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심연공
초화규에게 뒤통수를 맞을뻔 한 천살은 마음을 비웠다. 빨리 무공을 회복하고 싶고 호매령과 재회하고 싶은 마음에 초화규에게 횡련일기공을 수련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거기에 가끔씩 움직이는 천살마기 때문에 서두른 면도 있다. 소림에 갖힌 것도 결국 한선후에 대한 복수를 서두르다 생긴 일이다.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된 걸 느긋한 마음으로 무공수련이나 하자. 성라운포를 내공 없이 시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사실 지금 천살의 체력이라면 중간중간 적당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공동에서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천살은 더이상 힘이 없어 사람이나 상황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기에 무공을 회복하고 나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천살을 복마동에 던져놓고 다들 관심 없었지만 지금은 복마동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공을 회복하지 못하면 탈출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무공검법의 초식들을 수련한 후 응익검의 초식들을 수련했다. 초화규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지만 천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공은 전신을 이용해야 한다. 다리 두개가 움직여지지 않는 초화규는 아무리 지켜봐도 무공을 훔쳐배울 수 없다. 그리고 초화규가 시야안에 머물러 있는것이 낫다. 눈에 안 보이면 뭔가 수작을 부리는 것 같아 도리어 무공수련을 할때 정신집중이 안된다.
사도의 사씨가문의 밀실에서 난리가 났다. 천마신공을 수련하던 아이 하나가 미쳐버린 것이다. 죽이려면 어렵지 않지만 최대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하려고 하니 쉬운일이 아니었다. 초식의 정묘함은 없으나 실린 힘이 강했고 반응속도도 짐승처럼 빨라서 생포가 쉽지 않았다.
그나마 막힌 밀실이었기에 겨우 제압했다. 그 과정에 무인 세명이 팔다리의 뼈가 상하는 부상을 입었다. 제압한 아이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맨 후 다른 아이들에게 연공을 멈출것을 명했다. 사장로와 가문의 중책을 맡고 있는 자들이 밀실에서 회의를 열고 대책을 의논했다.
"저 아이가 어떤 성격이고 어떤 무공들을 익혔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해 오시오. 그리고 연공과정을 적은 기록들을 반복적으로 검토해서 다른 아이들과 어떤 다른점이 있는지 꼭 밝혀내시오."
사장로의 분부에 가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만 가주이지 사장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런 위치임에도 여러 형제들과 사촌들의 질투를 받고 있다. 가주는 뭔가 다른 형제들보다 나은점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단서가 될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지요."
사장로는 가주가 건네는 종이뭉치를 받았다. 뒤늦게 장현성이 천마신공의 비급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린 사장로는 가주에게 비급의 회수를 명했다.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았기에 이 일은 가주에게 일임한 것이다. 가주가 건넨 종이뭉치에는 그에 대한 보고들이 적혀 있었다.
"괴령이 혈경(血經)을 찾는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혹시 교주가 익힌것이 바로 그 혈경인가?"
"아닌 것으로 판단됩니다. 저희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혈경은 영생결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수백년전에 종적을 감추었죠. 그리고 혈경은 무공비급이 아니라 장생불로를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양생술이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괴령이 허황한 꿈을 꾸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천마신공은 정녕 천살이라는 애송이가 만들어냈다는 말이오? 약관을 갓 넘은 아이가 이토록 위력이 대단한 무공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소."
"천살마성이지 않습니까. 교주가 금의위한테 직접 천살이 만들어낸 무공이라고 인정했다고 합니다. 자존심 강한 교주이니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장로는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로 탁자를 톡톡 때렸다. 그러다 여전히 풀리지 않았는지 종이뭉치를 다른 자에게 건넸다.
"자네들도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해보게."
종이뭉치는 회의에 참석한 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졌다. 종이의 내용을 읽은 자들의 표정은 전부 똑같았다. 뭔가 혐오감과 두려움이 반씩 섞인 얼굴들이다.
"괴령의 제자들이 장현성의 비급을 입수(入手 - 손에 넣다)한 후 귀주로 향했군요. 그리고 천마신공의 비급을 수련하는데 알몸으로 몸을 짐승피에 담그고 수련한다고 되어 있네요. 차라리 이들을 전부 잡아다가 고문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괴령의 종적이 보이지 않소. 비급은 괴령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시키는대로 수련하는 것뿐이오. 아마 괴령도 우리가 스물여덟의 실혼인들로 무공의 위험성을 먼저 가늠해본 것처럼 제자들이 익히는 과정을 지켜보며 문제점을 찾아내려는 듯 하오."
그때 회의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사명군이 사장로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무릎을 탁 쳤다. 장현성에 대한 보고를 제때에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사명군은 오랜 시간 위축된채로 지냈다. 그래서 회의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기자 기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방금 대장로님의 말씀을 듣고 눈앞이 환해지더군요. 지금까지 천마신공과 관련되어 성공한 자들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천살도 그렇고 교주도 그렇고 스물여덟의 실혼인도 그렇고 모두 미친놈들입니다."
"계속 말해보아라."
"천살이라는 자는 혼자서 교주를 죽이겠다고 소림에 침입했습니다. 천마신공과 같은 대단한 무공을 만들어낸 자가 바보일리는 없으니 이건 미친놈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교주도 미치고 나서 천마신공을 익혀냈는지 익혀내고 미친놈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사람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미친놈이 된 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실혼인들은 미친놈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멍청이는 분명합니다. 그리고 괴령의 제자들이 피에 몸을 담그고 수련한다는 것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미친놈이더군요."
"그래서 제가 얻은 결론은, 미친놈이 아니면 익히지 못하거나 익히면 미친놈이 되는 무공이라는 것입니다."
사명군의 분석은 그럴듯했다. 천마신공을 익히다가 미친놈이 된 아이 때문에 지금 회의를 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결론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미친놈만 익힐 수 있는 무공 혹은 익히면 미치는 무공 둘다 사장로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괴령의 제자들이 천마신공을 익힌 시기가 우리 아이들과 비슷하다고 한다. 지금 전해온 소식이 닷새전의 것이니 지속적으로 그자들의 연공과정을 지켜본 후 다시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그리고 비밀장원에 숨겨둔 스물여덟 실혼인들의 상태도 꼼꼼하게 기록해서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조치해라."
괴령의 제자들이 귀주에 자리를 잡았기에 그곳의 소식을 청해호까지 빠르게 가져오는데 매우 많은 재물이 소모된다. 수십명의 인원들이 비둘기를 청해호에서 귀주까지 가져가야 하고 그 중간중간 이용해야 할 배나 말들을 준비해 두는 자가 있어야 한다. 특히 배는 사정에 따라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기에 아예 배를 구입해야 했다. 배를 타야 하는 구간이 하나가 아니라서 배 여러척을 급히 구매하느라 적지 않은 재물이 소모되었다.
한달여의 시간이 지나자 다시 회의가 열렸다. 사장로는 침중한 얼굴로 회의를 진행했다. 분부를 어기고 몰래 천마신공을 익힌 아이가 있었는데 밀실이 아니라 자신의 방에서 미쳐버리는 바람에 큰 난동이 벌어지고 식솔 여러명이 목숨을 잃었다.
"우선 괴령의 제자들은 이제 소나 돼지의 피가 아닌 맹수의 피로 수련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취가 대단하고 정신이 멀쩡하다는 정보입니다."
명화교에는 상대의 무공수위를 비교적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한다. 교주가 키운 첩자들이 익히는 무공인데 사씨가문은 이미 오래전에 그 무공을 입수하였다. 하지만 그 무공을 익힌 자들도 교주의 무위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어 사장로의 마음을 답답하게 하고 있다.
"수련 과정에 미친짓을 해야 익혀낼 수 있다는 것이냐? 이거 신공이 아니라 마공이 아니냐?"
"천살마성이 만들어낸 무공이니 마공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이름부터 천마신공이라고 살벌하지 않습니까?"
사장로는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예전에 사명군이 무릎을 쳤을 때는 미친놈 보듯이 했지만 사장로가 같은 행동을 하자 회의장이 조용해졌다.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게 천살의 음모라면 어쩔거냐?"
천살은 일부러 천마신공을 교주에게 유출했다. 그리고 그 천마신공을 익힌 교주는 미쳐버렸다. 그리고 지금 사장로가 알고 있는 천마신공의 비급이 벌써 두개이다. 그외에도 더 많은 비급이 존재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천살은 지금 천마신공을 익힌 자들이 많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다시 강호에 나와 천마신공을 익힌 자들을 거두어 들인 후 천하를 피로 물들일 생각이 틀림없다."
"대장로님의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실혼인들을 폐기하고 괴령의 제자들도 전부 참살한 뒤 천마신공을 익히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것이 아닙니까?"
"기호지세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이 무공을 익히는 자들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지금까지 천마신공의 마수에서 벗어난 자는 고삼 그자밖에 없다. 그자를 생포해서 연구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당장 사람을 파견해서 고삼의 종적을 찾아라."
기회를 엿보던 사명군이 입을 열었다.
"대장로님, 소손이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는데 감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보거라. 지난번에도 네 덕분에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지 않느냐."
"격려 감사드립니다. 천마신공의 수련법은 미친짓을 해야 한다고 지금까지 추론됩니다. 그러니 천마신공을 익히기 전 혹은 익히면서 살인방화와 같은 체험을 하는 것이 무공을 익혀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주가 돌아올 때 장현성과 단둘이 돌아온 것을 보면 호위대를 직접 쳐죽인 것 같습니다. 무공을 익혀내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요?"
교주의 고산종의 무공은 타격부위가 아닌 전신에 타격을 주는 무공이기에 사인을 밝히기 힘들다. 시체에 아무런 단서가 남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가지 상황을 종합해 보았을 때 교주가 천마신공을 익혀내기 위해 호위대와 무고한 사람들을 직접 죽였다는 추론이 매우 그럴듯하다.
"이미 미쳐버린 아이를 잘 알려지지 않은 시골에 풀어놓아라. 그러고도 광증이 나아지지 않으면 그자리에서 죽이도록 해라."
사장로의 명에 가주는 고개를 숙였다. 천마신공을 익히는 아이 대부분은 가신이나 방계의 아이들이지만 몇몇은 직계혈손이다. 지금 미쳐버린 아이가 둘이 있는데 두번째 미쳐버린 아이는 직계혈손이다. 만약 첫번째로 미쳐버린 아이가 살인을 저지르고도 광증이 나아지지 않으면 직계의 아이도 처단해야 한다.
"그리고 천살을 제거할 계획도 꾸며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사명군의 말에 사장로와 가주를 비롯한 모두가 이마를 찌푸렸다. 이들이라고 모르는 것이 아니나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말을 아낀 것이다. 미리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에 대해 모두 말을 아끼고 있는데 사명군이 철없이 말을 꺼낸 것이다.
"예전에 천살이 당문에 갔을 때 칠변절독을 마시고 목숨이 위태로운 적이 있다고 합니다. 결국 목숨을 보전했지만 아무래도 당문에서 우리 명화신교와 척을 지지 않기 위해 해독해 준 것으로 판단됩니다."
사명군은 잠깐 말을 멈췄다. 회의에 참석한 가문의 중책들이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이 상황이 짜릿했다.
"당문에 대라신선도 죽일 수 있다는 무형지독이 있다고 합니다. 훔쳐내든 대가를 지불하고 얻어내든 그 무형지독을 얻어낸다면 천살도 죽일 수 있습니다."
- 작가의말
棄心練功, 마음을 버리고 연공하다. 역시 일석이조의 고효율 소제목입니다. 여러분, 저를 경제부총리로...
절세신응을 안 보신 분들은 영생결이라는 이름이 낯설수도 있겠습니다. 괴령이 찾던 혈경이 바로 천살이 익힌 불사공입니다. 둘의 인연이 참 깊네요. 외전에서까지 재회한 걸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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