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련무공
서장로는 정기적으로 천사성의 몸속의 기운을 살폈다. 천살흉성에 먹힌 자들은 대부분 역사에 이름을 날리는 무장이 되었다. 잔인하고 사람을 죽이기 좋아하지만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본능적으로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무력이 강한 자들은 직접 전장에 나서기를 즐겼다. 하지만 적아의 구분은 명확히 할 줄 알았다.
천살요성에 먹힌 자들은 주변사람들을 홀려 결국 파탄으로 몰아갔다. 왕이 바뀌던가 아예 왕조가 바뀔수도 있었고 주변사람들을 반란에 끌어들여 구족이 멸 당하게 했다. 자기편이든 상대편이든 전부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천살요성이다. 거기에 천하를 환란으로 이끄는 것은 덤이다.
천살마성은 제명대로 못살고 죽으면 천하가 도탄에 빠진다는 기록밖에 없다. 천살마성의 기운에 먹힌 사람이 어찌 되는지는 아무리 찾아봐도 기록이 없다. 서장로는 천사성의 몸속의 기운을 자주 살피며 천살마기가 천사성에게 주는 영향이 어떤건지 알아내려 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 수확도 없다.
천사성은 서장로가 자신을 치료해줄 때의 운기경로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몸속에 내공이 전혀 없어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천축어로 된 불경들이나 역술서들을 읽으며 무료한 나날을 보내다가 찾아낸 무공검법은 구름낀 하늘의 한줄기 빛이었다.
대단한 암기력으로 검법서의 내용을 전부 암기한 천사성은 검법서를 침상밑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검법서의 네 초식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무공에 대한 기초가 전혀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서 연구해 나가야 한다.
묵구탐식의 수백개의 찌르기를 수련하는데만 일각이상의 시간이 걸렸고 체력이 부족한 천사성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체력회복이 빠른 덕분에 쉬는 시간은 짧았고 수련을 통해 체력이 길러지면서 한달뒤에는 하루종일 수련해도 크게 쉬지 않았다.
적구무의는 홀로 수련하기 어려운 초식이다. 상대의 공격을 회피하는 초식이기 때문이다. 천사성은 묵구탐식의 찌르기가 자신을 향해 온다고 상상하면서 회피연습을 했다. 오운밀포의 초식 역시 상대의 눈을 속였는지 알 방법이 없었고 소우만천의 연환검 초식 역시 상대가 없으니 수련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천사성은 놀라운 의지력과 상상력으로 극복해 나갔다. 자신을 둘로 상상하여 한편으로는 자신이 공격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 공격을 막거나 피해냈다. 오운밀포와 같은 경우 자신의 공격을 자신이 모를 수 없으나 오랜 시간을 거쳐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어내어 피할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을 내렸다.
몇달간 수련한 후 천사성은 무공검법을 다시 한번 꺼내서 읽어보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을 때와 몇달간 수련한 후에 읽었을 때의 느낌은 천양지차였다. 몇달의 수련을 거친
후 검법서의 설명과 서술들이 더욱 명확하게 느껴졌다. 천사성은 무공검법을 몇번이나 다시 읽어본 후 침상밑으로 다시 숨겼다.
무공검법을 무심히 한번 꺼내서 읽어본 덕분에 수련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아노의 건강도 회복된 후 아침저녁으로 서장로가 찾아와 동자공의 수련을 지켜볼 뿐 옥녀봉을 찾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천사성도 허락 없이는 옥녀봉을 떠나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천사성은 무공수련을 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또래들이 하루에 무공수련을 한시진 정도밖에 못하는데 비해 천사성은 네시진이상 수련에 몰두했다. 보통은 체력이 부족하거나 집중력이 부족해서 하루에 한시진씩만 무공수련을 해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천사성은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체력이 좋아졌고 집중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천사성은 유백이 시연했던 육합권의 투로를 나름대로 고쳐서 수련했다. 무공검법에서 서술한 주의점들과 많이 사용되는 동작들을 기존의 육합권에 융합시킨 것이다. 덕분에 투로가 한결 복잡해 졌지만 수련효과도 덩달아 좋아졌다.
하지만 매일 벽을 마주하고 수련하는 천사성은 자신의 수련이 효과가 있는지 알길이 없었다. 다만 팔다리에 힘이 붙고 몸도 점점 더 건장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의심을 애써 지우고 수련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내공만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동자공의 수련에도 열심히 임했다.
"장문인, 옥녀봉의 아이가 입을만한 옷 몇벌 마련해 주시게. 이번 형산파와의 만남에 그 아이를 데려가야겠소."
"태상장로님, 중요한 자리인데 화산이 제자도 아닌 아이를 데려가는 건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호군천은 서장로의 말에 반문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했다. 장문인이지만 안된다고 못박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다. 하지만 무공이나 명성이나 화산파에서의 중요도나 자신은 서장로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아마 장삼풍이 우화하기 전의 무당파 장문인도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마성이 한번 폭발한 아이네. 언제 어떤 계기로 마성이 폭발할 지 모르니 먼길을 혼자 떠날 수 없다네. 내가 없을 때 마성이 폭발하면 누가 그 마기를 억누를 수 있겠는가."
호군천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했다. 무공을 모르는 천사성이 괜히 화산의 위명에 먹칠을 할까 걱정되어 반대의사를 내비쳤는데 서장로는 허명따위는 생각도 않고 실리만 따지고 있었다. 자신의 이런 해이한 마음을 바꾸어야 다른 사람들이 서장로를 따르듯이 자신을 따를 것이다.
"그럼 화산의 속가제자들이 입는 옷으로 몇벌 준비하겠습니다."
호군천의 명에 의해 옥녀봉으로 가서 천사성의 치수를 잰 연화는 깜짝 놀랐다. 창백한 얼굴로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하던 작은 아이가 일년도 안되는 사이에 덩치가 무척 커졌기 때문이다. 연화가 알기로는 천사성이 올해 열한두살정도 된다. 하지만 덩치는 또래들보다 훨씬 컸다.
천사성은 서장로로부터 먼길을 나서야 한다는 말을 듣고 무척 들떴다. 어릴때 서장로를 따라 화산으로 향할때는 나이도 어리고 배의 통증때문에 좋은 기억이 없었다. 잡서를 읽으며 칼 한자루와 말 한필을 벗으로 삼아 천하를 주유하는 주인공을 부러워했던 천사성은 첫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찼다.
날짜가 되어 화음현으로 향하니 말 두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훈련이 잘된 말 두필은 성질을 전혀 부리지 않고 고분고분했다. 그래서 처음 말을 타는 천사성도 별 문제 없이 말을 천천히 달릴 수 있었다. 서안에 도착하니 누군가 와서 말을 받아가고 적지않은 인파가 둘을 환영했다.
서장로는 뭇사람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아주고 화룡표국으로 향했다. 화룡표국에서 하루 묵은 뒤 다시 말을 타고 마루터로 가서 배로 갈아타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어디에 도착하든 마중나오는 사람이 있었고 말이든 배든 미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천사성은 화산파가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문파임을 알 수 있었다.
서장로와 함께 하기 때문에 무공수련을 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은 천사성의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주었다. 목적지인 형주로 향하는 배에 오르자 서장로는 천사성에게 다음 도착지가 목적지임을 알려주었다.
"장로님, 세상은 참으로 큰 것 같습니다. 이 큰 세상을 다 돌아본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이 크다 하지만 결국 어디나 비슷하다. 서로 다름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 이유를 알고 나면 그 다름이 같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초식이 다른 것은 이유가 있는 법이고 그 이유를 알면 초식을 간편하게 줄일수 있다는 뜻이구나. 묵구탐식도 매일 수백개의 찌르기를 일일이 수련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었어.'
천사성은 서장로의 한마디 한마디가 금과옥조와 같다고 생각했다. 서장로의 기분이 나쁜것 같지 않자 말 몇마디 더 건네려고 했다. 하지만 천사성이 서장로의 말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배는 이미 먼거리를 나왔고 잡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수적이 갑자기 나타나 천사성을 방해했다.
"이 호도하의 물은 우리 교룡채앞을 흘러지나가는 물이다. 이 물을 타고 가려면 물삯을 내야 할 것이다. 사람 열명당 은자 한냥이니 선장은 빨리 물삯을 바치거라."
"아이고 어르신, 지난번 교룡채 셋째 어르신하고 도합 은자 반냥으로 합의를 보았습니다요. 장대걸이라고 말씀드리면 셋째어르신이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요."
"셋째 어르신? 지난달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이 잘린 삼당가 말이냐? 네놈이 그자식 군자금을 대준 배후이구나. 내가 그자식의 칼에 베어 큰 고생을 했는데 네가 그 보상을 해줘야 겠다."
수적은 아문지 삼년은 되어 보이는 흉터를 드러내며 으스댔다. 아무래도 수적들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모양이다. 그럴때면 반란을 진압하든 반란에 성공하든 한동안 수하들을 풀어준다. 그렇게 한동안 민심을 안정시킨 후 다시 정해진 금액대로 통행세를 받는 것이다.
선장은 얼굴이 해쓱해졌다. 겨우 삼당가를 구워삶았는데 멍청한 놈이 반란을 일으키다 제압당한 것 같았다. 평소처럼 생각하고 많은 돈을 준비하지 않았는데 오늘 큰 화를 당할 것 같았다. 삼당가라는 자는 선장과 동향이라 말이 통했는데 저자는 뼈다귀를 본 개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화산의 서창훈이라 하네. 평소대로 적당히 받고 보내주었으면 하네."
그러자 흉터를 자랑하던 수적이 말을 받았다.
"교룡채의 도벽화산(刀劈華山) 이오. 화산의 이름은 내앞에서 통하지 않소."
화산과 무당의 사이가 좋지 못한 이유중 하나가 무당의 무공초식 이름중 하나가 도벽화산이기 때문이다. 화산파에서 초식명을 바꿔달라고 요청했지만 무당파는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울컥 치솟는 화를 느끼며 서장로는 자신의 수양이 한참 부족하다고 느꼈다.
"화산파 태상장로 옥골선풍 서창훈이라고 한다. 오늘은 그 하찮은 목숨을 붙여두마."
말을 마친 서장로는 오른손을 한번 휘저었다. 수적들이 타고 있던 배는 곧바로 두동강이 났다. 예리한 칼로 두부를 벤 것처럼 단면이 고왔다. 물에서 푸덕거리는 수적들의 귀에 서창훈의 전음이 들려왔다.
'교룡채라, 언제 시간나면 한번 찾아가보마.'
선장을 비롯한 선객들은 서장로를 신선이라 칭하며 절을 올렸다. 오직 천사성만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서장로의 움직임에서 초식을 간편하게 줄일 수 있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 작가의말
暗練武功, 무공을 몰래 익히다.
Comment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