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신투
당가주는 누군가 당문의 정보를 은밀히 수집한다는 소문을 접하고 장원의 경계태세를 높혔다. 그리고 당문의 암영대를 보내 당문의 정보를 캐고 다니는 자들을 감시하거나 체포하여 고문했다. 결과 돈을 받고 시키는 대로 하는 자들일 뿐 배후에 누가 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흐르자 다시 경계태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밤낮으로 높은 수준의 경계를 유지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다. 당문이 경계수준을 내리자 사장로가 보내온 자들이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가주는 매우 신중한 인물이다. 경계태세를 낮춘 뒤의 며칠이 가장 위험한 시기라는 것을 알기에 여러명의 장로와 함께 밤잠을 자지 않고 경계를 했다. 슬슬 밤이 새벽으로 넘어갈때 당가주와 장로들은 오히려 더 정신을 집중했다. 하늘의 밝기가 변하며 시각을 비롯한 온몸의 감각들이 그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감각이 가장 무뎌지기 때문에 침입자가 움직이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숨소리마저 죽이고 조용히 있던 당가주의 신형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표횰하게 움직였다. 사람이 아니라 얇은 종이가 바람에 날려가는 듯 했다. 당문이 자랑하는 신법인 낙화유수(落花流水)이다. 당가주가 멈춘 곳에는 느닷없이 인영이 하나 생겨났다. 아혈과 마혈을 점혈당한 인영은 당가주의 빠른 조치로 자결할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당가주는 곧바로 내공을 이용해 사람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귓등에 세침을 꽂은 장로들과 약당과 장서고 등 가문의 요처를 지키는 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침입자를 확인하고 한명 생포했다는 소식에 모두 기감을 더욱 곤두세웠다.
포로한 자를 암영대에게 넘긴 후 당가주는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방금 은신술을 사용하는 자를 잡아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미세한 기척이 발생했다. 사람의 기척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당가주는 내색을 하지 않고 있다가 암영대에게 포로를 넘기자마자 그곳으로 빠르게 향했다.
당가주의 신속한 움직임에 두번째 침입자 역시 자결을 하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칩입자의 목구멍에 걸린 독환을 손가락으로 집어낸 후 역시 암영대에게 넘기고 당가주는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은신술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 다른 곳에서 놓칠까 걱정된 것이다.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여섯명의 침입자를 체포했다. 총 여덟명의 침입자를 발견했는데 둘은 독환을 삼키고 자결했다. 남은 여섯은 암영대에게 심문을 맡기고 당가주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침상으로 향했다. 높은 은신술을 보유한 침입자들을 상대하느라 심력의 소모가 너무 컸던 것이다.
간밤에 여덟의 침입자를 발견했고 그중 여섯을 생포했다는 소식에 당문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날이 밝자 책임자들이 수하들을 인솔해서 사라진 물건이 없는지 일일이 확인했다. 점심이 지나서야 확인이 끝났고 사라진 물건이 없음을 확신하자 그제야 모두의 긴장이 풀렸다.
"경칠이,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술단지입니다요. 독의당 당주님이 분부하셔서 가져다 드리는 겁지요."
경칠은 어릴때부터 당문에서 자란 고아이다. 당문의 하인으로 지낸 시간이 삼십년은 되기에 반쯤 가족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조금 어려운 부탁이 있으면 모두 경칠부터 찾았다. 이런 시기에 술을 마시려는 당헌영이 한심했지만 직급상 당주인 당헌영이 자신보다 더 높다. 괜히 분란거리를 만들기 싫은 당고영은 경칠에게 가주나 장로들에게 들키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독의당은 장원의 외곽에 위치해 있다. 찾아오는 환자들을 진료해야 하기에 의당이 외곽에 자리해 있었고 독당과 합쳐 독의당이 된 후에 독의당의 당주실은 의당쪽에 만들어 두었다. 독의당에 가까워지자 경칠은 빈방으로 들어갔다.
얼굴의 가면과 옷을 전부 벗은 뒤 술단지를 배에 감았다. 그리고 새로운 옷을 갈아 입은 후 얼굴을 분장했다. 날쌘 걸음걸이에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걷던 경칠이 배가 조금 나오고 걸음걸이가 느릿한 노인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기척을 감지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빈방에서 나가 느릿한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노인이 밖으로 나가자 접객을 책임진 총관이 반갑게 인사했다.
"어르신, 당주님하고 얘기는 잘 되셨습니까?"
"덕분에 얘기는 잘 되었네. 며칠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나보고 마음놓고 기다리라고 했다네."
노인은 반년여전에 중독된 아들의 목숨을 구원받고 오백냥의 은자를 치료비로 내준 손큰 손님이다. 그때 접객총관을 비롯한 여럿이 은자 열냥 스무냥씩 들어있는 돈주머니를 받았다. 이번에 다른 자식이 또 중독되었는데 당문에서 사람을 보내 해독을 하는 겸 하독한 자를 잡아달라고 청탁을 하러 왔다. 접객총관은 품속에서 마음을 간질이는 돈주머니때문에 노인에게 시종일관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말 네필이 끄는 마차에 오른 노인은 당문에서 멀어지자 몰래 마차 뒷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경공을 펼쳐 수십리의 길을 단숨에 달린 노인은 평야에 멈춰 사람을 기다렸다. 한참뒤 노인과 마주한 자는 놀랍게도 사장로 본인이었다.
"무영신투, 시킨 일은 제대로 끝냈는가?"
"손자부터 내 아들에게 넘기시오. 손자가 무사하다는 신호를 받으면 곧바로 물건을 넘기겠소."
"내가 그대를 어찌 믿고 먼저 풀어준다는 말이오. 물건부터 확인합시다."
무영신투는 입을 벌려 소리내어 웃었다.
"사장로 당신이 무형지독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무슨 수로 확인할거요?"
사장로는 얼굴이 붉어졌다. 최근에 와서 자신이 노환이 온게 아닌지 의심이 된다. 한번 내렸던 명령을 두세번 반복해서 내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번에도 생각없이 뱉은 말인데 무영신투에게 지적당하고 보니 자신의 실책이 느껴졌다.
"다시 당신을 찾아내는 것은 우리 명화교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러니 먼저 그대 손자를 풀어주겠소."
둘은 대화도 없이 그대로 마주보며 서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무영신투가 입을 열었다.
"허튼수작을 부리지 않는게 사장로 당신에게도 좋을 것이오. 당문과 척을 지기 싫으면 말이오."
"당문과 척을 지는건 무섭지 않소. 다만 이 사모는 신용이 있는 자이오. 그나저나 당신이 훔쳐온게 무형지독이라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오?"
"술단지의 술안에 또 하나의 작은 단지가 있소. 그 단지안에 무형지독이 들어있을 것이오. 어차피 그곳에는 술단지가 이것 하나밖에 없었소. 만약 이것이 무형지독이 아니라면 정보를 캐온 당신의 수하들을 나무라야 할 것이오."
"은신술을 익힌 고급살수 여덟의 목숨을 버렸소. 만약 실패라면 무영신투 당신도 어느정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오."
무영신투는 사장로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자리를 떠났다. 당문이 경계태세를 낮추었을 때 사장로측의 사람들은 함정이라며 며칠뒤에 움직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무영신투는 지금이 적기라며 밀어붙였다. 그리고 아침에 분장을 하고 당헌영을 찾는다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준비해둔 술로 당헌영을 잠재운 뒤 경칠로 분장을 하고 무형지독을 훔쳐냈다. 어설프게 은신술을 사용하면 들킬 가능성이 높았기에 은신술을 사용하지 않고 훔쳐낸 것이다. 사라진 물건이 없는지 점검하느라 분주한 틈을 타서 사당의 비밀공간안에 있는 무형지독이라 짐작되는 술단지를 훔쳐냈다.
'그나저나 마교의 저력이 대단하구나. 어제 분명 아홉명이 침투했는데 여덟밖에 들키지 않다니. 마교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관동이나 안남으로 도망가야겠다.'
이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또 무영신투를 귀찮게 할 것이 분명하다. 물론 도망을 가기전에 하오문의 수뇌부들을 처단해 버려야 한다. 무영신투도 어떻게 보면 하오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장로가 건네는 돈과 무공비급 때문에 하오문의 수뇌부는 무영신투의 행적을 사장로에게 넘겨버렸다.
술단지를 건네받은 사장로가 조심스레 흔들어보니 과연 안에 작은 술단지 하나가 더 있는것이 느껴졌다. 경공으로 움직인 사장로는 귀주의 혈선들을 감시하기 위해 사들인 배에 앉아 소림으로 향했다.
명현공을 익힌 자들 아홉중에 여덟이나 잃었다. 하지만 경지가 가장 높은자가 남은것은 하늘이 사장로의 편이라는 뜻이다. 교주가 키운 명현공을 익힌 아홉의 살수는 어릴때부터 명령에만 따르게 세뇌되어 있었다. 교주가 아닌 사장로가 명을 내렸지만 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사장로의 명에 충실히 따랐다.
사장로의 배가 장강의 물결을 타고 동으로 흘러갈 때 고문을 견뎌내던 여섯명의 침입자들이 동시에 죽어버렸다. 침입하기 전에 미리 독단을 먹었던 것이다. 독단을 감싼 껍데기가 뱃속에서 천천히 녹으며 버티다가 시간이 되자 흘러나온 극독에 의해 순식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여섯 침입자의 죽음에 당가주는 간단한 일이 아님을 깨닫고 다시 점검을 명했다. 그리고 본인도 직접 움직이면서 사라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했다. 가주만 아는 몇몇 곳들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발길을 한 사당의 비밀공간에서 무형지독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가주, 무형지독이 황제를 죽이는데 사용되면 우리는 그대로 멸문이오. 빨리 방도를 찾아야 하오."
장로들의 재촉에도 당가주는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장로님들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문의 무형지독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것을 훔쳐낼 정도의 능력이 있는 자들이 황제를 암살하려면 굳이 무형지독이 필요하겠습니까. 무형지독을 훔쳐낸 것은 무형지독이 아니면 죽이지 못할 자라는 뜻입니다. 얼핏 생각나는건 천살과 한선후 그리고 남궁천이 있군요. 원각이야 죽어도 소림에 그렇게 큰 타격은 아니니 아마 저 셋중의 하나가 목표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누가 당문의 독인줄 알겠습니까."
"그래도 소문이 퍼지면 당문에 나쁜 영향을 끼칠걸세."
"그부분도 생각해 둔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무형지독의 해독약을 만들다가 멈춘적이 있지요. 독왕께서 남긴 기록만 보면서 만들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재물과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약이 효과가 있는지 확신도 없었죠. 하지만 이제는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천살이나 한선후가 목표라고 하면 우리는 그저 지켜보면 됩니다. 남궁천이 목표라면 상황을 봐가면서 구하든지 내버려두든지 하면 되죠. 그리고 해독약이 만들어지면 우리가 먼저 소문을 내야 합니다. 당문의 무형지독이 도둑 맞았다구요. 그리고 당문에 그 해독약이 있다는 사실도 알려야겠죠. 황제를 비롯해서 목숨 아까운 자들이 금덩이를 이고 당문을 찾을 것입니다."
장로들은 자신들이 가주 하나는 잘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는 더없이 조심스럽고 위기가 닥치면 더없이 대담하게 움직인다. 욕심이 크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욕심을 버릴 정도로 과단성이 있다. 무형지독이라는 당문 최고의 보물을 도둑맞아 모두가 심란한 가운데 당가주만 머리를 굴려 위기를 모면할 방도와 위기를 기회로 만들 방도를 생각해냈다.
사장로는 당문에서 발각되지 않고 안전하게 물러선 살수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자인 사진군이 바로 명현공과 소음공을 익힌 살수의 동료때문에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 사장로와 사씨가문의 미래가 이 살수의 손에 달려있다.
"이 그림에 있는 자를 잘 기억해 두거라. 덩치가 일반인의 몇배는 되어 보이니 얼굴만 기억하면 헷갈릴 일이 없을 것이다. 복마전에 들어간 후 이자를 찾아서 술단지안의 작은 단지안에 들어있는 것을 이자의 몸에 쏟으면 된다."
- 작가의말
여러분, 글이 곧 끝날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천살이 없어도 글이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천살은 죽어서 천마의 전설을 남깁니다. 천살은 좋은 주인공이었습니다. 최초로 주인공이 죽고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는 소설에 도전해볼 생각입니다. 글쓰는 저로서는 천살이 이 외통수를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내공도 없고 천살마기와 신화공이 서로 견제를 하는데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무슨 수로 살아나겠습니까. 개연성을 무시하지 못하는 저의 고충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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