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도궁
무림맹은 명화교의 우익에 의해 좌익이 무너지자 급히 징을 울려 후퇴를 명했다. 그러자 명화교의 좌익에는 곧바로 매화검수와 철나한들을 잡아두라는 명이 떨어졌다. 추격하여 일반병사들을 죽이는 것보다 무림맹 중추문파들의 고수들을 줄이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남궁천과 무당의 두 장로 그리고 무당오자의 삼인은 믿기 어려운 눈빛으로 천살마성을 바라보았다. 은백색의 눈동자로 여섯을 오연하게 바라보는 천살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정교하나 고수들의 눈에는 군더더기가 보이는 초식을 사용하던 애송이가 아니었다. 죽이려면 죽일수는 있으나 여섯이 힘을 합치고도 생포에 실패했다.
왼팔의 상박이 남궁천의 검에 의해 반이나 잘렸지만 피 한방울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른 허벅지도 송현자의 검이 뼈까지 찔러 들어갔는데 전혀 부상이 없는 사람처럼 잘 서있었다. 천살마성은 무림맹주의 자리를 걸고 네 세력이 경쟁해도 될만한 상품(賞品)이 아니었다. 함정을 파고 넷이 협력해서 생포해야 할 맹수이다.
철혈검단의 엄호하에 무림맹의 선봉이 천천히 후퇴하자 선봉과 우익의 일부가 그대로 좌익으로 덮쳐갔다. 사도무천도 천살의 옆을 지키다가 고수들이 전부 물러나자 좌익으로 가서 매화검수와 철나한들을 상대했다.
천살의 눈동자가 천천히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천살마기가 자의로 천살의 통제권을 돌려주었다. 남궁천과 같은 고수의 존재에 발톱을 숨기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금 천살마기가 천살의 몸을 장악하고 아무리 날뛰어도 남궁천이 죽이기로 결심하는 순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천살은 천살마기를 제어하는데 한걸음 더 나아갔다고 기뻐했다. 처음에는 기억도 없었는데 차차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고 전투도중 통제권을 빠앗아내기까지 하고 이제는 통제권을 완전히 가져간 천살마기가 통제권을 알아서 돌려주기까지 했다. 언젠가는 천살마기를 정복하여 자신의 운명에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쑥 생겼다.
천살의 삼십인대는 천살을 제외하고 열한명이 남았다. 철혈검단과 부딪히며 스무명이 죽어나간 것이다. 천살과 당무영까지 포함해서 서른둘이었지만 이제는 열둘이 되었다. 팔다리가 피투성이가 된 당무영과 조전은 남은 부대원들을 거느리고 천살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전투는 결국 명화교의 대승으로 끝났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라도 만명이상의 대규모 접전에서는 큰 효용이 없음이 다시한번 증명되었다. 홀로 적의 지휘부까지 돌진해서 지휘부를 전부 참살한다면 모를까 전장에서 고수는 그저 사람을 조금 더 빨리 죽이는 병사일 뿐이다.
전장에서 몇년씩 구른 고수가 있다면 모를까 처음 전장에 투입되는 무인들은 전장의 광기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격때문에 긴장상태를 항상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과 심력의 소모가 훨씬 빠르다. 무공이 강하다고 해서 심력이 강한건 아니다. 심력은 타고난 부분이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심력이 약해져서 주의력이 떨어지면 공격을 쉽게 허용한다.
통제권을 다시 찾은 천살은 부대원들을 데리고 의원을 찾았다. 지난번과는 달리 의원은 공손한 태도로 천살과 그 부대원들의 상처를 치료해주었다. 상처의 치료가 끝나자 천살은 임시로 배정받은 방으로 가서 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밖에는 당무영 등이 호법을 섰다.
저녁늦게 깨어난 천살은 아쉬움을 느꼈다. 무척 많은 것을 보고 느꼈지만 무공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고 경험이 부족해 대부분 깨달음은 검법쪽으로 치우쳤다. 무공검법 덕분에 검법의 기초가 그나마 탄탄하기 때문이다. 내공심법이나 무공 전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다른부분은 깨달은게 별로 없다.
밖에 나와보니 당무영등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천살은 얼마 남지 않은 은자로 이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스물이나 되는 부대원들이 죽었는데 천살은 얼떨떨한 기분이다. 자신의 감정이 슬픔인지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죽은자들에 대한 연민인지 알수가 없었다.
"대장님, 교주의 영애가 온다고 합니다."
냉철하고 독해 보이던 조전이 흥분한 어투로 말했다. 얼굴에 서린 기대감은 당과를 사올 부친을 기다리는 아이와 같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태평일 것 같던 당무영 역시 한껏 흥분한 기색이었다.
"교주의 영애가 술과 고기를 가득 가지고 온대?"
천살의 물음에 조전과 당무영은 실망했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천살은 둘의 진심이 담긴 눈빛에 울컥했다. 자신의 질문이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단 말인가?
"교주 영애는 교주의 오제자인 초소저와 함께 명화신교의 두떨기 꽃입니다. 우리같은 일반무사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초소저와는 달리 교주 영애는 우리같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친절하단 말입니다."
천살은 몸을 뒤로 젖혀 조전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방울을 피했다. 천살에게 먼지 나도록 얻어맞은 후 항상 고분고분하던 조전이 처음으로 천살에게 언성을 높였다. 며칠전 새벽까지 술을 마신 후 천살과 부대원들의 사이는 훨씬 끈끈해졌다.
둘의 성화에 못이겨 천살도 구경을 나갔다. 교주의 영애라면 가마를 타고 올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말을 타고 있었다. 얼굴도 가리지 않고 마중나온 교도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단정한 표정일 때는 현모양처와 같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웃을 때는 장난기 많은 소녀 같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을때면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 같았다. 슬픈 표정을 지을때는 보듬어주고 싶었다.
'찾았구나, 화령.'
교주의 영애를 바라보는 천살의 두눈에는 불꽃이 일었다. 천산의 화령(火靈)의 정체는 교주 한선후의 외동딸 한화령(韓花玲) 이었다. 천산의 제자로 신분을 둔갑해 무림맹에 잠입한 후 반년동안 무수히 많은 첩자를 심어두었다. 그중 대부분은 자신이 첩자인줄도 모르고 있다.
명화교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덕분에 한화령은 부친으로부터 신랑감을 직접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부친이 아직 소교주를 지목하지 않아 한화령도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대제자 선우검파와 삼세자 사진군 둘다 외모가 준수하니 누구라도 크게 상관이 없다.
화령이 오자 경공연(慶功宴)이 벌어졌다. 무림맹과의 대승을 경축하고 공로자들을 치하하는 연회인데 원래는 전투가 끝난 후 사도무천이나 포장군이 열어야 한다. 하지만 사도무천은 군의 장병들에 대한 포상권리가 없고 포장군은 그 세력이나 위망이 부족하다. 그래서 교주의 영애인 화령이 교주를 대신해 경공연을 열었다.
포정운부터 시작해서 우선 군에 소속된 자들의 포상이 이어졌다. 매화검수 여섯과 철나한 넷의 수급을 베어냈고 일반병사는 이천 가까이 죽이거나 포로했다. 일일이 포상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는 관계로 큰 공을 세운자들만 포상했다.
몇몇 지휘관들에 대한 포상이 끝나자 천살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한화령은 홀로 남궁천과 무당의 제자들과 대등하게 맞섰다는 청년영웅이 몹시 궁금했다. 커다란 덩치에 강인한 인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거기에 처음 보는것 같지 않은 익숙함에 이게 운명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덩치가 많이 커졌고 목소리가 변했다. 유약한 서생같던 인상도 강인한 전사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화령이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못한 천살은 한화령의 밝은 미소에 허둥거렸다. 혹시 천사성이 아니냐고 질문해올 때를 대비해 준비해 두었던 거짓말들이 하나도 소용없어졌기 때문이다.
천살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허둥거리자 한화령은 미소를 더 크게 지었다. 천살은 한화령의 얼굴을 보고 불쑥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느라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긴장해서 얼굴이 굳어진 모습으로 보였다.
"천대장은 천씨이니 백인장보다는 천인장이 어울릴 것 같네요. 하지만 교주께서 따로 생각이 있으시니 당분간 백인장으로 만족하시기 바랍니다."
속삭이듯 말을 건네오는 한화령 때문에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억지로 누르느라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교주의 넷째제자인 강사성은 그런 천살을 한껏 비웃었다.
'이 병신아, 쉽게 웃어준다고 쉽게 가질수 있는 꽃이 아니다. 너도 몇년 지나면 나와 똑같은 신세가 될 것이니 빨리 그 미망에서 깨어나라.'
천살은 말을 많이 하면 말투때문에 탄로날까 걱정되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포상으로 내려온 천필과 은자를 받고 뒤로 물러섰다. 조전과 당무영도 포상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천살이 대표로 이들의 포상까지 함께 받아왔다. 조전과 당무영의 부러운 눈길을 한몸에 받으며 천살은 자신의 격탕하는 마음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모든게 화령 때문이라 할 수는 없으나 천살은 그전까지 꿈꾸던 화산에서의 밝은 미래를 잃게 되었다. 무당파의 송백자에게도 복수를 해야 하고 자신을 복마전에 던져넣은 소림에게도 복수를 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을 마음대로 다루려고 했던 화산에게도 복수를 해야 한다.
무당이나 소림 및 화산에 대한 복수는 너무 거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것이 화령에 대한 복수이다. 하지만 그 화령이 명화교 교주의 외동딸인것을 알게되자 복수의 길이 요원해 보였다.
"당형, 만약 어떤 여자가 당형에게 해코지를 했는데 당형이 얼굴을 바꾸고 전혀 새로운 신분으로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오. 어떻게 복수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소?"
"우선 그 여자에게 접근해서 호감을 살 것이오. 그렇게 그 여자와 혼인을 한 다음 소박을 하는 것이요. 그 다음 그 여자의 가문이 풍비박산나게 한 후 혼자된 여자를 버리는 것이오. 그러면 분이 조금은 풀릴 것 같소."
질문에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이 술술 나왔다. 천살은 당무영도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이런 고민을 많이 했기에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답이 나온 것이리라.
한화령은 본진뿐 아니라 전방의 군사들도 위문해야 한다. 사람을 보내 청해호의 사도로 돌아갈 때 천살도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전갈을 해왔다. 사도무천도 그때 함께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부상에서 회복된 천살을 매일이다시피 밖으로 내몰았다. 하지만 무림맹은 한껏 위축되었는지 천살이 어슬렁거려도 미끼를 무는자가 없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어슬렁거리다 돌아온 천살은 부대원들과 술을 마시러 이동했다. 술이 맛있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지만 마음속에 고민이 들어차니 자꾸 술이 생각났다.
"아저씨 이거 드세요."
네댓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이다. 똘망똘망한 눈은 보는 사람이 미소짓게 만들었다. 아마 본진에서 장사를 하는 집안의 자식인 모양이다. 손에는 큼직한 주먹밥이 쥐어 있었다.
"이거 참 맛있네. 배가 부르니 나머지는 네가 먹으렴."
천살은 한입 크게 베어문 후 우물거리며 말했다. 아이는 기쁘게 웃으며 주먹밥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천살이 교주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며 친분을 쌓으려는 자들은 많았지만 어린 아이의 호의는 순수해 보여 기분이 좋았다.
주먹밥을 먹으며 돌아가던 아이가 갑자기 검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동시에 천살도 검은 피를 울컥 쏟아냈다. 당무영과 조전은 곧바로 병장기를 뽑아 주변을 경계했다. 불사공이 몸속의 독을 제압하는 것을 느끼며 천살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늘이 내린 운명인지 천살마성이기에 제한된 운명인지 모르지만 천살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실력을 최대한 키워서 파탄의 운명을 마주할 때 거세게 반항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은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운명임을 천살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 작가의말
道盡途窮, 길이 진하고 길이 궁하다. 더이상 갈길이 없음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선택할 길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어제 얼굴로만 인정받던 제 고충을 털어놓았습니다. 저랑 동병상련인 분이 추천글을 써주셨군요. 응원 감사드립니다. 역시 같은 아픔을 겪어서 그런지 제 아픔을 잘 이해해 주시는군요.
혹시 사진을 올리라는 분이 계실까 미리 말씀드립니다. 사진 올려봤자 왜 원빈 사진 도용하냐고 비난할게 분명합니다. 가끔 이거 원빈 맞나 라고 의심되는 사진들이 있을 겁니다. 비슷한데 미세하게 조금 더 잘생긴 사진, 그 이유는 다들 짐작하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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