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백세
초화규가 복마전을 벗어나는 순간 천살은 그것을 감지하고 경사에서 소림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호매령이 둘째를 출산할 날이 한달도 되지 않기에 한선후가 탈출한게 아니기를 바랐다. 천마신공은 내공이 아예 없는 자들이 익힐 수 없는 무공이다. 내공이 없는 자들이 익히려면 영약이나 영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날 천살은 한선후의 내공을 전부 소멸시키고 품속에 영약이 없는지 확인했다. 당분간 탈출의 위험이 없으니 아이가 출산한 뒤에 다시 목숨을 취하려고 일단 살려두었다. 하지만 아이의 출산이 한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탈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누군가 복마전을 들어간게 아니라 한선후가 탈출한 것이라면 잡아서 천양무관에 가두어 놓아야겠다. 누군가에게 맡기면 천마신공을 캐내려 할테니 직접 데리고 있어야 한다.'
등봉현에 도착한 천살은 피식 웃어버렸다.
'곧바로 소림에 가도 되는데 꼭 등봉현을 먼저 들리는구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던 상식들이 나를 속박하고 있다.'
하지만 엎드려서 비럭질을 하는 초화규의 신형을 발견한 천살은 가끔은 돌아가는게 더 빠른 지름길임을 확인했다. 미쳐버린 초화규는 동전을 주어도 입안에 넣으려 하기에 마음씨 좋은 사람들이 음식을 나무그릇에 담아서 건네주었다.
"초화규, 한선후는 어디에 있느냐."
"한선후는 죽었소. 시체는 복마전에 있소."
천살의 말에 초화규는 한순간 제정신을 차렸다. 질문을 끝낸 천살이 떠나자 초화규는 자신이 지금 어떤 신세인지 깨닫고 엎드려서 엉엉 구슬피 울었다. 천만다행으로 천살이 떠나고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초화규는 다시 미친 상태로 돌아갔고 세상만사가 모두 즐거워졌다.
복마전에 들어간 천살은 한선후의 죽음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다 한쪽 벽면에서 이상함을 발견했다. 바로 초화규가 한선후를 유인해서 사장로와 함께 매몰시킨 땅굴이었다. 머리통 크기의 돌들을 꽁꽁 박아넣은 모습이 누가봐도 의심스러웠다.
천살은 안의 상황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감각이 쑤욱 확장되며 바위속의 상황들이 '보였'다. 안에서 사장로와 한선후의 시체를 발견한 천살은 감각을 다시 거두었다.
'공간에 대한 통제권을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구나. 상식과 상상력의 한계가 내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
천살의 현재 문제점은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명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달마대사나 삼풍진인처럼 경지에 수반하는 명확한 정신적 깨달음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지 천살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 그 깨달음들이 자리하고 있다. 천살은 그것들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한선후의 죽음을 확인하고 의외의 수확도 얻었다. 기분이 많이 좋아진 천살은 느긋한 마음으로 열여섯개의 글씨가 새겨진 바위 앞으로 향했다. 무형지독을 이겨내고 복마전을 떠나기 전에 새롭게 나타난 소림미승 약규불심 여덟글자를 한번 더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하하, 우물안 개구리가 끝내 우물을 벗어날 수 있겠구나."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소림미승 약규불심은 수백권으로 이루어진 불경과 같았고 절세신응 우득우익은 수백가지 무공을 담은 무공총람 같았다. 아는것 만큼 보인다고 지금에 와서 다시 보니 글을 남긴 두사람이 얼마나 대단한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가 놀랍고 신응은 무공의 경지가 놀랍구나. 이 두분은 단순히 존재 그 자체만으로 나를 압도할 수 있겠다.'
정신적수양과 마음의 단단함이 천살이 견주어 볼만한 상대들이 아니다. 설사 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저 정도의 깨달음과 정신수양을 가진 사람들 앞에 서면 위축될 것 같았다.
'나는 여태 죽은글을 읽었구나. 고리타분한 성현의 말들 속에도 깨달음들이 있을턴데 세상을 접하면서 너무 빠르게 부정했구나.'
천살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공자나 맹자의 말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부정해 왔었는데 이제 와서 열린 마음으로 모든것을 포용해야 함을 느꼈다.
'내가 아직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겸양한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공부해야 한다.'
천살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복마전을 떠났다. 쉬임없이 달려 경사로 도착한 천살은 호매령에게 말했다.
"부인, 이제는 위협이 되는 자들이 없으니 지금처럼 조심할 필요가 없소.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같이 살았으면 하오."
"부군, 요즘들어 천효가 자꾸 자기 아비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습니다. 지금 당신에 대한 소문들이 매우 좋지 않게 났는데 천효가 알면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 저는 지금 이대로 사는것도 충분히 만족하니 저는 상관마시고 아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이 생각해 주세요."
호매령이 매우 순화해서 말했지만 그렇다고 천살에게 주는 타격이 작은것은 아니다. 사내자식들은 자라면서 아비의 등을 바라본다. 하지만 지금 강호에 퍼진 천살에 대한 소문들을 보면 천마신공을 만들어 수많은 마인을 양성한 대마두, 무림맹과 서무림맹을 해체시킨 대악당, 소림, 무당, 화산, 종남을 봉문시킨 무림의 독재자이다.
유일하게 칭찬받을만한 마교의 장로들을 죽이고 마교를 해체시킨 것은 마교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비추어졌다. 천살은 이제껏 강호의 이러한 평가들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천효가 장성해감에 따라 자신의 부친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지고 있기에 어느날 강호의 대마두 천마가 바로 자신의 부친 천살인 것을 알면 크게 상심할 수도 있다.
"부인, 헛소문이거나 왜곡된 소문들이니 내가 바로잡겠소. 며칠간 집을 비워야겠으니 천효에게는 잘 설명해 주시오."
천살은 곧바로 응천부로 향했다. 경사가 응천부에서 북평으로 옮겼지만 정보의 중심지는 아직도 응천부이다. 지리적 위치상으로도 하오문의 총단을 응천부에 두는것이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다.
"현문천, 너에게 부탁이 있다. 강호에 나에 대한 왜곡된 소문들이 돌고 있는데 네가 바로잡아주어야겠다."
불쑥 찾아온 천살을 현문천은 반갑게 맞이했다. 천살이 일거리를 많이 줄수록 현문천의 문주자리는 공고해진다. 공짜로 일해주기에 하오문은 손해를 보지만 현문천은 이득을 보는 것이다.
"우선 내가 화산에 있을때 말이야. 서창훈과 호군천은 나를 화산제자로 받아들이려 했어. 그런데 그때 내가 서창훈과 함께 개봉에 왔다가 마교의 무리들에게 납치를 당했어. 그때 진두지휘한 자가 바로 마교주 한선후의 딸인 한화령이야."
"한화령은 무당의 송백자로부터 내가 천살마성이라서 죽이면 안된다는 정보를 들었지. 그래서 나를 소림에 넘겼는데 소림은 나를 복마전이라는 곳에 가뒀어. 나는 그곳에서 몇년 고생하다가 겨우 탈출해 나온 것이지."
천살은 입에 침을 발랐다.
"그다음 나는 한화령에게 복수를 하려고 마교를 찾아갔지. 하지만 사도에 꽁꽁 숨어있어서 어쩔수 없더라고. 그래서 마교에 가입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어. 그러다 천살마성인 것을 마교도 알게 되어서 교주가 나를 제자로 삼았지. 그때 한선후가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몰랐어."
"그러다가 소교주를 뽑는 시험이 있었어. 나는 외인이라 첫날에 여섯명의 협공을 받아 거의 죽을뻔 했지. 그래서 백일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상처를 치료하며 숨어 있었어. 그런데 남은 여섯이 독과 암기까지 사용해서 서로 죽고 죽이며 끝내는 몰살당해 버린 것이야.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한선후가 보낸 자객의 시체도 있었어."
입에 침이 마르자 천살은 찻물로 입안을 헹궜다.
"혼자 살아남은 나를 한선후가 협박했지. 소교주자리를 주겠으니 얌전히 있으라고 말이야. 그리고 자신의 딸 한화령과 혼인한 척 하라고 했어. 한화령이 그때 벌써 여러 남자와 정분이 나서 소문이 굉장히 좋지 않았던 것이야. 내가 동자공을 익히고 있는 것을 알고 한선후가 나를 점찍은 것이지."
"소교주가 된 다음 마교의 계획을 알게 되었지. 강호를 일통하고 황실을 전복할 어마어마한 계획을 가지고 있더라고. 그 첫번째 목표가 화산이었어. 나는 자원해서 화산을 처리하겠다고 나선 후 화산을 봉문시켰지. 서창훈 장로는 자신이 살아있으면 마교가 화산을 멸문시키고 말것을 알고 화산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어."
천살은 찻물을 한모금 또 마셨다. 왠지 자꾸 입이 말라왔다.
"그다음 목표가 사천무림이었어. 지리적으로 가깝고 고수도 많고 당문이 있어 여러가지로 위협적이었던 것이지. 그래서 내가 또 나서서 사천무림과 동맹을 끌어내겠다고 했지. 한선후도 싸우는 것보다 동맹이 더 낫겠다 싶어 내 계획에 동의했어. 나는 당문을 찾아가서 칠변절독을 이겨낸 후 동맹이 아닌 상호불가침 조약을 얻어냈지."
"그런데 정도무림을 보호하려는 내 속셈이 교주가 보낸 간자에게 들켜서 나는 한선후의 함정에 빠졌어. 포로된 내 몸속에 있던 천살성의 기운을 한선후가 전부 뽑아갔지. 그리고 무공을 잃은 나를 가둬두었어. 한선후의 부하들이 내 몸으로 여러가지 실험을 했지."
천살은 아예 차주전자를 들고 입안에 찻물을 쏟아넣었다. 많은 말을 한것이 아닌데 자꾸 갈증이 느껴졌다.
"나는 힘들게 무공을 회복하고 오히려 더 큰 진전을 이루었지. 겨우 탈출해 나가니 무당의 송백자가 화산을 멸문시키고 그 죄를 마교에 덮어씌운 다음 정마대전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고. 그래서 나는 급히 무당에 가서 비무를 제안하고 진 쪽이 봉문하는 조건을 내걸었어. 그렇게 되어 무당이 봉문되었지."
"그다음 나는 한선후를 제거하고 마교를 해산시켜 강호의 평화를 이루려고 했어. 한화령에 대한 내 개인적인 복수는 강호의 대의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놀랍게도 마교가 소림과 손잡고 함정을 팠지. 후에 알았지만 소림이 마교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더라구."
천살은 차라리 열명의 남궁천과 대결을 하는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찻물로 입을 한번 더 적신 천살은 말을 이어갔다.
"절독에 당한 나는 은밀한 곳에 숨어 몇년간 해독을 했지. 그렇게 독을 이겨내고 또 한번 도약하여 지금의 경지를 이루었어. 가까운 소림에 먼저 찾아가서 따지니 소림도 마교에게 속아넘어갔더라고. 그래서 나는 불경대결을 제안했어. 어릴때부터 불경을 많이 읽었거든. 심신수양에 불경만한게 없더라고."
"사실 그 대결은 소림이 이겼어. 명혜노스님이 끝까지 버티셨거든. 하지만 소림은 그럼에도 자신들이 부족하다 생각해서 봉문을 한 것이지. 내가 봉문 시켰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야. 나는 봉문을 언급한 적이 없어."
천살은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속으로 안도의 숨을 몰래 내쉬었다.
"그 다음 마교를 해산 시킨 후 서무림맹과 무림맹이 남았더라구. 마교가 사라지면 이 둘이 다툴 가능성이 높겠다 싶어 둘다 해산시켰지. 종남이 봉문한 것은 그자들이 큰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야. 종남도 그것을 아니 순순하게 봉문을 받아들인 것이고 말이야. 이미 회개하고 있는데 언급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말을 줄이겠어."
"그리고 내 기운을 빼앗아가서 천살마성이 된 한선후를 내가 유인해서 제거했어. 한선후를 유인하는데 하오문의 공로가 가장 컸지. 이제는 한선후가 죽었기에 모든 진실을 세상에 알릴때가 되었다."
천살은 현문천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현문천은 천살의 눈에서 진심을 읽었다. 사실 천살은 이야기가 끝났다는 안도감이었지만 말이다.
"이제 세상에 진실을 알릴때가 되었다. 천마신공은 새롭게 천살마성이 된 한선후가 만들어낸 것이고 그런 한선후를 유인해서 제거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바로 하오문이다. 천살마성은 세상에서 사라졌고 세상은 태평성세가 이어질 것이다."
- 작가의말
流芳百世, 세세대대 아름다운 향기를 남긴다는 뜻입니다. 점심약속이 있어서 남은 두편은 돌아와서 올리겠습니다.
어제 제 글을 한번 쭉 훑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중간에 두번정도 제가 흔들렸더군요. 그래서 지금 애초에 계획한 스토리가 아닙니다. 사실 천살이 한동안 흑화되어 난장판을 부리는 장면이 있었고 백화정도까지는 고구마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읽는 분들이 불편해하시고 저도 그에 공감해서 지금처럼 바뀌었습니다. 원래 스토리도 좋아해주실 분들이 꽤 계실것이라 믿습니다. 개연성면에서는 그쪽이 조금 더 낫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장르소설이 개연성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심지어 재미가 뛰어나면 개연성의 부재는 티도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결심했습니다. 글을 쓰기전에 컨셉을 미리 정하고 쓰자. 재밌는 글 개연성 있게 쓰기, 혹은 개연성 있는 글 재밌게 쓰기. 둘중에 하나를 정해서 끝까지 밀고나갈 생각입니다. 이번 글은 개연성 있는 글 재밌게 쓰기 였는데 중간에 두번정도 흔들리면서 개연성이 조금 부족해졌고 재미에 집중된 것도 아닌 느낌입니다. 물론 즐겁게 봐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후회되지는 않습니다. 누가 뭐라고 했건 글의 진행을 바꾼건 제 책임이니 말입니다. 댓글에 흔들리면 흔들린 제 잘못입니다. 흔든 사람을 탓하는 건 자기 인생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만 있음을 모르는 성숙하지 못한 모습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글쓰기 시작한지 넉달하고 이주정도 되었습니다. 지금 이 글에 비교적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좀 더 잘 살릴 수 있었는데 대충 쓴 몇몇 부분들입니다. 필요하지만 제가 재미를 크게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은 조금 성의없이 썼습니다. 그런 부분들은 귀신같이 지적이 올라오더군요. 중간에 두번정도 몸이 불편한 적이 있는데 연참을 고집하면서 글의 퀄리티를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행동들이 자신의 글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서 생긴 일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 것 같습니다. 제 글과 함께 저도 계속 성장했으면 합니다. 일년 뒤에도 지금과 똑같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장황하게 써서 다음화에 끝나는거 아니냐 하는 분도 계시겠는데 아직 떡밥 회수 안한거 몇개 있습니다. 일부는 떡밥만 던져놓고 회수 안하는 것도 있습니다. 지요사공 떡밥은 회수 안하는 떡밥입니다. 그리고 제 마무리는 전작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글이 끝난다는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그런 방식이 최고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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