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허도법
장삼풍은 무당의 개파조사가 아니다. 달마가 원래부터 존재하던 소림사에 가서 면벽을 하고 결국 소림의 조사소리를 듣는것과 마찬가지로 원래부터 있던 무당파에 장삼풍이 몸을 의탁했고 결국 무당의 조사소리를 듣는 것이다.
현허는 원래부터 무당의 제자이지만 장삼풍의 고강한 무공에 반해 사부로 모셨다. 하지만 장삼풍의 무공을 배워서 사용하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는 장삼풍의 무학을 배워 무공 하나를 창안했다. 장삼풍이 직접 현허도법(玄虛刀法)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천살은 진무검을 무당에 돌려주고 대신 잘 제련된 검 하나를 받았다. 보검은 아니지만 균형이 잘 잡히고 튼튼하게 만들어진 검이다. 다만 음혈에 비해 작고 가벼워서 천살이 사용하기에는 조금 불편했다. 다행히 육체적으로 완성되었기에 조금 사용하면서 새 검에 적응하면 크게 문제될 건 없다.
천살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현허는 송백자의 사숙이 되는 사람으로 현재 무당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당의 제자들이 점점 세속화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무당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봉문이 걸린 일이어서 사질들이 간곡히 청하지 않았으면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현허는 속으로 자신만 이기고 남은 셋이 연속으로 져서 무당이 봉문을 하기를 바랐다. 강호에서의 활동을 줄이고 무공수련에 오년간 전념하면 탐욕에 물든 제자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정화될 것이라는 바람 때문이었다. 비록 천살의 경지를 정확히 짐작하기 어렵지만 현허도법이라는 절세의 무공을 극성으로 익혔기에 패배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비무가 시작되었지만 도와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한번도 울리지 않았다. 현허도법은 초식이 없고 무의만 있는 도법으로 여일(如一)을 핵심적인 무리로 도법을 펼친다. 여일이라 함은 도가 한번 공격을 나가면 반드시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방어를 할 때도 상대가 공격을 멈추고 수비에 임할 수밖에 없는 공격으로 방어를 대신했다.
화산의 청풍부월검은 열세개의 식이 있다. 그 열세개의 식을 대성하여 그속의 무의를 참오한 후 그 열세개를 본인의 경지에 따라 섞어서 자신만의 초식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위력면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없지만 서창훈의 분류방식대로라면 아예 식조차 없는 현허도법이 청풍부월검보다 더 상승의 무공이다.
천살은 예전에 호군천의 청풍부월검을 상대하면서 유초에서 무초로 넘어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초식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덕분에 성라운포의 초식을 만들어내고 응익검에 대한 큰 발전도 있었지만 그 경험이 천살에게 커다란 벽이 되고 말았다.
현재의 천살은 육체적으로 완성되었기에 초식 사용중 정확하지 않거나 불합리한 부분이 있으면 알아서 수정해 나간다. 배우지 못한 자들은 자신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있고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배워서 많이 아는 사람은 그 불합리를 발견하고 고치려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허는 천살의 나이가 스무살 정도라고 들었다. 내공의 경지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명화교의 교주들은 대대로 강대한 내공을 보유하여 내공의 성취는 낮지 않았다. 하지만 내공이 강하다고 무공마저 강한건 아니고 무공이 강하다고 싸울 줄 아는건 아니다. 한림아가 배위에서 주원장의 수하들에게 어이없이 죽임을 당한 것만 봐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응익검법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속으로 기만책이거나 오만한 작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쾌, 변, 환, 중, 강 등 무리가 무난하게 섞인 응익검을 마주하자 평가를 곧바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속임이 없이 본인이 만들어낸 검법이라면 이자는 장래 사부인 삼풍도인과 비슷한 높이까지 오를 수도 있다.
다만 응익검이라는 검법은 찌르기의 위력이 강하고 베기나 내려치기는 위력이 평범했다. 그리고 보통의 검법들은 여러가지 검의를 동시에 섞지 않는다. 쾌와 환을 위주로 한다는 말은 수비와 상대를 현혹시키는 것을 환으로 하고 기회를 포착했을 때 쾌로 반격을 한다는 말이지 일검에 쾌와 환이 동시에 섞여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천살은 단순한 쾌를 사용했을 때의 찌르기의 위력은 평범하다. 하지만 쾌에 환이나 변을 섞으면 그 위력이 급증한다. 즉 쾌를 극으로 익히지 못한 주제에 다른 검의와 섞을 수 있고 그 섞은 효과가 매우 좋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무공수련의 절차를 밟지 않고 홀로 여러가지 무공을 마구잡이로 배운 자들이나 가능할 법한 행태였다.
"소협객, 진짜 본인이 창안한 거요? 각각의 검의는 끝을 보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섞을 수 있다는 말이오?"
현허의 공격 역시 천살을 적중하지 못하고 있다. 천살의 응익검 역시 수비를 모르는 검법이다. 애초에 무공검법 자체가 수비보다는 회피후 반격을 더 좋아하기에 그 영향을 받아 아예 수비는 없었다. 현허의 공격에 천살은 회피를 하며 반격을 가했고 그 반격에 현허 역시 공격으로 반격하는 중이다.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기연을 얻어 부족한 실력에도 검법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만 자질이 부족해서 체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허는 그제야 천살의 현재 상태를 알 수 있었다. 큰 깨달음을 얻었지만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서 불균형이 생긴 것이다. 현허는 마음속에 큰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비무도중 천살의 초식은 점점 균형적으로 바뀌고 있다. 초식의 위력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지만 안정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천살의 무공을 완성시켜주는 것 같아서 비무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현허도법은 지금까지 불패의 도법이었다. 승리를 못하더라도 평수를 이룬다는 것이 현허도법에 대한 평가이다. 현허도법은 공격한 도를 회수할 때 방출했던 내력의 대부분도 회수한다. 그리고 태극의 묘리가 들어 있어서 움직임에 많은 체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력적인 도법은 아니다. 강한 힘으로 상대를 타격하는 도법이 아니라 경지로 상대를 누르는 도법이다. 경지가 부족한 자들은 현허도법을 상대하다 알아서 비무를 포기하고 경지가 높은 자들도 현허도법과 겨루다가 지쳐서 나가 떨어진다.
생사투라면 현허도법의 위력이 조금 부족하겠지만 비무에서는 극강이라고 할 수 있다. 현허는 여든이 되던 해에 연속으로 여섯시진 비무를 한 경험이 있다.보통의 무인들은 일각만 되어도 체력이 소진된다는 점에서 볼 때 현허도법은 대단한 무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비무를 중단하자면 현허가 패배를 인정하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패배를 인정하면 뒤에서 비무에 임하는 자들의 사기가 말이 아닐 것이고 계속 비무를 이어가자니 천살의 무공수련을 도와주는 것 같아 망설어졌다. 다행히 도법을 극성으로 익혔기에 마음이 조금 흔들려도 도법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그래, 무당의 제자들이 이 비무에서 뭔가 얻는게 있다면 손해는 아니겠지.'
현허는 최선을 다해 비무에 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자신의 도법을 제대로 펼쳐내는데만 집중했다. 도법의 위력은 변화가 없었지만 더욱 정교한 공격이 천살에게 향했다. 도법의 경지가 높아 허와 실이 구분되지 않기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공격에도 천살은 최선을 다해야 했다.
"처음부터 초식을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초식을 만들었다가 필요 없다 생각되어 버리셨습니까?"
천살이 질문해오자 현허는 대답을 궁리했다. 무당의 제자들도 듣는 대답이다. 오해가 생기지 않게 확실하게 대답해야 한다. 괜히 자신의 말때문에 주화입마에 드는 제자가 생겨서는 안된다.
"초식을 만들려다 실패했소. 마음에 드는 초식이 하나도 없었소."
천살과는 달리 현허는 비무상대가 도처에 넘쳐난다. 초식을 만들면 항상 비무로 점검했다. 하지만 항상 쉽게 간파되었다. 하지만 초식을 만들고 비무하고 또 초식을 수정하거나 다시 만드는 과정에 쌓인 경험으로 현허도법은 무초의 도법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위력이 부족한 거였군요."
천살의 대답은 현허의 뇌리에 강한 충격을 주었다. 초식이라는 것은 무공의 위력을 극대화하는 존재이다. 위력이 확실히 검증된 것들을 반복수련으로 숙달해서 비무나 실전에 사용함으로 무공의 위력을 보장하는 것이다. 현허도법은 정식으로 초식을 가진적이 없어서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위력이 부족했다.
무공의 경지에서 무초가 유초보다 더 높은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초를 추구한 현허도법은 태생적으로 위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무공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초식이고 그런 초식을 극의까지 익힌 후 그 초식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지만 그 위력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무초의 경지이다.
현허도법에 단 하나의 초식이라도 존재했다면 현재 현허도법의 위력은 그 초식의 수준까지 올라갔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초식이 없었기에 경지에 비해 위력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
'사부님이 말년까지 초식의 연구를 계속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구나. 나는 우물안 개구리였을 뿐이구나.'
비록 실전에서의 위력이 약하지만 무초의 도법을 만들어냈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자부심이 천살의 한마디에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평범한 자들이라면 여기에서 무너졌겠지만 현허의 마음수양은 그렇게 얕지 않았다.
'응익검법의 초식들의 위력이 강해보이니 이 기회에 초식 하나 만들어보자.'
초식의 위력만 강하고 초식의 안정성이나 범용성 등이 부족한 응익검과 초식의 제한을 벗어버렸으나 위력 자체가 미미한 현허도법이 만나 서로의 장점을 탐스럽게 흡수했다. 지난번 청풍부월검을 상대할 때와는 달리 천살은 이미 모든 준비가 다 된 상태이다. 비록 초식의 수련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지만 완성된 육체 덕분에 장애가 되지 못했다.
안정적이던 둘의 비무가 흉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현허도법이 자연스러움을 벗어나 부자연스러움으로 강한 위력을 내기 시작했다. 조금 부자연스럽던 응익검이 점점 자연스러워지며 그 위력이 줄어들었으나 안정성이 생기며 현허의 도를 막아내기 시작했다. 비무가 시작된 지 반시진이 지나서야 겨우 둘의 검과 도가 한번 부딪혔다.
현허는 천살의 검에서 전해져오는 강한 진력에 급히 태극의 묘리로 힘을 흩어버렸다. 천살은 현허가 어렵지 않게 진력을 해소하는 것을 보고 손목과 손가락의 미세한 움직임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었다.
현허도법이 응익검을 닮아가고 응익검법이 현허도를 닮아갔다. 화산에서 청풍부월검을 닮아가다 부족한 경지때문에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거침이 없었다. 무당의 제자들은 한시진이나 되어도 지친 기색이 없는 현허에게 속으로 갈채를 보냈다.
경지가 낮은 자들의 눈에는 초반에 천살이 강한 공격으로 압박했고 현허가 막아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현허가 공격 주도권을 가져가고 천살이 수비에 임하는 형태로 비춰졌다. 무당제자들의 눈에는 비무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비무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현허는 원래 비무시간이 길기로 유명하기에 걱정이 없었다.
송백자는 멀찍이 숨어서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직접 얼굴을 내밀면 천살이 비무에 나오라고 도발할까봐 나서지 않았다. 내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라 비무에 나설 수 없는데 천살이 먼저 비무를 청하면 체면만 깎일 뿐이다. 그래서 비무가 시작된 후 멀리서 지켜보았다.
"패배에 대비해서 준비를 해두거라. 당문의 절독을 준비가 있었다고 해도 이겨낸 걸 보면 보통놈이 아니다. 철저히 준비하거라."
송백자는 당무영의 일을 뒤늦게 알고는 천살이 칠변절독에 대해 미리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정보를 알았다고 해도 쉬운 독이 아니기에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 작가의말
요즘 쉽게쉽게 강해지는 주인공이 대세라고 해서 어쩔수 없이 대세를 따릅니다. 천살은 맨날 날로 먹네요. 당문호는 두번이나 죽음에 이르면서 고생했고 항응은 말먹이 먹이고 개도 돌보면서 이리저리 정처없이 떠돌며 객지생활의 서글픔을 제대로 알고 나서야 겨우 강해졌는데 말입니다.
여자 : 오랜만, 그간 잘 지냈어?
남자 : 오랜만에 연락을 주네, 너는 잘 지냈어?
여자 : 나 곧 결혼해, 너에게도 알려야 할 것 같아서.
남자 : 그래, 그때 우리의 사랑은 진심이었으니까. 알려줘서 고마워.
여자 : 그때 우리 엄마만 아니었어도 지금 우리사이가 이렇지 않았을 턴데.
남자 : 지나간 이야기 자꾸 꺼내서 뭐해, 어차피 지난 일인데 뭘.
여자 : 그래서 묻는건데, 요즘 우리 엄마랑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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