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타풍운
송운자는 예전에 태극혜검을 읽은 후 곧바로 몸을 덜덜 떨면서 힘들어했다. 천살이 한참이나 태극혜검을 들여다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자 통순은 실망의 기색을 억지로 감췄다. 글자수가 많지 않아 금방 암기했지만 각 글귀의 위치까지 정확히 기억하느라 천살은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암기를 끝낸 뒤에 모옥을 나오면서 천살은 지나가듯 질문했다.
"장문인께 질문이 있습니다. 태극혜검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은 겁니까? 도포 어디에도 태극혜검이라는 네글자가 보이지 않았는데요. 제가 부족해서인지 태극만 보이고 혜검은 없었습니다."
통순은 천살의 뒤에 서서 천살의 등만 바라보았다. 태극혜검을 한눈이라도 보았다가 무공을 잃을까 겁이 난 것이다. 그래서 천살의 말에 대답이 궁했다.
"수련이 부족해서 태극도 보지 못했소. 누가 태극혜검이라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고 있소."
천살은 여섯 수하들을 데리고 무당산을 떠났다. 통순은 새로 폐인이 된 스물이 조금 넘는 사형제와 사숙들을 바라보며 머리가 아파왔다. 내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팔의 근육과 힘줄이 전부 가닥가닥 끊어졌다. 많은 영약을 소모하면 상처를 회복할 수 있지만 다시 무인으로 살아가기는 힘들다. 치료가 가능한 상처를 그대로 두고보기도 그렇고 귀한 영약을 대량으로 소모하는것도 아까우니 진퇴양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천살과 통순이 밖으로 나가자 송운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잘 개여진 도포를 다시 펼쳤다. 도포를 보고 태극혜검이라고 이름을 지은것이 송운자였다. 하지만 도포에서 얻은 깨달음을 제대로 음미하기도 전에 전신이 덜덜 떨리면서 눈에 띄는 모든것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얼굴 생김새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말을 하는것이 가능했다. 그저 무공을 사용할 수 없었을 뿐 걷고 달리는 것도 전부 가능했다. 하지만 무공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태극혜검을 파고들수록 점점 행동의 어려움을 느꼈다. 결국에 차려준 밥상도 마음에 안들어 직접 걸어다니며 열매를 따먹고 겨울에는 눈속의 풀뿌리를 파먹거나 나무가지를 씹어먹었다.
천살의 말을 듣고 느끼는 바가 있어 다시 펼쳐보니 과연 태극만 있고 혜검은 없었다. 송운자가 무당파의 최고수이자 검의 최고수이기에 무의식적으로 태극을 검에 가둬버렸다. 무한한 태극을 유한의 검에 가두니 그 본질이 가려져 지금까지의 모든것들이 부정당했다. 태극을 가둔 혜검이라는 우리를 부숴버리니 그제야 제대로 된 태극이 보이기 시작했다.
송운자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 상태에서 정좌자세를 한 송운자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태극이 세상만물이 되고 세상만물이 태극이 되었다. 결국 태극은 대단하고 신비한 것이 아니다. 재채기 한번 하더라도 그안에 태극이 있었다. 태극은 형태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지만 어떠한 형태도 가능하고 어떠한 소리도 가능하며 어떠한 감각도 가능한 무엇이다.
다시 눈을 뜬 송운자의 왜소했던 몸은 적당히 살이 붙어 풍채가 늠름했다. 자신의 찢어진 도포를 벗어던진 송운자는 장삼풍조사가 깨달음을 적은 도포를 입었다. 모옥 밖으로 나오니 세상이 새로웠다. 송운자의 눈길을 받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가 둥실 떠올랐다. 송운자는 몸을 가볍게 날려 나뭇가지를 밟았다.
삼청전의 연무장에 도착한 송운자는 목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나 송운자가 명하니 무당의 제자들은 전부 삼청전의 연무장에 모이도록 하거라."
명상의 과정에서 송운자는 무당 제자들의 마음들이 느껴졌다. 시기와 질투, 욕망과 배패감으로 가득찬 제자들의 마음은 송운자를 괴롭게 했다. 아름다운 마음들도 간혹 느껴졌지만 무당의 공기는 대체적으로 혼탁하고 더러웠다.
'삼풍조사님, 그간 많은 고통을 받아오셨군요. 왜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셨는지 모르지만 이 송운자가 감히 무당을 바르게 세우겠습니다.'
삼청전에 도착한 무당제자들은 나뭇가지 하나에 몸을 실은 송운자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크게 화난 송운자의 표정을 마주하자 서있을 용기가 사라져 무릎을 꿇었다.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뉘우쳐야 할 것만 같았다.
대부분 제자들이 무릎을 꿇었고 두다리로 서있는 자들은 몇명 되지 않았다. 명상중인 현허를 제외하고 모든 무당제자들이 모이자 송운자는 입을 열었다.
"내 끝내 미몽에서 깨어나 무당을 바라보니 구더기가 득실거리고 악취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오늘부터 무당의 제자들은 전부 검을 놓고 도경을 잡고 마음공부에 전념해야 한다. 마음이 바르지 않은 자가 어찌 검을 잡는다는 것이냐. 내 허락이 있기 전까지 검을 잡는 자는 무당에서 축출하도록 하겠다."
송운자의 추상같은 호령에 누구도 대꾸를 하지 못했다. 며칠전에 이미 밖에 나간 무당제자들을 전부 불러들였기에 몇몇만 제외하고 전부 삼청전의 연무장에 모여 있었다.
"도인이 검을 수련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바로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몸을 바로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을 날카로운 검으로 벼리려 하는구나. 너희는 사람이고 도인이고 무당의 제자이다. 왜 사람이 되려 하지 않고 날카롭기만 한 검이 되려는 것이냐!"
송운자의 벼락같은 질타는 바람을 부르고 구름을 모았다. 곧 소나기가 되어 무당제자들의 몸과 마음을 씻어내려갔다. 더러움이 너무 많이 쌓여 악취가 가시지 않는 자들도 있지만 무당의 대부분 제자들은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새롭게 할 수 있었다. 오년이라는 시간동안 봉문을 하게 되었지만 무당제자들의 마음에 드리웠던 먹구름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시각 무림맹에서는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무당과 마교가 비무를 해서 패배한 측이 봉문을 하기로 했는데 무당이 패배했다고 하오. 그래서 향후 오년간 봉문을 한다고 하는데 모두 자신의 생각을 기탄(忌憚)없이 말해보시오."
"마교의 첩자들이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마교교주와 그 밑에 장로들도 의아해 한다고 합니다. 소교주라는 자가 단독으로 진행한 일 같은데 마교의 음모라고만 의심하지 말고 마교도 몰랐던 일이라 상정하고 대책을 의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천신공에 대한 소문은 어떻게 된 것이오?"
"우선 강호에 천신공이 일반인이나 평범한 무인을 단기간에 고수로 만들 수 있는 무공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습니다. 첩자들이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횡련일기공이라는 외공을 어느정도까지 익힌 자들만 천신공의 특혜를 받을 수 있다 합니다. 지금 마교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은 천신공으로 고수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소문이 황실까지 들어갔을테니 그쪽 반응이 궁금하오."
"황실은 첩자가 아니라 우리 뇌물을 받은 자들이 소식을 전해옵니다.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습니다. 아마 그쪽도 소문의 진위를 가늠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할 듯 합니다."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 천신공인가 천마공인가 하는 무공으로 강해진 자들 중 연고도 없이 갑자기 죽어버린 자들이 있다고 들었소. 이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고증(考證)은 어떻게 되었소?"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역공작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교의 무리들중에서도 천신(天神)공이 아니라 천마(天魔)공이 아니냐는 말이 은밀히 떠돌고 있습니다. 다만 저들이 종교적인 충성심과 신앙심이 강해 아직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홀로 무당을 봉인시킨 소교주라는 자가 저들과 합류하면 큰일 나는 것 아니오? 우리는 그에 대한 대처가 있으시오?"
"소림의 원각대사와 남궁가의 남궁천 대협, 서문가의 서문고검 노가주가 지금 무림맹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해남파의 장문인과 보타암의 암주, 팽가의 최고수라는 팽월과 진주언가의 최고수 언장동도 얼마뒤면 도착할 것입니다. 그외 개방의 전대방주인 정운산 태상방주께서도 한손 거든다 하셨습니다."
"서무림맹이라는 작자들은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다고 하오?"
"점창파까지 끌어들여 아주 단단한 연맹을 맺고 있습니다. 당문이야 무공고수가 없기에 크게 아쉽지 않은데 청성과 아미에는 서문노가주와 비슷한 고수들이 있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우리가 큰것을 내놓으면 서무림맹도 끌어들일 수 있을듯 합니다."
"모용세가를 잘 설득하시오. 모용세가의 쌍둥이 형매는 고수를 상대하기에 부족하지만 평범한 무인들을 상대로 매우 큰 위력을 보이니 마교와 전면전이 벌어지면 당문과 마찬가지로 큰 위력을 발휘할 거요. 서무림맹에 대한 설득은 계속 진행하시오. 우리와 마교가 양패구상하면 서무림맹이 천하를 좌지우지할 것이오."
주체는 경이의 눈빛으로 천살을 바라보았다. 지난번에는 개봉의 장원이라 침입할 여지가 충분했다. 자객의 침입에 대비할 생각이 없이 지은 건물이기에 파고들 틈이 여기저기에 있다. 하지만 황궁에 침입하는 것은 다른 얘기다. 그것도 지난번 천살이 침투한 이후 수많은 훈련을 거쳐 침투에 대비했기에 더욱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일개 초민 천살이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보잘것없다 보니 폐하께 제 소리가 닿지 않더군요."
"말투가 변했군."
천살은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송백자에게 복수를 한 후 마음이 많이 가벼워져서 웃음이 어색하지 않다.
"지난번에야 빚받으려고 했으니 말투에 좀 위압감을 실었지요. 이번에는 협상하러 온 것이니 당연히 본분에 맞는 말투를 사용해야지요."
"한선후는 또 무슨 요구사항이 있어서 그대를 보낸 것인가?"
"이번에는 한선후가 아니라 제 자신을 위해 왔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강호의 소문을 들으셨을 겁니다."
천살은 한선후의 천신공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것을 설명했다. 명화교의 충성심과 신앙심으로 가득한 교도들이 천신공으로 강해지면 일당백의 군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내가 최신으로 받은 정보에 의하면 천신공인가 뭔가 하는 무공은 사술이라서 그것을 받은 자들 중 갑자기 졸사(猝死)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네."
"일반인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명화교는 다르죠. 오랜 시간동안 박해를 받아왔기에 아직도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목숨따위는 아까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명화교에서 재물을 풀면 목숨을 걸 자들이 널리고 널렸을 겁니다."
"자네 뜻은 잘 알겠네.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건가?"
"이 모든것의 원흉은 한선후입니다. 한선후만 죽이면 모든것이 해결됩니다. 폐하께서 무림맹을 움직여 한선후를 따로 분리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한선후를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네. 내가 손해볼 일은 없겠구만. 내 사람 한명 붙여줄테니 그 사람을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면 될 걸세."
황궁을 떠나는 천살의 곁에는 금의위의 무인 한명이 따랐다. 표운이라는 이름을 가진 금의위의 무사는 천살의 곁을 따라다니며 정보를 제공하고 계획의 진도를 알리는 역할을 하기로 했다. 표운은 천살을 천대인이라 칭했고 천살은 표운을 표대인이라 칭했다.
천살이 황궁을 떠나자 주체는 심복들을 불러놓고 북평에 수도를 옮기기 위해 황궁을 건설할 것을 명했다. 황궁을 지을 때 자객의 침입을 잘 막아낼 수 있게 지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천살과 같은 자들이 한둘이 아닐테니 응천부의 황궁이 안전해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한선후는 임신한 몸으로 도망온 한화령을 앞에 두고 있었다. 천살이 무당을 봉문시켰다는 정보에 무림맹의 음모인가 고민하고 있는데 한화령이 천살을 직접 확인했다는 말을 듣고 머리가 복잡해졌다. 천살이 괴령의 마수를 벗어났다면 자신에게 복수를 할 궁리를 해야지 왜 자신에게 유리하게 무당을 봉문시켰는지 의문이었다.
만약 천살의 몸을 차지한 괴령이 한 짓이라면 괴령이 마음속으로 딴생각을 품은게 아닌지 알아봐야 한다. 이혼술은 그저 몸을 바꾸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괴령이 천살보다 더 강한 무공을 익혀냈다면 한선후는 경각심을 가지고 괴령을 대해야 한다.
- 작가의말
叱咤風雲, 질타하다는 꾸짖는다는 말입니다. 질타풍운은 질타하는 기세가 너무 강해 바람이 불고 구름이 움직일 정도라는 뜻입니다. 광개토대왕이 질타풍운했다라는 식으로 일세를 풍미한 사람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외전을 빼면 이번 편이 진정한 100화입니다. 제가 100화를 채울 일이 생길줄은 몰랐습니다. 앞선 두 글 전부 95화에 끝났습니다. 보통 황제를 구오지존이라고 합니다. 95는 인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입니다. 96부터는 신선이나 부처님 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교롭게 둘다 95화에서 끝난것은 아직 부족하다는 하늘의 일깨움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100화를 달성하고도 아직 뒤에 내용이 꽤 남아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거만해 지도록 하겠습니다.
주체가 왜 응천부(남경)에서 북평(북경)으로 수도를 옮겼는지 이번 편에서 밝혔습니다. 사학자들이 머리를 싸매도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알고보니 천살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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