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변수
기신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 보나비치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첫 경기에서는 작은 부상 때문에 벤치에도 들지 못했던 보나비치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보나비치는 팀의 핵심선수가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갈락티코 정책으로 또 한 번 별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개성이 강한 선수들을 한곳에 모아 놓으니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문제가 된다. 그 대안으로 레알 마드리드가 강하게 원한 선수는 보나비치다.
선수들을 자기 주변으로 모으는 워드나 다른 선수들을 지휘하는 차범수는 레알 마드리드에 적합하지 않다. 보나비치처럼 열심히 뛰면서 선수와 선수를 연결하는 타입이 레알 마드리드에 적합하다. 보나비치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명성을 쌓은 선수들을 누르고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이자 핵심이 되었다.
보나비치는 윤활유 같은 선수다. 핵심 부품이 아니라서 없어도 팀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보나비치가 있다면 팀이 더욱 원활하게 잘 돌아간다. 단단한 수비와 묵직한 공격을 하는 이탈리아가 더욱 매끄럽게 돌아간다.
경기장이 아닌 곳에서 만나면 참 반가웠겠으나 보나비치를 잘 아는 기신은 마냥 반갑지 않았다. 기신도 충분한 준비를 해왔지만, 길서준이 출장할 수 없기에 불안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하늘의 풍운은 예측할 수 없고 인간의 화복은 짐작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늘의 풍운이 예측하기 어렵다는 말은 기상청이 꾸준히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화복에 관해 기신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온몸으로 느꼈다.
전반전 3분, 이탈리아 선수가 반칙으로 붉은 카드를 받았다. 헤딩 경합 중에 팔꿈치를 강하게 휘둘렀다.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기신은 침울함만을 느꼈다. 팔꿈치에 가격당한 선수가 차범수이고, 길서준과 마찬가지로 차범수는 의식을 잃었다.
구급차가 급하게 경기장에 들어왔다. 경추보다 조금 높은 부위를 가격당하고 혼절한 차범수를 구급대원들이 조심스럽게 옮겼다.
"감독님, 제가 함께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의료팀 막내가 함께 병원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길서준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길서준은 그래도 검사할 때 동공 반응을 비롯해 여러 가지 반응이 있었다. 그러나 차범수는 반응이 전혀 없다.
"감독님,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잘 부탁해요."
채운이 차범수 대신 출전했다. 선수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지시를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기신은 차범수에게만 신경을 쏟아부었다. 기신이 그날 차범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범수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잘생긴 얼굴로 배우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릴 때 소원대로 직업 군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어떤 길을 갔든지 지금처럼 생명이 위험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기신과 연관되어 운명이 바뀐 사람은 전부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기신은 조금 우쭐해 있었다. 지금은 차범수가 자신 때문에 생명이 위급하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감독님, 범수는 제가 꼭 살릴 테니 경기에만 집중해주세요."
막내의 말에 기신은 정신을 차렸다. 평소에 말수가 많지 않지만 똑 부러지게 일을 하는 막내다. 흔들리는 기신을 적절하게 깨우쳐 주었다.
"그래서 말인데, 치유 특성 양도 부탁드립니다."
- 플레이어 신기가 플레이어 기신에게 특성 양도를 요청했습니다.
- 특성을 양도하시겠습니까?
"너, 노수영 너."
"시간이 없습니다. 얘기는 돌아와서 나누죠."
- 플레이어 기신의 고유특성 치유를 플레이어 신기에게 양도했습니다.
기신은 아주 잠깐 허전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느낌은 곧바로 사라졌다. 노수영은 구급차에 올라탔다. 구급차는 평온하게 움직였지만 기신은 논길에서 달리는 달구지를 보는 것처럼 마음을 졸였다.
현장 정보는 기신에게 차범수에 대해 생명 위급이라고 알려주었다. 길서준 때는 그저 혼수상태라고만 했었다. 그래서 많이 흔들렸던 기신이지만, 신기로 추정되는 노수영에게 치유 특성을 넘겨준 후 마음의 안정을 다시 찾았다.
"범수 생명의 위험은 없다고 한다. 범수가 깨어나서 결승에 출전할 수 있도록, 오늘 경기는 반드시 승리한다."
기신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고 확신만 가득 차 있다. 차범수가 구급차에 실려 가자 이탈리아 선수들도 동요가 일었다. 차범수를 진단하기 위해 이탈리아 의료팀도 투입되었다. 차범수가 생명의 위험도 있다는 말에 선수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경수야, 쫄지 마라. 시발, 내가 다 쪽 팔린다."
박동춘의 말에 정경수는 발끈했다. 우루과이와의 경기 마지막 15분에 등장해서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긴장한 건 맞지만 그렇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경수야, 너 떠는 거 다 보여. 저 반도에서 사는 촌놈들이 얼마나 비웃겠냐?"
"시발, 떨기는 개뿔. 나 원래 수전증 있어."
정경수의 대답에 박동춘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입은 웃지만 눈에서는 불이 뚝뚝 떨어졌다.
"생각 같아서는 저 새끼들 다리 싹 다 부러뜨리고 싶지만, 우승을 위해서 참아야지. 우리 전주의 불멸 콤비가 오늘 부활해야겠는데."
"그런데 우리나라도 반도 아냐?"
"중요한 경기에서 그런 사소한 건 따지지 말자. 대국적으로 생각하자고."
전주 팬들의 최애 콤비, 박동춘과 정경수의 불멸 콤비가 부활했다. 한 번도 돌파당한 적 없는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수비라고 해서 불멸 콤비로 불렸다.
김시웅이 공민훈과 한윤을 불렀다.
"이제부터 협력 수비를 줄일 거다. 수비할 때 정신 바짝 차려. 공격할 때는 걱정 없이 올라가라. 내가 구멍 없이 메꿔주마."
채운이 황희와 최길수 그리고 유재범을 불렀다.
"나 패스 구린 건 안다. 그래도 받은 공은 어떻게든 지켜낼 테니 나한테 패스해 줘."
현기철이 끼어들었다.
"형들, 나 아틀레티코 공격수야. 굳이 좋은 공 주려고 애쓰지 마. 비슷하게 주면 내가 싹 다 집어넣을게."
황동근은 왼손 편 골대를 부여잡고 기도했다.
'평소 기도를 안 올려서 미안해요. 이후 꼬박꼬박 기도 할 테니 범수 형이 무사하게, 우리 팀이 승리하게 지켜주세요.'
경기가 재개되자 공을 잡은 유재범에게 이탈리아 선수가 강한 태클을 했다. 발끈하는 선수들을 김시웅이 말렸다.
"다들 침착. 지들 사기 끌어 올리려고 지랄하는 거니까 대응하지 마세요."
한국팀과 시비를 걸어 가라앉은 이탈리아의 사기를 고취하려 했다. 그러나 나이에 비해 경험이 풍부한 김시웅은 다른 선수들을 진정시켰다. 아직도 챔피언스리그 한국 최연소 출전 기록을 지키고 있는 김시웅이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수비 능력만큼은 인정받는 선수다. 차범수에 비하면 무게감이 부족하지만 선수들이 의지하기에는 충분하다.
"자, 어차피 한 골 싸움입니다. 쟤네 수비 빼고 볼 거 없어요. 우리가 한 사람 많으니 수적 우세를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차범수의 빈자리를 김시웅이 대신했다. 주로 패스와 손짓 눈짓으로 지휘하는 차범수와 다르게 김시웅은 입으로 지휘했다. 그저 지시만 내리는 차범수와 달리 김시웅은 이유까지 친절하게 설명했다.
수적 우위를 살리기 위해 한국팀은 경기장을 넓게 썼다. 김시웅과 채운 그리고 황희와 최길수 및 유재범 이렇게 다섯 명이 전후좌우로 많이 뛰면서 공격진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수적 우위를 지켜갔다.
이탈리아는 공이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 수비수까지 움직여야 하고 수비 상황에서는 공격수까지 깊숙이 돌아와야 했다. 반면 한국팀은 다섯 선수만 많이 움직이고 남은 선수는 자기 자리를 잘 지켜가며 체력을 보존했다.
"자, 한 번 몰아칠 타이밍입니다. 쟤네 이 시간대에 집중력이 가장 낮습니다. 지금 몰아치면 득점 못 해도 쟤네 지칩니다."
차범수가 없으니 집중력이 더욱 높아졌다. 차범수가 없으니 자신들이 실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들 바짝 긴장했다. 김시웅이 적절하게 말로 긴장을 풀어주었다.
"공이 오른쪽에 있을 때 왼쪽 분들은 대화를 많이 나누세요. 수비는 어떻게 하고 공격은 어떻게 할지요. 우루과이 애들은 우리 만나기 전에 무실점이에요. 다 말을 많이 해서 그래요."
수적 우세도 있고 이탈리아의 기세가 살아나지 못한 이유로 경기는 한국팀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끌려갔다. 정경수가 길서준처럼 움직이면서 이탈리아의 공격을 무력화했다. 현기철은 평소와 다르게 좌우로 많이 뛰면서 빈틈을 만들려 애썼다.
선수들 대부분이 흥분하지 못한 이탈리아는 반응이 조금씩 느렸다. 반면 한국도 흥분하지 않고 적당한 템포로 경기를 운영했다. 김시웅이 공격과 수비의 리듬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기회를 엿보았다. 수비만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 김시웅이 그 공격성을 갑작스럽게 드러냈다.
"자, 빠르게 갑니다. 현기철 정신 차려."
김시웅의 패스는 무척 불친절했다. 유재범은 김시웅이 패스한 공을 어렵게 멈췄다.
"형."
공민훈이 빠르게 다가왔다. 반짝이는 공민훈의 눈을 보니 무언가 기대할만한 게 있는 모양이다. 유재범이 패스한 공을 공민훈은 그대로 골문 앞으로 보냈다.
신속 정확 친절을 자랑하는 공민훈 배달회사는 공을 이탈리아 골키퍼와 중앙 수비수의 중간으로 배달했다. 회전을 많이 먹은 공은 바닥에 부딪힌 후 높이 떠오르지 않았다. 패스와 함께 악셀을 힘껏 밟은 현기철이 가장 먼저 공 앞에 도착했다.
키퍼가 나올지 수비수가 차 낼지 애매한 위치다. 이럴 때 키퍼 혹은 수비수 중 먼저 움직이며 소리를 지른 사람이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분위기가 가라앉은 이탈리아는 수비수와 골키퍼가 동시에 머뭇거렸다. 그 잠시의 머뭇거림이 현기철에게 물어뜯겼다.
공민훈 회사의 친절함에 감동한 현기철은 배달받은 공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에 배치하기로 마음먹었다. 현기철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상대방 골대 안이다. 그리고 새 시즌 아틀레티코 주전 공격수를 노리는 현기철은 공을 배치할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골을 넣은 현기철은 기도로 세리머니를 대신했다. 관객들도 함성을 멈추고 침묵했다. 함께 기도를 올리는 관객도 많았다. 황동근은 이번에 오른손 편 골대를 부여잡고 기도했다.
'골대 님, 전반전에만 골을 먹지 마시고 후반전에는 배터지게 먹으세요.'
골을 넣은 후 기신은 곧바로 유재범을 내리고 박정현을 올렸다. 박정현은 미드필더 자리에서 수비와 제공권에 힘쓰고 황희가 조금 위치를 올렸다. 속도가 빠른 황희와 현기철을 이용해 반격할 계획이다.
"김철범, 너 결승전 선발이다. 실망하지 마."
시무룩해 있는 김철범을 기신이 위로했다. 물론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은연중에 결승전을 언급하면서 사람들의 무의식에 이번 경기는 승리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그리고 하루 전에 아르헨티나에 5:0으로 대승하며 결승 진출한 독일팀을 상대로 김철범을 선발 출전시키기로 미리 정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것이기도 하다.
전반전이 끝나고 차범수가 무사히 깨어났고 현재 정밀 검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 골 앞서가고 선수 한 명이 더 많은 한국팀의 사기는 더는 높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노수영 씨가 갑자기 사라졌다니요?"
다만 문제가 된 것은 병원까지 동행한 노수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취재를 위해 따라간 한국 언론사의 기자가 절차를 대신해 차범수의 검사가 늦어지지 않았다.
"범수가 결승전에 출전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 경기 기필코 이겨내야 한다."
- 작가의말
떡밥 하나 회수 성공. 신기를 영어로 번역하면 god key 입니다. 필요할 때 모든 문을 열어주는 신의 열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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