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다운 결정
한국의 저항은 더욱 강하고 끈질겨졌다. 김철범과 현기철은 반칙을 서슴지 않았다. 수비 경험이 많은 현기철에 비해 김철범은 형편없었다. 상대 선수의 옷을 잡아당기는 건 다반사고 가끔 몸싸움에 밀려 쓰러지면 두 손으로 상대 발목을 잡기도 했다.
그러다 노란 카드 한 장 먹고 조금 자제하게 되었다. 유니폼도 강하게 당기지 못했다. 그저 보기에는 현기철의 반칙이 훨씬 악랄해 보였지만 카드를 한 장도 받지 않았다. 아틀레티코 선수답게 주심의 기준을 정확히 알아내고 아슬아슬하게 그 선을 넘지 않았다.
한윤이 또 한 번 돌파당했다.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는 상대라 서로 잘 알고 있다. 서로 잘 아는 상황에서 보통 수비수가 더 유리하다. 그러나 한윤은 지친 상태고 상대는 후반 55분에 출전했다. 머리는 상대의 변화를 따라가는데 몸은 반 박자 느렸다.
돌파에 성공한 독일의 흑인 윙에게 채운이 몸싸움을 걸었다. 채운 역시 많이 뛰었지만 전반 30분에 교체로 출전했기에 체력은 괜찮다. 흑인 선수는 특유의 유연성으로 채운의 몸싸움을 피했다. 채운은 제풀에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채운은 왼발로 흑인 선수의 발목을 걸었다. 흑인 선수가 넘어지자 주심이 반칙을 불었다. 노란 카드까지 각오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던 채운이지만 주심의 페널티킥 판정에 화가 솟았다.
"아냐, 심판. 나는 페널티 구역 밖에서 반칙했다고."
차범수가 빠르게 달려와서 채운을 밀쳤다. 노란 카드로 끝날 일이 붉은 카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 난 채운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부심에게 물어봐. 난 페널티 구역 밖에서 반칙했다고."
주심은 노란 카드를 꺼내서 채운을 경고했다. 그리고 곧바로 부심에게 향했다. 다가오는 양 팀 선수를 멈춰 세운 후 부심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마친 주심은 원래 판정을 유지했다. 한국팀에 페널티킥을 선언했다.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운은 공을 멀리 차버렸다. 주심은 호루라기를 짧게 끊어서 불었다. 그리고 채운에게 두 번째 노란 카드를 꺼냈다.
"형, 그냥 내려가요. 동근이가 잘 막아줄 거예요. 형이 계속 항의하면 우리 팀에만 불리해져요."
채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가릴 생각도 못 하고 밖으로 걸어갔다. 너무 힘들었다. 차범수의 지휘에 따라가지 못했고 김시웅처럼 안정적인 협력 수비를 못 했다. 대표팀 맏형으로 동생들에게 줄곧 미안했다.
노란 카드를 각오하고 반칙했다. 심하면 붉은 카드를 받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페널티킥 판정을 받는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그리고 평소 성질대로 했다. K리그에서 하던 대로 했다. 월드컵 결승임을 잠깐 망각했다. 그리고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채운, 먼저 샤워하고 옷 갈아입어. 이따 우승컵 함께 들어 올려야지."
채운은 기신에게 허리를 깊게 숙였다. 여덟 살 형이다. 감독과 선수가 아니라 사회에서 만났으면 형이라 부르며 같이 술을 마셨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이렇게 힘든데 기신은 얼마나 힘들지 생각했다. 범수나 시웅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했다.
"감독님, 꼭 이겨주십시오. 우승 못 하면 저 그냥 은퇴할랍니다."
기신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필승의 자신은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할 자신은 있다. 최선을 다하고 지는 건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최선을 다하기 위해 기신은 속으로 외쳤다.
'꺼져.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거야.'
현장지휘나 현장 정보는 기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 할 일을 한다. 그러나 현장 지배는 기신이 거부하자 조용해졌다. 머릿속이 조용해진 기신은 정경수를 불렀다.
"반칙 두려워하지 말아라.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으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페널티킥 줘도 좋으니 네가 맡은 선수는 어떻게든 막아내라."
후반 77분, 독일은 페널티킥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점수판이 3:2로 바뀌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17분 정도로 예상된다. 그 시간에 점수를 지켜내야 한다.
정경수는 김철범을 교체했다. 교체되는 김철범에게 팬들이 갈채를 보냈다. 한국팀은 세 명의 중앙수비수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신의 전술 변화는 끝나지 않았다.
"기철이, 채운이 자리를 메꿔. 반칙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막는 것만 생각해."
현기철이 채운의 자리로 향했다. 공격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기신은 멈추지 않았다.
"범수야, 위로 올라가. 수비는 놔두고 골 넣는 데 집중해. 네가 골을 넣어야 한다."
개인 능력으로 독일의 두 중앙수비수를 압도할 사람은 차범수밖에 없다. 둘 다 잔 부상으로 컨디션이 나쁘다. 차범수가 돌파에 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기본은 한다. 몸싸움은 둘을 압살할 수 있다.
수비는 김시웅이 지휘했다. 박동춘과 정경수도 말이 많아졌다. 황동근도 위기를 느꼈는지 형들에게 반말을 시작했다. 이름을 직접 부르고 급하면 야로 대체했다. 차범수는 중앙선에 서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감독님의 의도는 뭘까? 진짜 나보고 공격수처럼 움직여서 골을 넣으라는 뜻인가?'
앞선 상황에서 공을 잘 지키고 드리블을 잘 하는 선수가 시간을 끄는 방법도 있다. 차범수는 공은 잘 지키지만 드리블을 잘 하는 선수는 아니다. 상대 선수들에게 포위되면 소유권을 빼앗길 가능성이 크다.
박동춘의 긴 패스가 날아왔다. 차범수는 생각을 멈추고 상대 선수와 몸싸움을 했다. 한 선수는 차범수와 몸싸움을 하고 다른 선수는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했다. 차범수가 가장 좋은 위치를 미리 차지했기에 두 선수가 협공할 가능성을 없앴다.
공을 안정적으로 받아 낸 차범수는 엉덩이 힘으로 수비수를 밀친 후 빠르게 몸을 돌렸다. 기신의 지시에 한국 선수들은 공격에 투입되지 않았다. 독일 선수들도 급하게 돌아오지 않았다.
차범수는 공을 짧게 치면서 드리블했다. 수비수 한 명을 달고 다른 수비수를 향해 드리블했다. 왼쪽에서 수비수가 압박하고 전방에서 수비수가 길목을 막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건 속도다. 빠른 속도로 둘을 동시에 제쳐야 한다.
차범수는 주력이 6에 가속 능력은 8이다. 느리지는 않지만 속도로 돌파가 가능한 수준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반 80분이다. 다들 체력이 부족해 순발력이 무척 떨어져 있다. 그리고 차범수는 체력 10에 회복 능력 10이다. 80분임에도 경기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속도와 순발력을 보일 수 있다.
선수 능력치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신만 가능한 결정이다. 모두가 고정관념으로 차범수는 빠른 선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기신만 다른 생각을 했다. 절대적으로 빠를 필요는 없다. 수비수보다 빠르면 된다.
차범수 역시 드리블하며 두 수비수를 관찰하다 자신의 순발력과 속도면 둘을 동시에 제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는 기신의 자신만만한 미소가 생각났다. 몸이 뜨겁게 달궈진 상황이 아니라면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다. 이 모든 걸 경기 전에 계획했다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느껴지는 무서움만큼 든든해졌다.
마음이 단단해지자 다리도 단단해졌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긴장이 빠지면서 더욱 유연하게 변했다. 차범수는 기교를 부리지 않았다. 그저 공을 툭 찬 후 왼손으로 가까이 붙은 수비수를 살짝 밀었다.
앞을 가로막은 수비수가 태클로 차범수를 넘어뜨리려 했지만 차범수의 가속 능력을 오판한 탓에 조금 느렸다. 차범수의 돌파를 예상하지 못한 골키퍼가 뒤늦게 앞으로 달려 나오면서 슈팅각을 좁히려 했다. 신장 198의 골키퍼는 차범수와 23센티나 차이가 났다.
'낮은 공, 낮은 공.'
휴식시간에 전술을 얘기할 때 낮은 공에 약점을 가진 골키퍼라고 했다. 큰 키만큼 가랑이 사이가 휑해 보였다. 차범수는 천천히 산책하듯 느리게 호흡하며 슈팅했다. 마지막 발과 공이 접촉하는 순간 숨을 멈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반 81분, 차범수의 골로 한국이 다시 4:2로 앞서가게 되었다. 지친 한국 선수들은 앞으로 달리지 않고 선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기신이 큰소리로 외쳤다.
"하나 더 넣는다. 범수는 계속 공격에만 집중해."
고육지책이다. 지친 선수들의 집중력을 억지로 끌어올리기 위해 차범수를 수비에서 배제했다. 어차피 다들 지치고 굼떠서 차범수의 지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차라리 차범수가 없으면 더 집중하는 점을 이용해 정신력이라도 짜내는 게 낫다.
85분 공민훈이 두 번째 노란 카드를 받고 퇴장당했다. 김시웅이 오른쪽 풀백으로 옮겨갔다. 기신은 하마터면 자기 뺨을 때릴 뻔 했다. 카드가 없는 김시웅을 풀백 자리로 보내고 공민훈을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로 보냈어야 한다. 김시웅 혼자서 능히 오른쪽 수비를 감당해낼 수 있다.
두 번째 골을 먹으며 현장 지배를 거부했다. 그래서 차범수를 앞으로 보내는 수를 생각해냈지만 대신 뻔한 사실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김시웅이 풀백 출신이고 수비 능력이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최상위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86분 독일이 공민훈의 반칙으로 얻은 프리킥을 골로 만들었다. 황동근과 길서준이 또 한 번 부딪혔다. 이번에는 황동근의 잘못이다. 길서준이 자신이 걷어낸다고 먼저 소리쳤는데 황동근이 앞으로 달렸다.
둘이 부딪히며 황동근이 쳐낸 공이 멀리 가지 못했다. 독일 선수는 침착하게 칩슛으로 골을 넣었다. 김시웅이 골대로 달렸지만 속도가 느려져서 공을 걷어내지 못했다.
"상대는 지쳤지만 우리는 팔팔하다."
기신이 외치자 벤치에서 함께 외쳤다. 그리고 팬들도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 영국 팬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츠 카운티의 세 개 음절밖에 없는 구닥다리 응원가다. 노츠 카운티에 몸담은 적이 있는 선수들은 그 노래에서 힘을 얻었다.
경기가 재개되자 독일은 중앙수비수 한 명을 제외하고 전부 한국 진영으로 넘어갔다. 차범수를 마크하는 중앙수비수는 전반전에 수비를 맡았던 선수다. 컨디션이 별로인 두 선수는 윙의 뒤에서 공을 받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발밑으로."
김시웅이 윙의 공을 은밀하게 빼냈다. 어찌나 자연스러웠는지 윙은 김시웅이 공을 빼간 것도 모르고 계속 헛다리질하며 김시웅의 중심을 흔들려 했다. 차범수는 뒤로 달리며 김시웅에게 발밑에 패스해 달라고 요구했다.
중앙수비수는 경험이 많은 선수다. 자신이 차범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3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다른 선수들이 수비하러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차범수는 돌파가 쉽지 않자 고개를 돌려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공을 오른쪽으로 툭 친 차범수는 왼쪽 발목에 힘을 주었다. 허벅지도 함께 팽팽하게 불어났다. 안락의자에 앉은 것처럼 상체가 편해졌다. 오른 다리를 힘껏 휘두르다 마지막 순간에 호흡을 멈췄다. 중앙선도 넘지 않은 곳에서 차범수는 슈팅을 시도했다.
조금 전 상황을 경계하며 돌파에 대비해 앞으로 나와 있던 키퍼가 허겁지겁 뒤로 달렸다. 그러나 차범수의 공은 너무 빨랐다. 그리고 빠르기만 한 게 아니라 정확하기까지. 공이 골대 안에 들어갔을 때 골키퍼는 겨우 페널티 포인트를 지나고 있었다.
폭탄이 터졌다. 경기장이 무너질까 두렵다. 기신은 두 팔을 한껏 벌렸다. 차범수는 기신의 품에 뛰어들었다. 기신은 허리에 힘을 주며 억지로 버텼다. 차범수가 너무 빠르게 달려와 그 충격이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모순이라는 말이 있다. 모든 것을 꿰뚫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패가 있다. 둘이 부딪히면 어떻게 될까? 창과 방패 중 누가 최강일까? 오늘 사람들은 그 답을 알게 되었다. 최강의 방패이며 최강인 창인 자가 있다.
- 작가의말
지금 한국 선수들 대부분 파근합니다. 파근파근한 감자를 먹으면 힘이 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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