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고수
"오늘 형산파 제자와의 비무를 상세하게 설명하거라."
서장로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자 천사성은 미리 준비해놓은 말을 풀어놓았다. 반나절동안 혼자서 머리를 짜고 짜서 생각해낸 말들이었다. 이번에도 논어따위 보다는 잡서들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오전에 형산파가 도착하니 서문가에서 저에게 나와달라고 하더군요. 점심식사를 마치고 서문가주와 형산의 장로께서 비무를 한다 하여 모두 연무장에 모였습니다."
"두분이 서로 마주보고 일각가량 있었는데 제 눈에는 곧 출수하여 상대를 찌를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두분이 갑자기 검을 거두니 놀란 나머지 소리를 내고 말았습니다."
천사성이 힐끗 서장로의 표정을 확인해보니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제가 소리를 내어 형산파 장로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형산의 제자와 대결을 하라고 하더군요. 저는 거절하려 했으나 서문가주께서도 비무에 찬성하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등
떠밀렸습니다."
침을 꼴깍 삼킨 천사성은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는 거짓이 섞여있는 것이다.
"검을 잡고 마주섰는데 형산파의 제자가 섣불리 공격을 하지 않더군요. 처음 검을 잡아보는 저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구요. 그러다가 왼발이 간지러워서 발가락을 꼬물거렸습니다."
"그런데 형산파의 제자가 제 왼발에 눈길을 주는 것을 보고 부지불식간에 검으로 형산파 제자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서장로가 표정의 변화가 없자 천사성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목소리에 더욱 힘을 주어 말했다.
"형산파의 제자가 몸을 뒤로 젖히며 목검으로 제 목검에 부딪혀 왔습니다. 형산파 제자의 힘이 강해 목검이 날아날 듯 하여 찌르기를 멈추고 그 목검을 피한 후 다시 목을 찔렀습니다."
"형산파 제자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가만히 있더군요. 그렇게 비무가 끝났습니다."
서장로는 천사성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감탄했다. 무공을 배운적도 없는 자가 상대의 주의력이 분산된 틈을 알아차리고 찌르기를 했다. 만약 그 찌르기가 평범한 찌르기였다면 형산파의 제자가 몸을 젖히는 동시에 검을 부딪혀 오지 않았을 것이다.
둘중에 하나만 해도 되는데 둘다 한 것은 피할 자신이나 막아낼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상대가 회피나 차단에 자신이 없어할 정도의 찌르기를 중간에 거둔 것이다.
전력의 찌르기를 거둔다는 것은 고수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거둔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또다른 찌르기를 했다는 것은 웬만한 고수들도 못하는 일이다. 미리 그럴 생각으로 힘을 남기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천사성의 말을 들어보면 사전에 계획한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을 한 것이다.
천사성은 본의는 아니었지만 자신을 천고의 절세기재로 포장을 해버렸다. 자신이 무공을 익힌것을 숨기려고 한 것뿐인데 서장로에게는 장차 천하를 호령할 절대고수의 싹으로 보였다. 서문고검이 미리 천하제일검 운운한 것도 서장로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나를 형산파의 제자라고 생각하고 비무과정에 했던 것을 다시 해보거라."
서장로는 자신의 검을 뽑아 천사성에게 들려준 뒤 자신은 검집을 오른손에 들었다. 천사성은 정신을 집중한 뒤 왼발을 꼼지락거렸다. 왼쪽으로 갈듯 오른쪽으로 갈듯 애매하게 움직이는 왼발에 서장로도 한순간 눈길을 빼았겼다.
미리 알고도 눈길이 끌리는 것을 보니 형산파의 아이는 집중력을 완전히 빼앗겼을 것이다. 그때 천사성의 검이 서장로의 가슴을 향해 찔러왔다. 빠르지도 않고 힘있지도 않지만 서장로의 눈에는 감탄이 어렸다.
처음 검을 잡는 아이들은 철검의 예기에 주눅이 든다. 그래서 사람을 상대로 찌르기나 베기를 서슴없이 하지 못한다. 하지만 천사성의 검에는 필살의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찌르기의 동작이 하도 자연스러워 수련이 얕은 자라면 반응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서장로는 몸을 뒤로 젖히며 적당한 속도로 검집을 휘둘러 검에 부딪히려 했다. 서장로의 예상으로는 이정도 속도면 천사성의 검에 무조건 부딪힐 것 같았다. 하지만 천사성의 골반과 어깨 그리고 팔꿈치와 손목이 동시에 움직이며 검신이 빙글 돌면서 검집을 피해갔다.
서장로도 검집을 다시 움직여 천사성의 검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천사성의 후속타를 살폈다. 빙글 돌면서 기세가 다 죽어버린 것 같던 검은 다시 힘을 받아 서장로의 목을 향해 찔러왔다. 완전히 전력을 다한 뒤를 남기지 않는 찌르기였다.
천사성의 찌르기를 가볍게 피해낸 서장로는 검을 받아서 검집에 넣은 후 질문했다.
"이 찌르기는 어디에서 배운 것이냐? 움직임에 절도가 있는 것을 보니 분명 고된 수련을 거친 것 같구나."
"수련한 적은 없고 예전에 제가 가슴을 찔렸을 때의 그 찌르기입니다. 하도 기억에 남아서 오후에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서장로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얼핏 태악삼청봉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의미는 마기에 침습을 당하고도 상대의 검을 끝까지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서장로가 효자봉에 도착했을 때는 천사성이 아노의 명치를 가격한 후이고 조자운이 검으로 찌르기 전이었다. 그래서 조자운이 태악삼청봉의 초식으로 찌른것을 알고 있었다.
"태악삼청봉이라기에는 많이 변형된 것 같구나. 혹시 따로 검법을 배운적이 있느냐?"
"사실 형주로 오는 배에서 장로님이 수적들의 배를 베어버릴때 손동작을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가지가 섞인 듯 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어깨와 골반의 움직임은 자신과 매우 비슷한 것 같았다. 천사성의 말이 사실이라면 조자운의 태악삼청봉을 한번 보고 서장로의 손짓 한번 본 것을 섞어서 자신만의 찌르기를 만들어냈다는 뜻이다.
천살마기가 침범하여 천사성이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린 후 천사성을 화산제자로 받아들이려는 생각이 사라졌다. 무공을 모르는데도 강한 파괴력을 보여주었는데 무공까지 익히면 어찌될지 몰라 망설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형산제자와의 비무와 서문고검의 말을 듣고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현재 대제자인 조자운도 기재라지만 서창훈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서장로는 호군천에게 아주 큰 기대를 가졌었다. 검술에 대한 호군천의 재능은 진짜였던 것이다. 하지만 호군천은 부인이 병으로 죽은 후 검술이 더이상 발전을 보이지 않았다.
호매령도 검술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지만 안타깝게도 여자이다. 호매령이 남자였다면 다음대 장문인은 호매령의 차지가 되었을 것이다. 장삼풍이 우화한 후 무당에는 뛰어난 인재가 보이지 않았고 소림도 원각외에 절대를 논할만한 고수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화산도 마찬가지여서 서창훈이 사라지면 화산의 성세를 이끌어나갈 사람이 현재 없다. 그래서 서창훈이 무림맹의 결성을 바라고 무림맹주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무림맹의 힘으로 화산과 화산의 동맹들을 보호하여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화산의 성세가 여전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소림이 장삼풍 우화등선하기 전에 무림맹의 결성을 결사반대한 것도 그 이유이다. 무당이 무림맹주를 차지하면 소림은 무림맹이 존재하는 한 무당의 위에 올라서기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반대로 무당이 꺼려하고 소림이 무림맹을 결성하려 하고 있다.
소림이 잘 차려놓은 밥상에 화산이 숟가락을 들이밀려는 것이다. 무당도 소림과 화산중에 선택하라면 화산의 편을 들 것이다. 화산이 무림맹주가 되더라도 서창훈만 사라지면 화산도 천천히 몰락해갈 수밖에 없다. 무림맹의 존재는 그 몰락을 늦춰줄 뿐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서장로와 비견될 절대고수가 나타난다면 화산은 소림과 무당을 누르고 중원제일문파가 될 수 있다. 화산의 이름이 항상 소림과 무당의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서장로는 호군천과 좀 더 상의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천사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 호매령과의 혼인도 고려해볼 수 있다.
이튿날 형산파와의 담판은 싱겁게 끝났다. 화산은 이미 당문과 아미, 청성을 비롯한 적지 않은 문파와 동맹을 맺었다. 거기에 서문고검도 화산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원래부터 대등한 입장에서의 담판이 될 수 없다.
거기에 바로 전날 미래의 절대고수로 자라날 새싹을 확인했다. 천사성이 겨우 열한살이고 아직 무공에 입문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장원산에게 커다란 심적 타격을 주었다. 그래서 화산과 형산의 동맹은 화산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다.
천사성이 겨우 열한살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장현성은 호기롭게 웃을 뿐이었다. 형산파의 미래가 장현성의 손에 달렸다는 생각을 굳힌 장원산은 형산으로 돌아가면 좀더 활발히 활동하여 세력을 긁어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사성은 화산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장로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변화하였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수가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오던길과 마찬가지로 배에서 내리면 말이 준비되어 있고 말에서 내리면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도 막바지가 되어 점심도 되기 전에 서안에 도착했다. 화산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바로 출발해도 되지만 서장로는 천사성을 데리고 화룡표국으로 향했다. 화룡표국은 화산의 속가제자가 세운 표국으로 표사들의 무력도 강하지만 유사시에 화산이 발벗고 나서기 때문에 건드리려는 자가 드물었다.
화룡표국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도 서장로는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후 조금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천사성은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장문인 호군천이 화룡표국을 찾아왔기 때문이다. 천사성은 화산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호군천에게 포권만 올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밤이 되자 화룡표국은 문을 꽁꽁 닫아걸었다. 그리고 연무장을 횃불로 대낮처럼 밝혔다. 화룡표국의 표국주와 세명의 표두 그리고 서장로와 호군천 및 천사성만 연무장에 자리했다.
"사성아, 저 세명과 목검으로 비무를 해보거라."
- 작가의말
화산 정식제자, 다음대 장문인, 호매령과의 결혼. 이정도면 사이다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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