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봄바람에 휘날리며
꿈에서 깬 신기는 툴툴거렸다.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 이 세상에 대한 정보를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
신기의 '기억'을 자주 끄집어내서 검토하는 기신과 달리 신기는 기신의 '기억'을 그저 느꼈다. 한 편의 영화를 본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그 영화에 대한 감상만 남아있고 그 영화의 진행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은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오늘은 주술사와 독립군들과 함께 라어 사냥을 나가는 날이다. 이들은 라어에게 플라잉 피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이들의 작명법이 괴수를 이해하기에 더 좋지만 정규군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괴수의 이름이 짧고 다른 괴수들과 헷갈리지 않아야 긴박한 전투 상황에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다.
"대마법사님, 그런데 저 레드 호크는 얼음에 갇혀 있는데 왜 안 죽는건가요?"
바이올라는 갓 16세가 된 소녀이다. 신기가 꿈꾸던 금발 벽안은 아니지만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벽발 금안이기 때문이다. 주근깨가 조금 많지만 보기 드문 미소녀이고 몸매는 미소녀가 아니라 미부 수준이다. 신기는 대마법사라는 호칭에 올라가는 입꼬리를 책망하며 근엄하게 대답했다.
"얼음에 여러 가지 속성이 있는데 나는 빙결 속성만 사용했지. 냉기 속성을 사용했으면 냉기가 침습해서 죽었겠지만 빙결 속성만 사용했기에 구속만 하고 공격은 하지 않아."
"얼음에는 또 무슨 속성이 있나요?"
"폭발 속성도 있어. 물론 화약처럼 폭발하는 게 아니가 갑자기 덩치를 불리는 거지. 침투 속성은 안개처럼 몸속으로 침투하는 거고. 견고 속성은 단단한 얼음이 되어 보호하는 작용을 하고. 그리고 더 있는데 나는 세세하게 따지면서 마법을 쓰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면 마법이 사용되거든. 심마의 경지라고 할 수 있지."
"열여덟밖에 안 되었는데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신기는 억울함이 느껴졌다. 사실 자신은 기신의 세상에 가서 한 달도 안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그만 한 살 더 먹은 것이다. 어른이 될 기회도 놓쳤고 말이다. 물론 덕분에 이곳에 보내져서 바이올라와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다. 꿈속에서 기신과의 대화를 통해 엘리사인지 뭔지 하는 마녀가 사실은 엄청난 추녀임을 알아냈다.
독립군에 세 대밖에 없는 대형 엔진마차를 타고 일행은 해안 쪽으로 움직였다. 소수 정예로 임해야 하기 때문에 신기와 다섯 명의 흑인 주술사 그리고 일곱 명의 독립군이 동원되었다. 갓 성인이 된 바이올라는 놀랍게도 독립군에서 열 손가락에 드는 검사였다.
더 많은 사람을 실을 수 있지만 돌아갈 때 라어를 실어야 하기 때문에 공간을 많이 남겨둬야 한다. 그간 신기가 마법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보여주었고 동원된 주술사들도 대단한 주술사들이기 때문에 열셋밖에 안 되지만 이들은 전혀 걱정이 없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적지 않은 수의 라어들이 보였다. 신기의 마나를 아끼기 위해 주술사들과 독립군의 전사들이 잡아오면 신기는 얼리기만 하기로 했다. 혹시나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신기의 마나를 아껴두려는 생각이었다. 바이올라는 마법사인 신기의 호위로 남았고 주술사 한 명이 엔진마차를 은닉하기 위해 남았다.
주술사가 지팡이를 바닥에 꽂고 노래 비슷한 주문을 흥얼거리자 지팡이에서 가지들이 뻗어 나와 엔진마차를 감쌌다. 2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에릭이 엔진마차가 안 보인다면서 주술사에게 주술을 멈추라고 말했다. 신기의 눈에는 엔진마차가 여전히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다며 주술사의 주술에 만족했다.
주술사 네 명은 둘씩 짝을 지어 한 명이 속박의 주술로 라어를 잡아두고 다른 한 명이 포박의 주술로 라어를 끌고 왔다. 라어를 포박한 나무줄기들을 풀어내고 속박의 주술을 유지한 상태에서 신기가 얼음의 상자로 라어를 얼렸다.
다른 한 편에서는 독립군의 전사들이 몽둥이를 들고 라어를 무식하게 때려잡고 있었다. 전부 마나의 사용이 가능한 상급 이상의 전사들이라서 라어의 물총 공격에 맞아도 끄떡없었다.
라어의 앞에서 잔발로 움직이던 에릭이 라어의 물총을 민첩하게 피해낸 후 라어의 몸통에 멋진 발차기를 날렸다. 라어는 길이가 1미터 정도 되고 몸무게는 20킬로도 안된다. 발차기에 맞아 경직된 라어를 에릭이 날개 죽지를 잡아서 신기의 앞에 끌고 왔다.
신기가 라어를 얼리자 에릭은 곧바로 뛰쳐나갔다. 여러 마리의 라어들이 독립군의 전사 한 명을 협공하고 있었다. 의사도 적고 약품도 부족한 열악한 환경이라 부상을 조심해야 한다. 상급 전사가 부상으로 오래 누워있으면 힘들게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균형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
부상을 걱정해서 방어태세만 유지하던 전사를 에릭이 구해주었다. 날아차기로 라어 한 마리를 경직시킨 후 곧바로 돌려차기로 다른 라어 한 마리를 튕겨냈다. 라어들이 공격 목표를 에릭으로 바꾸었지만 에릭은 2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물총을 전부 피해낸 후 또 한 번의 날아차기로 라어 한 마리를 경직시켰다.
"에릭 칸토나 장군의 발차기는 마나를 이용해 공격 상대에게 스턴을 넣고 있어요. 4단계까지는 잘 먹히는데 5단계 괴수를 상대로는 효과를 못 볼 때가 많아요."
라어 다섯 마리를 날아차기와 돌려차기로 만 해결하는 모습에 신기는 감탄했다. 이름도 멋지고 발차기 실력도 대단하다. 돌려차기는 조금 부족해 보였지만 날아차기는 수만 명의 관객 앞에서 선보여도 전혀 부끄러울 것이 없을 정도의 수준을 자랑했다.
"자자,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만 돌아갑시다."
라어를 가둔 얼음들을 엔진마차의 안과 위에 싣고 남은 자리에는 사람들이 빼곡히 탔다. 바이올라와 몸이 밀착된 신기는 자꾸 몸에 열기가 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몸이 덥고 답답해서 그런지 마음도 답답해져서 괴수들을 상대로 마법을 시원하게 쓰고 싶었다. 하지만 엔진마차는 능숙하게 괴수들이 없는 지역을 골라서 이동했기에 신기가 활약할 기회는 아예 없었다.
얼어붙은 라어들을 주술사와 전사들에게 맡긴 다음 승우만 싣고 다시 라어 잡으러 떠났다. 라어가 얼음에서 풀려나도 주술사와 전사들이 대응 가능하지만 승우는 안된다. 물론 이들이 승우를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승우를 죽이거나 놓치면 모든 계획을 망친다.
보름의 시간을 소모해 모든 준비가 끝나자 세 대의 대형 엔진마차를 비롯한 모든 엔진마차에 라어를 가득 싣고 용골 산맥으로 향했다. 사막의 중심에 있는 용골 산맥은 산맥이라고 부르기에 높이나 규모가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름이라 이들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모래의 알갱이가 점점 굵어지고 가끔 메마르지만 굳은 땅들이 나오기도 했다. 며칠의 힘든 행군 끝에 목적했던 곳에 도착했다. 백여 년 전까지 오아시스였던 곳에 도착한 신기는 승우에게 걸린 얼음 마법을 조절했다.
몸의 절반만 구속하고 머리와 가슴 부분은 밖으로 내놓았다. 라어를 가져다가 역시 몸의 일부만 드러나게 하고 승우에게 가져다 댔다. 라어의 몸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어느 순간 그 존재가 사라졌다. 그렇게 라어를 계속 흡수시키자 승우의 붉은색 깃털이 점점 검게 변했다.
백여 마리의 라어를 흡수한 승우는 까마귀처럼 완전 새까많게 변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얼음을 벗어날 수 없자 승우의 목이 부풀어 올랐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이 귀를 틀어막았지만 승우의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한참을 울어젖힌 승우의 깃털이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자 신기는 얼음으로 쓸모를 다 한 승우를 꽁꽁 감쌌다. 수많은 부족의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모여서 승우가 비를 내려주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일부 주술사들은 무릎을 꿇고 대지의 정령에게 구름의 눈물을 거부하지 말아달라고 청원을 했다.
짧지만 긴 사흘의 기다림 끝에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이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자 전사들이 나무로 만들어진 삽을 들고 물길을 내기 시작했다. 땅이 물을 빨아들이는 속도보다 강우량이 많아지자 물줄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술사들은 끊임없이 지팡이를 땅속에 꽂으면서 무언가를 가늠했다. 그러다 조건이 부합된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씨앗 주머니를 꺼내서 땅속에 묻은 뒤 성장의 주술을 사용했다. 주술을 양분 삼아 빠르게 자란 식물들의 뿌리가 서로 엉키며 땅을 잡아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푸른색이 점점 많아질 때 일부 주술사들이 모래지렁이를 꺼냈다. 마석을 삼킨 모래지렁이들의 덩치가 커지더니 모래를 먹기 시작했다. 모래를 배불리 먹은 모래지렁이는 한참의 시간 뒤에 모래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토해낸 것은 모래가 아닌 흙이었다.
흙으로 덮인 부분에 뿌린 씨앗에서는 풀과 같은 작은 식물이 아닌 큰 나무가 자랐다. 주술로 쭉쭉 자란 나무들은 가지를 넓게 펼쳐서 그늘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나무뿌리들이 서로 엉키면서 흙들이 빗물에 쓸려가지 않도록 잡아두었다.
전사들이 지속적으로 물길을 내면서 푸른색으로 변한 곳이 홍수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비는 오일 간 쉬지 않고 내렸고 전사와 주술사 그리고 모래지렁이들은 오일 간 쉬지 않고 일했다.
비가 그친 후에도 계속 녹지의 면적을 넓혀갔고 적당한 위치에 나무를 심었다. 그렇게 칠일 동안 잠도 못 자고 일을 한 후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만족한 얼굴로 쓰러져서 잠에 들었다. 원래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푸른색이 모두의 눈앞에 펼쳐졌다.
"감사해요. 대마법사님 덕분에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겼어요."
바이올라가 신기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지만 비가 그친 지 이틀이나 되어 비가 내릴 때보다 볼거리가 부족했다. 바이올라의 따뜻한 체온이 신기는 전혀 싫지 않았다. 자신의 두 팔을 바이올라의 허리에 감을까 고민하는 사이 바이올라가 신기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루가 넘는 시간 숙면을 취한 검은 전사들과 검은 주술사들은 일어나자마자 음식도 먹지 않고 춤부터 추었다. 몇 시간 춤을 추고 난 뒤에 이들은 물과 음식을 섭취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춤으로 대지의 정령과 태양의 정령에게 감사를 표해야 해요. 이들이 모시는 가장 위대한 두 정령이에요."
이들은 일부 지역에 괴수들이 침입을 못하는 것이 대지의 정령의 보살핌이고 괴수들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태양의 정령이 굽어살핌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는 위대한 인간들의 의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용골 산맥에 드래곤의 뼈가 묻혀 있어서 괴수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가지고 있던 마석들을 이번에 다 소모했어요. 하지만 희망이 생겼으니 우리 모두 뭉칠 수 있을 거예요. 대 부족들이 손잡고 괴수들을 토벌해 마석을 모으기로 했는데 대마법사님도 도와주실 거죠?"
바이올라의 요청에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기신이 이룬 성과들에 살짝 자격지심이 있었는데 자신은 작은 대한민국이 아니라 거대한 아프리카 대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반드시 이순신 장군처럼 역사 책에 많은 쪽수를 차지하는 인물이 되리라고 결심했다. 겸사겸사 바이올라와 더 가깝게 지내면서 기회를 보아 함께 성인이 되려는 소박한 목표도 생겼다.
"목표를 정하고 작전을 짜는데 며칠 걸릴 거예요. 일단 푹 쉬면서 기다리세요. 그리고 이건 과일나무에서 자란 과일이에요. 엄청 달달한데 맛 좀 보세요. 설마 제가 한입 먼저 먹었다고 싫은 건 아니죠?"
- 작가의말
봄바람 휘날리며가 아니라 봄바람에 휘날리며입니다. 표절로 욕먹진 않겠죠?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