 전혀 없는 걸 보니 대단한 내공의 연기자인 모양이야. 하지만 너의 그 완벽함이 너를 배신했어. 보통이면 에이 말도 안돼 라면서 받아쳐야 하는거야. 작가가 누군지 모르지만 설정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있고 배우는 연기만 잘하지 임기응변이 약하구나. 이럴때는 막말이 최고지.'
"그런데 천부회장께서는 왜 혼인을 하지 않은건가요? 남자를 좋아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혹시 사실인가요?"
소위 상류사회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식의 대화가 없다. 만약 천치가 초영란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왜 아직도 결혼 안 하셨어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못 찾은건가요? 제가 아는 남자는 많은데.'
"그게 아니라 젊을 때 총에 맞은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완치하지 않아 결혼을 미루고 있는 것뿐입니다."
"어머어머, 배후는 어느 그룹인가요? 중국 자객인가요 아님 일본 닌자였어요? 혹시 러시아 저격수? 아직도 많이 아프신가요? 제가 어릴때 신기가 좀 있어서 무당 되어보지 않겠냐는 권유를 좀 받았어요. 그런데 제 신기가 전부 손에 몰려서 무당이 되지 못했어요. 그래도 웬만한 상처는 몇번 어루만져주면 다 나아요. 제가 한번 치료해드릴까요?"
초영란은 천치의 얼굴이 빨개지자 걱정된 말투로 물었다.
"열이 나는건 나도 방법이 없는데. 아픈곳에 손을 대고 비벼야 하는데 열은 온몸에서 나니 제 신기가 부족해요."
'작가가 이것도 미리 준비했나? 대답이 너무 술술 나오는데. 요즘 방송작가들 장난 아니라더니.'
천치가 계속 말이 없자 초영란은 작전을 바꿨다.
"사실 저도 총에 맞은적이 있어요. 십구년전인가."
"공교롭군요. 저도 십구년전에 총에 맞았습니다."
'요것 봐라. 내 조사를 다 했다 이거지? 꼬장 한번 부려보자.'
"제가 날짜를 맞춰볼까요? 11월7일 맞죠?"
천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보인 반응중 가장 격렬한 반응이었다.
"그걸 어떻게 안 겁니까? 당시 그룹차원에서 소식을 봉쇄해서 아는 사람이 현재 열명도 되지 않을 겁니다. 당시 제 진실된 신분을 아는 사람이 몇명 없었거든요."
'오오, 소름. 연기력 진짜 좋다. 눈에서 불이 막 떨어지는 것 같구나. 애들도 다 컸는데 나도 남자 찾아볼까?'
"제가 오후 2시 37분 23초라고 말하면 더욱 놀라겠네요."
"그럼 이번에는 제가 지점을 말하죠. 화성입니다."
'몰카 끝인가? 너무 순순히 나오는데.'
"부대는 고자(高刺)부대 11사단 11연대였죠."
"당시 오후에 위문공연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들 흥분으로 조심성이 부족했습니다. 한 사람이 실수로 오발사고를 냈고 그 총알이 제 낭심을 꿰뚫었습니다."
"당시 저희는 위문공연을 처음으로 가는 거였어요. 긴장된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 기다리는데 갑자기 복통이 몰려와서 바라보니 배에서 피가 흐르더라구요."
"저는 그때 바로 기절했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그룹산하의 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저는 놀라 기절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어요. 구급차가 왔는데 어떤 잘생긴 군인아저씨가 실려있더군요. 근처 병원에 갔는데 저는 그 병원에 남고 그 아저씨는 또 어디로 실려가더라구요."
"저는 고환이 전부 파괴되어 생육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대천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인 제가 말입니다. 그 고통을 십구년째 당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병원의 환경이 열악하여 수술을 못했어요. 어렵게 어렵게 돈을 구해서 큰병원에 갔더니 임신해서 수술이 안된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 처녀였는데 말이죠."
"저도 그후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일찍 효능이 없다는게 증명되지 않았으면 지구의 물개들이 멸종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전복죽도 끊은지 십년이 넘습니다. 이상한 벌레도 삼켜봤고 먹기 역한 음식들도 꾸역꾸역 먹었습니다. 매일 여섯시간씩 야동 보는데 투자했습니다. 봤던 야동 또 볼때 그 미지근한 느낌, 알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열달뒤에 애를 낳는데 처녀막이 터져 난리가 났어요. 신문사와 방송사에서 취재가 막 오고 목사와 신부들이 찾아왔어요. 악령을 쫓는다면서 차가운 얼음물을 성수라고 막 퍼붓질 않나, 아이는 자신들이 데려다가 키워서 종교지도자 만들겠다면서 아이를 내어달라고 하지 않나. 사고무친의 어린 여자가 그런 상황에서 얼마나 힘든지 상상도 못하실 거예요."
"여보, 고생이 많았소. 이제부터라도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면서 잘 살아봅시다."
"당신도 십구년동안 마음고생 많으셨어요. 우리 지금부터라도 행복하게 살아요."
천치와 초영란은 서로 부둥켜 안고 엉엉 울음을 토해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초선은 티나지 않게 주위를 살폈다.
'엄마도 몰카에 참여했구나. 연기 졸라 못하네. 시청률을 위해서 내가 일부러 속아줘야 하나? 나 연기 꽝인데 어떡하지? 요즘 관중들이 여포도 아니고, 속을라나 몰라.'
- 작가의말
일단 가볍게 외전 하나 던집니다. 어제 출판제의 한번 더 받았습니다. 글을 계속 취미로 쓰는게 맞는지 아님 직업란에 작가라는 두글자를 새겨넣을지 고민 많이 했습니다. 결론은 내리지 못했지만 생각은 정리되었습니다. 당분간은 취미로 쓸 생각입니다. 제가 자신의 글에 충만한 자신감이 생길 때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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