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승천
"나도 우화등선을 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러한 세상의 비밀을 옅보게 되었소. 짧은 순간 깊이 사고할 시간도 없이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을 했지. 지금에 와서보면 참으로 잘한 행동이었소. 자네에게는 참 미안했지만 말이오."
장삼풍은 우선 천살성하범이라는 다섯 글자를 적었다. 그 다섯글자로 인해 천살의 운명이 바뀌었다. 어릴때 숙모의 칼에 의해 죽었을지 아니면 아예 전염병이 생기지 않아 부모와 함께 평범하게 살았을지 장삼풍도 알수가 없다. 장삼풍 때문에 운명이 기구해졌을 수도 있고 장삼풍 덕분에 서창훈에 의해 목숨을 구원받았을 수도 있다.
다음 장삼풍은 선천지기에 관한 실마리를 남겼다. 서창훈이나 송운자 정도 되면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송운자가 깨달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송운자는 장삼풍이 적은 태극혜검을 보고 무공을 잃는 바람에 선천지기의 실마리에 신경도 쓰지 못했다.
세번째 안배가 바로 태극혜검이다. 하지만 장삼풍도 태극혜검을 급히 적으면서 이것이 효용이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천살마기과 비슷한 격을 가진 기운이 없기 때문에 태극을 이룰 수 있을지 장삼풍도 확신하지 못했다.
명화교의 신화공도 천살마기에 비해 격이 한참 떨어지는 기운이다. 천살의 단전속에서 천살마기의 존재를 발견하고 신화공의 생존본능이 발동해 천살마기와 같은 격의 기운으로 변화하지 못했으면 태극혜검이 아무런 소용도 없었을 것이다.
송운자와 청명자가 태극혜검을 보고 무공을 전부 잃거나 무공이 퇴보하지 않았다면 무당에서 결코 천살에게 태극혜검을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천살이 여러가지 기연이 거듭되어 큰 깨달음없이 경지가 높아지고 육체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태극혜검을 보고 무공을 잃어버려서 목숨을 잃거나 평생 감금되어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 안배는 그 순간의 시간동안 본능적으로 움직인 결과였지. 전후와 인과를 세세하게 따지고 치밀한 계산을 통해서 한것이 아니라오. 그래서 이 모든것이 내 의지인지 누군가 나를 움직인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겠소."
명화교가 모시는 광명신이 내렸다는 신화공, 당문의 독왕이 남긴 칠변절독과 무형지독, 장삼풍이 남긴 태극혜검, 명혜스님이 건넨 불경을 통해 그 존재를 알게된 복마전과 불사결, 불사결을 익힌 후 그 존재를 없애라던 지호스님의 부탁, 천살의 무공의 기반이 되어준 무공검법과 응익검, 이 모든 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가 천살을 괴롭혔다.
'지난번 큰 깨달음이 왔을 때 내게는 확신이 생겼다. 누군가의 개입이 없었다는 확신이. 하지만 내 경지에서 감지할 수 없는 곳에서 어떤 의지가 개입한 것이라면 내가 알 방도가 없다. 이 미망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미망인가 아니면 당연한 것인가?'
"삼풍진인의 태극혜검 덕분에 일원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태극이 상단전을 차지하고 더 높은 경지로 향하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이것도 진인의 안배인 것입니까?"
장삼풍은 허허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의 신비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매일 보는 옆집 할아버지 같이 느껴졌다.
"그걸 막고 있는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니오. 왜 자신을 속이려 하는 것이오."
천살의 머릿속에는 수천가닥의 벼락이 내리쳤다. 상단전마저 사라지면 장삼풍처럼 우화등선해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 걱정되어 천살 본인이 더 높은 경지로 나가는 것을 지금까지 막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자신도 알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자신을 '훌륭'하게 속여왔을 것이다.
"진인께 묻고 싶습니다. 그곳은 살기가 좋습니까?"
천살의 질문에 장삼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있잖소. 그대 마음에 달린 일인데 어찌 나한테 묻는 것이오."
도교의 대종사로 받들어지는 장삼풍이 불경의 말을 인용하자 천살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어차피 다 인간의 깨달음인데 불교 도교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삼십만 대군을 제압하고 황제를 구할 때 깨달음을 외면했던 것은 천효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것이 아니라 우화등선하기 싫어서 일부러 외면했던 것이다.
'부인과 아이들에 대한 정 때문에 욕심이 생겼고 그 욕심 때문에 내가 나를 속여왔구나. 이 세상에 대해 많이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내 마음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미망속에서 살아왔구나.'
"진인께 묻습니다. 지금처럼 내가 부르지 않으면 진인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장삼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인연을 정리했네. 그래서 그대가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나는 하범(下凡 - 범계에 내려오다)하지 못했을 것일세."
"그러면 우화등선을 하고도 이 세상에 자의로 내려올 수 있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오. 아미의 원공께서도 자주 이 세상에 내려오고 자네도 잘 아는 자들이 있소. 동박삭과 여동빈 이 둘도 우화등선 했지만 인간세상에 마음대로 내려올 수 있소."
"혹시 그 방법을 아십니까?"
"그 방법은 자네가 알고 있다네."
천살은 곧 정좌를 하고 명상에 들어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일생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고 오욕칠정과 희노애락의 구분이 사라졌다. 잘했던 일 잘하지 못했던 일 모두 지워졌고 결국에는 천살이라는 순수한 인간 자체가 남게 되었다.
상단전의 태극이 무극이 되었다. 무극은 일원의 또다른 이름이다. 무극과 일원이 하나가 되자 천살의 상단전이 지워졌다. 천살은 태산처럼 무거워진 육신을 벗어던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으로 하늘로 올라갔다. 그 곁에는 하얀 도포를 입은 장삼풍이 함께 했다.
장후는 무당의 제자이다. 하지만 아직 도호를 받지 못했다. 아이답지 않게 아침잠이 적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우화동을 청소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화동 주변에는 바람이 잘 불지 않기 때문에 바닥은 며칠에 한번씩 쓸면 되고 평소에는 주로 거미줄과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우면 된다.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싹싹 쓸어가던 장후는 심호흡을 했다. 앞에서 왼쪽으로 굽으면 천살성하범 다섯글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 다섯글자를 볼 때마다 장후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왼쪽으로 굽어돈 장후는 깜짝 놀라 빗자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천살성하범 다섯글자 옆에 새로운 글자가 생겨났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득정과승천(得正果昇天 - 정과를 얻어 하늘로 오르다) 다섯 글자가 장강물처럼 도도하고 태산처럼 웅혼한 기운을 품고 바닥에 씌어져 있었다.
"스승님, 스승님, 큰일 났어요. 누가 우화동 바닥에 낙서를 했어요."
아침 일찍 일어난 천화는 급하게 모친의 방으로 달려갔다. 원래 아침수련을 해야 할 시간이지만 수련벌레인 천화는 수련을 뒷전으로 하고 경공을 이용해 달렸다.
"너도 꿈에 부친이 찾아왔느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천화에게 호매령이 질문했다. 잠깐 다녀올데가 있다고 나간 천살이 갑자기 꿈에 나타나서 우화등선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항상 지켜보고 가끔 내려올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모친, 모친은 승천하면 안돼요."
호매령을 끌어안은 천화가 응석을 부렸다. 천살이 승천한데 대해 천화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부친이 신선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다만 신선이 된 부친이 자신의 모친마저 데려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고천양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자 천효는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맞아요. 부친이 우화등선 했답니다. 저보고 숙부를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다음번에 네 부친이 꿈에 나타나면 나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부탁해다오. 내 꿈에 와서 너도 데리고 갈까 하는 바람에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아들딸 낳고 모용부설과 깨 쏟으며 살던 고천양은 천살의 농담에 선몽이 악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급하게 옷을 차려입고 천효에게 청탁을 하러 온 것이다. 장원급제하고 학림원에 들어가게 된 천효는 호매령을 제치고 가문의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새벽이 어슴프레 밝아오기 시작한 시점에 당문에는 당무영의 웅혼한 내공이 담긴 목소리가 널리 퍼졌다.
"가문의 장로들과 각 대주들은 급히 가주전에 모이시오. 긴급회의가 있겠소."
당무영은 천살의 우화등선 소식을 알리며 천살이 사라진 후천마시대(後天魔時代)에 당문이 취해야 할 전략과 나아가야 할 방향들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당무영 본인은 회의에 집중하지 못했다.
'천형의 은혜를 백에 하나도 갚지 못했는데 이렇게 떠나버리면 이 당모가 부끄러워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가겠소. 그대의 후손들은 이 당문이 책임지고 세세손손 잘 지켜주겠소.'
천마가 무당의 우화동에서 우화등선 했다는 소문이 천하에 퍼져서 세상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예전에 하오문을 통해 퍼뜨렸던 정의천마설이 서서히 힘을 얻어가기 시작했다. 정의천마설에 반대입장인 자들도 천살의 악행은 이유있는 악행이었을 것이라며 마두천마설의 입장을 완화시켰다.
우화등선한 천마에게 주첨기는 고금유일독보군림왕(古今唯一獨步君臨王)의 칭호를 내렸다. 천양무관에 자리한 독보군림석을 구경하러 매년 천양무관을 찾는 자들이 십만을 넘었다. 천양무관의 제자들은 관과 무림에 고르게 퍼져 강호제일의 세력으로 거듭났다.
삼십여년의 선정을 베푼 주첨기가 붕어하자 천하의 백성들이 슬픔에 잠겼다. 만백성이 슬픔에 잠겨 있었지만 황제가 사무를 보는 양심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동창과 서창 그리고 대내행창의 우두머리들이 모여 새로 황제가 된 주기진과 함께 밀모를 했다.
"폐하, 정오품의 한림원 학사 천효와 정이품 병부상서 우겸의 세력이 너무 강대합니다. 군에도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천양무관 출신들이 군권을 꽉 잡고 있습니다. 강호는 모용세가와 당문 그리고 화산이 무림을 쥐락펴락하고 있습니다. 특히 화산장문이자 천효의 친동생인 천화는 현재 천하제일고수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언젠가 황권을 넘볼것이 분명합니다. 금의위는 이들과 가깝게 지내며 부귀영화만 탐하고 있습니다. 폐하를 지켜야 할 금의위의 충성이 밖으로 향하고 있고 수신호위(隨身護衛)인 보천위의 고위층들은 당가주 당무영이 직접 발굴한 자들이라 그 충성심이 의심스럽습니다. 폐하의 호위를 저희 대내행창에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동창과 서창 그리고 대내행창 중 동창의 세력은 금의위에 필적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이들은 주로 궁내의 일들을 맡았기에 천살과 친분을 쌓지 못했다. 천살과의 친분 덕분에 승승장구를 하는 금의위가 시샘이 났지만 선황제인 주첨기가 천살에 대한 신임이 너무 커서 경거망동을 하지 못했다.
새롭게 황제가 된 주기진은 귀가 얇고 영웅심리가 강하다. 그래서 홀대받던 자들이 의기투합해서 주기진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때 따뜻한 봄바람 같은 소리가 이들의 마음을 차갑게 얼려버렸다.
"나 천살이다."
주기진은 숨쉬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것이 없었다. 무릎을 꿇고 충성어린 표정으로 간언을 하던 사례태감들이 바닥에 몸을 바싹 붙인 채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삼십여년전과 다름이 없는 천살의 얼굴을 확인한 이들은 기겁하여 똥오줌을 지렸다.
"지켜보마. 잘해라."
말을 마친 천살의 신형이 사라졌다. 주기진은 손가락이 움직여지자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보천위는 지금 당장 이 역모를 획책한 자들을 끌어내서 즉참을 하거라. 그리고 한림원 학사 정오품의 천효를 정삼품 병부좌시랑으로 임명한다. 빨리빨리 조서를 작성하도록 해라."
- 작가의말
강호에는 하오문이 퍼뜨린 정의천마설, 초반 금의위의 공작이 먹히면서 퍼진 마두천마설, 소림과의 대결때문에 생긴 아수라천마설, 혈마교와 관련되어 황금천마설과 천마신공천마설, 그리고 천효만 아는 무림수호천마설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 더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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