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당천
새벽에 잠에서 깬 호매령은 우선 물을 따라 마셨다. 정신이 맑아지자 급히 천살을 깨웠다. 동자신이 깨졌으니 빨리 몰래 도망을 가야 한다. 어제는 술에 취해 생각이 거기에 미치지 못했지만 술을 깨니 가장 먼저 생각났다. 호매령은 달게 자는 천살을 깨우기 위해 천살의 몸을 흔들었다.
"또?"
천살의 말에 호매령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술을 깨고나니 자신이 했던 행동이 하나하나 전부 기억났다. 하지만 부끄러워할 시간이 없다.
"무림맹에서 노리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세요."
천살이 일어나서 바라보자 호매령은 황급히 손으로 몸을 가렸다. 그제야 아직 알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눈 감으세요!"
호매령은 천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었다. 천살이 갑자기 눈을 뜰까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옷을 다 입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천살을 재촉했다.
"저도 도울게요. 무림맹의 고수들이 당신을 생포하려고 가득 몰려있어요. 빨리 도망가서 같이 숨어 살아요."
천살이 몸을 일으키자 호매령은 몸을 돌렸다. 천살의 알몸을 마주하자 부끄러운 감정과 대놓고 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 충돌했다. 어제 술에 취해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들이 생각나자 다시 한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당신은 곧바로 화산으로 돌아가시오. 복수를 끝내고 당신을 찾겠소. 그리고 내 무력의 원천은 동자공이 아니니 걱정 안해도 될 것이오."
횡련일기공으로 모은 내공 중 일부는 혼원동자공의 내공이다. 만약 만혈개문의 경지였다면 내공이 전부 사라지는 건 아니더라도 일부 내공이 천천히 흩어지며 일정 기간동안 무위가 떨어졌을 수도 있다. 내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동자공의 기운이 천천히 흩어지며 내공의 운용에 지장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살은 이미 자연지경에 이르렀다.
천살은 정신을 집중한 뒤 의념으로 전신의 혈도를 개방했다. 혈도들이 활짝 열리자 서서히 흩어지던 동자공의 내공들이 급격히 흩어져서 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새로운 기운들이 몸속으로 빨려들어가 성질이 변하고 압축되어 호흡 백번할 시간도 되지 않아 몸속에 내공이 충만해졌다.
호매령은 비록 경지가 낮지만 근래 매화검만 수련하면서 감각이 예민해져 있다. 매화검의 수련이 성과를 보이며 체질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데 체질의 변화 때문에 몸의 감각이 곤두서 있는 것이다. 등뒤에서 천살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듯 하더니 갑자기 천년거암처럼 단단하게 변했다.
마음속에 품었던 천살에 대한 미안함이 사라지자 호매령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천살에 대해 영문모를 호감이 있었고 부친과 비무를 해서 부친이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폐인이 되자 맹목적인 미움이 생겼다. 호감과 미움이 섞여서 호매령을 괴롭히자 의식적으로 천살에 대한 생각을 줄이려 했다.
그러다 무림맹에서 천살을 생포하는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해오자 무작정 무림맹으로 향했다. 화산을 위해, 부친의 복수를 위해서라고 자신을 속여가며 왔지만 천살과 대면하고 취중에 자신의 진심을 알아차렸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멈추자 호매령은 몸을 돌렸다. 천살은 다가가서 호매령을 꼭 안아준 후 나직하게 속삭였다.
"화산에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나는 여태껏 누군가를 악의로 해치려고 한적이 없소.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나를 가만두지 않았소. 내 운명이 기구한데 힘이 없으니 지금까지 휘말렸소. 이제 세상에 이 천살이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알려야겠소. 누구든 나와 적대를 하려면 어떤 각오를 해야 하는지 천하사람들에게 깊이 각인시키겠소."
호매령은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제 조자운이 건넨 수건이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했지만 정신을 차린 지금 알수 있었다. 처녀가 사내를 유혹하러 가는것은 성공여부를 떠나서 부끄러운 일이다. 얼굴을 가리면 그나마 조금 나을 것이다.
호매령은 급히 조자운을 찾아서 무림맹을 떠나 화산으로 출발했다.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밖으로 드러난 눈매에는 천살에 대한 걱정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독심술을 익힌자가 없는 무림맹의 명숙들은 호매령의 걱정에 찬 눈을 보고 성공했음을 짐작했다.
'화산의 처자에게 우리가 몹쓸짓을 했구나. 약속대로 화산을 많이 도와야겠다.'
몇몇은 호매령의 걱정을 슬픔으로 이해하고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은 천살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호매령의 창창한 앞날을 망친 죄책감을 천살에게 전가하여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 한 것이다.
"천살, 나와서 내 오호단문도를 받아라."
팽월의 목소리는 중기(中氣)가 충만했다. 내공뿐 아니라 외공도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팽가의 오호단문도는 소림의 무공이다. 소림의 오호단문도가 도를 익히는 기초무공인데 반해 팽가는 평범한 오호단문도를 강호에서 손꼽히는 도법으로 발전시켰다.
팽가는 소림의 오호단문도를 기초로 만승도(萬勝刀)를 섞어서 팽가의 오호단문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소림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도법의 이름은 계속 오호단문도를 사용했다. 비록 지금은 소림과 거리를 유지하고 관과 가깝게 지내지만 꽤 오랫동안 사용해온 오호단문도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천살이 모옥 밖으로 나가보니 남궁천과 원각 팽월과 언장동을 제외하고도 처음 보는 사람이 세명 있었다. 모옥밖으로 걸음을 옮긴 천살은 정중하게 포권을 올렸다.
"무림말학 천살이 강호의 노선배들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는 정중했지만 강호의 까마득한 후배를 일곱이서 손잡고 찾아오는 건 심한게 아니냐고 비웃는 것이다. 남궁천이나 원각 그리고 개방의 태상방주인 정운산은 태연한 기색이지만 해남파 방주 오천과 보타암의 혜절사태는 부끄러운 기색이었다. 팽월과 언장동은 천살의 도발에 조금 화가 난듯한 표정이다.
"이 후배가 조금 건방지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한명씩은 너무 쉬우니 일곱분을 한꺼번에 상대하겠습니다.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아 힘조절이 어려울 것이 예상되니 본인 몸은 본인이 알아서 챙기십시오."
천살의 도발에 팽월과 언장동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음에 조금씩 화가 깃들었다. 다만 심계가 깊어 얼굴에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다만 혜절사태와 오천은 아직 순수함이 사라지지 않아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천과 원각이 번갈아가며 천살을 상대하고 팽월과 언장동이 보조했다. 자존심 때문에 등뒤에서 공격하는 것을 자제했기에 남은 셋은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강호에서 손에 꼽는 고수들이지만 합격술은 충분한 연습이 없다면 오히려 위력이 줄어든다. 그래서 천살은 실질적으로 한명을 상대하고 두명의 기습에만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
'더 이상 누군가의 무공을 훔쳐배울 필요가 없다. 내 무공은 이미 완벽하다. 다만 내가 다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천살의 변한 마음가짐은 천살의 무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예전에는 누구와 상대하든 하나라도 훔쳐 배우려고 모든 주의를 자신의 검에 집중하지 못했다. 덕분에 많은 경험을 쌓았지만 자신의 검에 집중하지 못했기에 천살의 검은 복잡하지만 정밀하지 못했다. 최근에 이 점을 깨닫고 자신의 검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자신의 검을 더 잘 알게 되고 초식의 운용이 더 합리적이고 정밀하게 변하면서 급격한 무위의 발전을 이루어냈다.
남궁천은 천살과의 대결에서 절정검으로 향하는 길을 발견했다. 며칠사이지만 무공이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고 한발자국 더 내딛기 힘든 경지에서 두발자국 정도 더 전진했다. 하지만 천살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마음가짐 때문에 보여주지 못했던 진정한 실력을 끄집어냈기에 남궁천은 상승한 무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남궁천과 검을 섞을 때 팽월과 언장동이 기습을 해왔다. 오호단문도의 절초인 백호도간(白虎跳澗)이 천살의 왼쪽 옆구리를 노렸다. 언장동의 거산추암(巨山推岩)이 천살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며 명치를 노리는 남궁천의 공격에 영합(迎合)했다.
천살의 검에서 칠성연주의 초식이 터져나왔다. 셋의 공격을 막아내고 각자에게 하나씩의 공격을 선물했다. 빈틈인 듯 하여 천살에게 다가가던 원각은 자신을 향해 짓쳐들어오는 공격을 발견하고 급히 수비를 해냈다.
칠성연주의 일곱 공격중 세개로 수비를 하고 남은 네개중 세개는 셋에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원각이 들어올 것 같은 경로에 사용했다. 만약 원각이 공격에 급급해서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면 사혈 하나가 적중당했을 것이다. 원각정도의 경지에서 사혈 하나 베인다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지만 무공을 사용하는데 작게나마 지장이 생겼을 것이다.
팽월과 언장동은 강호에 크게 유명하지 않지만 송백자정도의 무위를 가지고 있다. 남궁천은 서창훈이 죽은 후 정파제일고수로 추앙받고 있다. 사실 남궁천은 그전부터 자신이 정파제일고수라고 생각했었다. 원각은 남궁천에게 반수정도 뒤진 실력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무공이 강하다. 그런 넷이 협공을 하고도 아무 이득을 얻지 못하자 개방의 태상방주 정운산이 천살의 등뒤에 자리 잡았다.
정운산은 시대가 변하자 방주자리를 머리가 총명한 제자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개방의 몰락을 막아낼 수 없었다. 송나라때부터 외세에 의해 가업을 잃은 자들이 개방을 만들어서 한인들의 천하를 회복하는 것을 개방의 종지(宗旨)로 삼았다. 그래서 송나라와 원나라때 개방은 강호제일방파였다. 실력도 제일이지만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온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가 들어서니 개방의 존재의의가 사라졌다. 특히 봉기군에 참여한 개방제자들은 다시 개방으로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거지들이 많아 방도수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고수들과 수많은 무인들이 사라져서 개방의 위명이 예전과 같지 않다. 그래서 무림맹이 도움을 청하자 정운산은 노구를 이끌고 나섰다.
'어차피 오래 살 목숨도 아니니 다른 창창한 아이들보다 내가 오명을 뒤집어 쓰는게 맞는 것이다. 무림맹에서 개방을 도와준다고 했으니 개방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운산이 등뒤에서 공격을 시도했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이가 많기에 정운산의 공격의 위력은 주로 내공에 의지한다. 천살의 횡련일기공은 다른 외공들과는 달리 내가중수법에 더 강한 방어력을 보인다. 정운산의 웬만한 공격은 그저 몸으로 받아냈고 위력이 강한 공격은 피해버렸다.
팽월과 언장동은 신형을 날려 천살의 등뒤에 자리했다. 이들이 비운 자리에 오천과 혜절사태가 자리했다. 일곱명에게 둘러쌓이자 천살의 손발이 더욱 빨라졌다.
"내가 여러분을 강호의 명숙이고 노선배라 공경했는데 여러분은 왜 이렇게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것이오?"
천살의 말투가 변했지만 일곱명중 누구도 유의하지 않았다. 일곱명과 대결하는 와중에 입을 연 것이 너무 놀라웠기 때문이다.
"너는 천살마성이다.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러는 것이다."
정운산의 대답에 천살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나는 천살마성이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세상에 무슨 해악을 끼쳤소? 오히려 당신들이 아무 죄없는 나를 잡겠다고 세상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것 같소."
"네가 지금까지 해악을 끼치지 않았다고 이후에도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우리는 최악의 사태를 미연이 방지하려는 것 뿐이다."
원각의 대답에 천살은 곧바로 대답했다.
"원각대사는 출가인이라 여색을 범하면 안되오. 지금까지 범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범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그 쓸모없는 물건을 잘라버리시오. 출가인의 본분을 어길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지 않겠소."
- 작가의말
一騎當千, 萬夫不當, 일기당천 만부부당, 남자의 로망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밖에서 떠들고 다니면 노망 소리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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