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비무
천사성이 우물쭈물하자 서문고검이 대신 답했다. 형산파 장로인 장원산이 질문하는데 대답을 늦추는 것은 큰 결례이다.
"목검으로 겨루면 서로 다칠일도 없고 두 문파의 어린 제자들이 서로 무공을 견주며 친분을 쌓는다면 나도 주인된 입장에서 참 흐뭇할 것 같소."
서문고검의 말은 언뜻 장원산에게 힘을 실어주는 듯 하지만 사실은 천사성의 곤란을 넘겨주는 것인 동시에 천검산장에서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도 포함되어 있다. 너무 수월하게 패하고 마음이 흔들렸던 장원산은 서문고검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서문가주의 말씀이 타당하오. 화산의 위명이 이천리밖의 형산에도 들려오는데 이 기회에 형산 제자들이 서장로의 가르침을 받는 화산제자와의 비무를 통해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는다면 좋을 것 같소."
원래는 장원산이 형산파의 장로라는 지위를 이용해 천사성을 핍박하는 그림이었는데 장원산은 천사성을 서장로의 가르침을 받는 화산의 기린아로 표현하고 형산의 제자들이 한수 배운다는 뜻으로 말함으로 친선비무로 잘 포장하였다.
서문고검은 장원산의 노회함에 속으로 혀를 찼다. 소위 명문정파라고 불리는 자들은 명나라가 들어선 후 힘을 키우는 것보다 소위 명분이라는 것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외세의 침입이 끝이 없던 송이나 원의 통치를 받을 때는 힘을 키우는데 급급해 정인군자의 도리를 잊더니 이제 와서 탈을 쓰고 군자행세를 하려는 것이다.
칼 한자루에 목숨을 맡기고 협의를 위해 살신성인하는 일은 당금 강호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명황실이 마교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강호의 세력들이 확장하는 것을 묵인하며 수많은 문파들이 생겨나고 성장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과하여 생존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림이나 무당과 같은 대문파들이 명황실과 가깝게 지내며 강호의 분란을 억제하는 바람에 칼이 아닌 명분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서문고검이 화산파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서창훈이 명황실의 부름을 거절한데 있었다.
주원장은 장삼풍을 국사(國師 - 나라의 스승)로 책봉하려고 무당파에 성지를 내렸다. 하지만 무당파에서도 장삼풍의 종적을 알 수가 없어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주원장은 화산의 서창훈을 태사(太師)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서창훈은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함을 이유로 거절했다. 사실은 장삼풍에 대한 자격지심에 거절한 것이지만 서문고검에게는 한겨울에 피어나는 매화와도 같은 꿋꿋한 기개로 보였다.
강호에 많은 활동을 하지 않은 서창훈에게 옥골선풍이라는 별호가 붙은것도 이때부터였다. 옥골(玉骨)과 선풍(仙風)은 송나라때 소식, 즉 소동파가 매화라는 시에서 매화를 형용하는 두개의 단어였다. 소림과 무당의 통제에 불만을 가진 강호인들이 서창훈에게 환호를 보내며 옥골선풍이라 치켜세웠다.
천사성은 입 한번 열지못하고 장원산과 서문고검에게 등 떠밀려 비무에 임하게 되었다. 유씨삼형제와의 대련과는 달리 현재 천사성의 이마에는 화산이라는 두글자가 붙어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신은 화산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다.
목검을 손에 잡자 천사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의 일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가벼운 부지깽이를 들고 검술수련을 했다. 비록 철검이 아닌 목검이지만 그 묵직한 무게는 천사성의 집중력을 오롯히 비무로 모아주었다.
형산파의 제자는 형산삼걸이라 불리는 장현성이었다. 형산파에서 가장 기대되는 세명의 후기지수 중 하나인 것이다. 장현성은 장원산과도 친척관계로 어린 나이에 형산파에 입문하여 무공을 수련한지 십년이 넘었다.
"두 사람이 나이도 비슷해 보이니 좋은 상대가 될 것 같소."
서문고검의 말에 장원산도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장현성은 자질이 뛰어나지만 독기가 부족하다. 그래서 원래는 다른 제자를 내보내 천사성을 혼쭐내려 했다. 겸사겸사 화산의 기세도 꺽어 더 좋은 조건으로 화산동맹에 가입하려는 속셈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서문고검의 말 때문에 무공이 가장 강한 장현성을 내세웠다. 천사성의 덩치가 또래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서문고검이나 장원산이나 둘이 비슷한 나이라고 생각했다. 장현성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자 천사성도 덩달아 포권을 했다.
"저 나이때의 화산제자라면 매화검을 주로 사용할 터인데 저 아이의 기수식은 매화검의 기수식이 아닌것 같소이다."
서문고검의 말에 장원산은 이마를 찌푸렸다. 평범한 화산제자라면 아직 매화검을 배울 때이다. 매화검의 기수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검법을 배웠다는 뜻이고 그것은 다음대 장문을 노릴 수 있는 아이라는 뜻도 된다.
서장로가 직접 데리고 다니는 아이라면 평범한 아이는 아닐 것이다. 장원산은 일시의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경솔한 결정을 내린 자신을 자책했다. 그러고보니 서문고검은 더 빠르게 자신을 제압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각에 가까운 시간을 끌었다.
자신이 일찍 실력차를 알아차리고 기세를 거두었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기세를 계속 끌어올리자 서문고검도 따라서 기세를 키운 것이고 자신의 기세가 터질듯 하자 서문고검이 자신의 기세를 제압하고 검을 거둔 것이다.
서문고검은 주인된 도리를 다했으나 장원산의 실력이 부족하고 상대의 실력을 보는 눈도 부족해서 이지경이 된 것이다. 상대의 배려를 알아보지 못하고 화풀이를 엉뚱한 곳에 했으나 그 화살이 돌아서 장원산에고 돌아왔다. 형산에 돌아가면 장로직을 내려놓고 강호에서 은퇴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장원산은 장내를 살폈다.
천사성과 장현성은 서문고검과 장원산의 대결을 흉내라도 내듯이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장원산은 장현성의 기세가 안정적인 반면 천사성은 기세가 없다시피 한 것을 보고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서장로가 애지중지하는 고제자라 생각했는데 자세도 어설프고 기세라고 부를만한 무언가도 없었다.
하지만 장현성은 매우 신중한 성격이라 쉽게 공격하지 않았다. 상대의 자세에서 몇개의 허점이 보였지만 바로 찌르고 들어가기에는 뭔가 미심쩍었다. 그런 장현성의 눈에 천사성의 왼발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다.
천사성의 왼발은 왼쪽으로 갈듯 오른쪽으로 갈듯 움찔움찔 했다. 장현성의 정신이 거기에 집중되는 순간 천사성의 검이 앞으로 찔러나왔다. 하지만 그 동작은 눈을 깜박이고 기지개를 펴며 하품을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장현성은 미처 반응할 생각도 못했다.
다행히 장현성의 수련이 헛되지 않아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상체를 뒤로 젖히는 한편 오른손의 목검을 움직여 천사성의 목검에 부딪혀 갔다. 하지만 전력을 다한 찌르기처럼 보이던 천사성의 목검이 빙글 하더니 장현성의 검을 피해 검끝이 목젖에 닿았다.
천사성은 곧바로 목검을 거두고 장현성에게 포권을 했다. 장현성도 환하게 웃으면서 포권을 한 후 다가와서 천사성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서문고검이나 장원산과는 달리 장현성은 천사성의 나이가 덩치보다 어리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 실력이 대견했던 것이다.
서문고검은 둘의 대련이 끝나자 손뼉을 마주쳤다.
"화산의 허허실실도 대단했지만 형산 제자의 임기응변과 호탕한 성격이 참으로 마음에 드오. 두 문파의 앞날이 밝으니 이 서문고검도 기쁘기 그지없소."
장원산도 독기가 없다고 평가했던 장현성이 일초에 패하고도 대범함을 보이며 상대를 격려하여 형산의 체면을 세우자 평가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현성은 독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그저 그릇이 컸던 것이다. 그릇이 하도 커서 자신같은 사람들이 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끄집어내는 것도 가슴속에 꾹꾹 담아놓고 있는 것이다.
장현성을 형산장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장로의 자리를 지키며 세력을 키워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형산파는 다른 문파들과 다르게 장문인 일가가 대대로 장문인직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문파들과 달리 제자가 되려고 찾아오는 자들이 적다.
형산파의 제자가 패한 관계로 환호나 갈채는 없었다. 장원산이 여로의 피곤때문에 쉬고 싶다고 말해 짧았던 비무가 끝났다. 천사성은 방으로 돌아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금의 비무를 회상했다.
오운밀포의 깨달음을 얻은 천사성은 왼발의 움직임으로 장현성의 눈을 끈 다음 목검으로 장현성의 가슴을 찔렀다. 묵구탐식에서 가장 자신있는 찌르기로 찔러갔는데 장현성이 몸을 젖히며 검을 부딪혀왔다.
적구무의로 상대의 검을 피한 후 소우만천으로 연환검을 시전해 상대의 목젖을 노렸다. 원래는 실초였던 묵구탐식의 찌르기가 순신간에 허초로 변해 장현성의 수비를 와해시키고 갑병신의 효과를 가진 목찌르기를 시전한 것이다.
서문고검이 허허실실이라고 짧게 칭찬했지만 상대의 눈을 속일 수 있는 허허실실은 낮은 경지가 아니다. 어설픈 움직임은 상대에게 간파당해 오히려 역공을 당한다. 서문고검이 허허실실이라는 네글자로 간단히 표현했지만 결코 작은 칭찬이 아닌 것이다.
서장로의 일수에 기준이 생겼고 장현성과의 비무에서 자신감이 생겼다. 허공에 대고 화살을 날리던 천사성에게 과녁이 생긴것과 다름이 없다. 여행이고 뭐고 빨리 화산으로 돌아가서 무공수련을 하고 싶었다.
오후에 돌아온 서장로는 서문고검과 장원산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서문고검은 오후에 있었던 비무를 간단히 언급하며 천사성의 누구의 제자인지 넌지시 물었다.
"천사성이라는 아이가 참으로 훌륭한 재목인것 같소. 화산의 누가 복이 넘쳐 저런 아이를 제자로 들인 것이오?"
서장로는 천사성이 비무에서 이겼다는 말에 형산에서 나이가 비슷한 또래가 나와서 덩치가 큰 천사성이 이겼겠거니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무공이 몸에 익기 전에는 덩치의 크기를 무시할 수 없다.
"아직 열한살이라서 제자로 들이지 않았소. 내년에 화산이 제자를 받는 해라 그때 자질을 보고 결정할 생각이오."
"아직 화산제자가 아니라니 이 서문고검에게 넘길 생각은 없으시오? 저 아이를 내 제자로 준다면 화산과 같은 배를 타겠소."
만약 서문고검이 천사성이 아닌 조자운을 달라고 했으면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천사성은 천살마성이니 넘길수 없다. 서장로는 속으로 아쉬움을 느끼며 대답했다.
"서문가주에게 미안하지만 누구에게도 내줄 수 없는 아이오."
서문고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에 입문도 하지 않은 열한살짜리가 형산파의 기대주를 일검에 패퇴시켰다. 자신이라도 쉽게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서문고검은 흉금을 털어버렸다.
"화산이 아니라면 내가 그 문파를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저 아이를 데려왔을 것이오. 천하제일검을 내손으로 키우고 싶었는데 참으로 안타깝소이다. 화산이 소림무당의 위로 올라가는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을 듯 하오."
- 작가의말
천사성 : 서장로, 내가 논어를 거꾸로 외워보겠소.
서장로 : 어머, 얘는 제자로 들여야 해.
천살성 : 으르렁 으르렁 으르렁대.
서장로 : 제자는 좀 무리일 것 같아.
서문고검 : 저 아이 내꺼하자요. 그럼 화산이랑 한편 먹겠다요.
서장로 : 남주기는 아깝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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