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수 데이
연호는 삼십 대 중반의 평범한 회사원이다.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간 마누라 덕분에 오랜만에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술 한잔하려고 친구들을 불렀다. 그러나 연호의 호출에 응한 사람은 경철밖에 없었다.
"사는 게 와 이리 팍팍하노. 술 한 잔 도."
술에 거나하게 취한 연호는 술만 찾았다. 경철은 능숙하게 생수를 연호에게 따라주었다. 생수를 단숨에 넘긴 연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소주에 물 타나. 와 술이 이리 매가리가 없노."
그때 TV에서 축구 경기가 나왔다.
"와, 징하다. 월드컵 아직도 하노."
"인마, 저거 영국 리그 컵이다. 그만 처묵고 집 가라."
"조기 머리 까만 아 한국선수 맞제? 내 이름두 안다. 박지석 아이가."
"야구밖에 모르는 아가 와 이리 나대노. 똑띠 들으래이, 점마 이름이 차범수데이."
한편 리그 컵 결승 생중계를 해설하는 두 해설위원은 신이 났다.
"먼저 노츠 카운티의 선발진을 소개해드립니다. 골키퍼는 터너, 27경기 22실점의 대단한 키퍼죠. 중앙수비수는 토마스와 나이스, 왼쪽 풀백은 독일 국가대표 베노이고 오른쪽 풀백은 카스퍼입니다."
"이어서 수비형 미드필더에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차범수와 김시웅이 출전했습니다. 그리고 차범수 선수는 주장 완장을 왼팔에 달았습니다."
"공격진입니다. 공격형 미드필더에 르노와 엑토르 그리고 보나비치 선수가 출전했고 중앙 공격수에는 헌터 선수가 자리했습니다."
두 해설위원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토트넘의 선발진도 소개했다.
"한국 팬에게 회색 악어라고 불리는 그레이 선수 대신 김시웅 선수가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했습니다. 많은 전문가의 의견과는 다릅니다."
"예전에 에릭센을 꽁꽁 묶었던 경험이 있어 아주 예상 밖은 아닙니다. 이번 시즌 위치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바꾸면서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못했습니다."
"김시웅 선수의 용기 있는 도전에 찬사를 드립니다. 이미 프리미어리그에서 검증된 풀백인데 과감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다들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혹시나 술 한잔하시고 경기를 관람하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노츠 카운티 선수들의 등에 한글로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계묘년 새해가 밝아온 지 열흘 되는 날입니다. 새해를 늦게나마 축하하는 의미도 있고 3.1절을 기리는 의미에서 리그 사무국의 동의를 얻고 한글로 이름을 새겼다고 합니다."
"또 하나, 차범수 선수의 주장 완장에 태극기 문양이 있습니다. 노츠 카운티의 앰블럼과 나란히 있죠. 이는 노츠 카운티가 한국 팬에게 보내는 또 하나의 인사입니다."
"감독이 한국인이고 여섯 명의 한국 선수와 계약했습니다. 두 명은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고 있고 남은 선수들도 하부리그에서 경험을 쌓고 있죠. 그리고 광고주도 한국 기업입니다."
"4부리그에서 출발해서 리그 컵 우승 1회, FA컵 우승 1회, 유로파리그 우승 1회,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1회에 현재 프리미어리그 1위에 자리하고 있는 노츠 카운티입니다."
"기 감독이 대표팀 맡아서 2002년의 영광을 재현했으면 합니다.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하기 전에 노츠 카운티를 떠날 생각이 없다고 했죠. 저는 내일부터 새벽기도를 나가겠습니다. 노츠 카운티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꼭 하게 해달라고 백일기도를 할 겁니다."
"찬물을 끼얹는 건 아닙니다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99일 뒤에 열립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중계 카메라가 잠시 노츠 카운티의 팬들이 모인 곳을 비췄다. 수백 개의 태극기를 든 노츠 카운티 팬들이 화면에 잡혔다. 그리고 낡은 군복을 입은 노인이 피켓 하나를 들고 있었다.
"파이팅 코리안 캡틴. 이 말은 차범수 선수에게 하는 말인가요 기 감독에게 하는 말인가요?"
"경기 전 인터뷰를 통해 알려진 내용입니다. 저 노인은 한국 전쟁에서 동생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양인을 무척 싫어했는데 기 감독에게 감화하여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포츠의 힘이죠. 국가, 민족, 인종을 초월하여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줍니다."
경기가 시작되자 토트넘과 노츠 카운티는 높은 수준의 공방을 보여주었다.
"중계 카메라가 자주 차범수 선수를 잡습니다. 토트넘의 공격 상황에도 가끔 차범수의 모습을 잡는군요. 그 이유를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차범수 선수는 노츠 카운티 수비의 핵입니다. 최근 전적을 보면 차범수 선수가 없는 1월 초 경기에서 노츠 카운티는 5실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의 경기들을 보면 노츠 카운티가 연속 3번 승리를 거두었죠. 세 경기 합쳐서 12골을 넣고 무실점으로 승리했습니다. 차범수 선수가 이번 경기의 키맨이라는 뜻이죠."
노츠 카운티는 공격과 수비 상황에서 수비선의 변화 폭이 무척 컸다. 공격할 때는 높이 올라가고 수비할 때는 뒤로 깊숙이 내려왔다. 몇 번의 왕복을 했지만 토트넘의 수비는 허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토트넘의 선수들도 이런 식의 경기를 몇 시즌째 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노츠 카운티보다 더 능숙해 보였다.
"자, 노츠 카운티의 코너킥입니다. 노츠 카운티는 코너킥 전술이 너무 단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경기 전에 통계를 해봤는데 앞, 중간, 뒤 세 개의 포인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아주 단순한 패턴이 90%를 차지합니다."
"특이하군요. 베노 선수와 카스퍼 선수가 코너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프리킥을 찰 때 여러 선수가 상대를 현혹하는 건 봤어도 코너킥은 처음이 아닌가요?"
"처음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처음 봅니다. 주심이 양 팀 선수들을 뜯어놓는군요. 중앙에서 선수들의 자리싸움이 치열합니다."
"주심이 신호를 했습니다. 어느 선수가 킥할까요? 베노입니다. 베노가 킥, 골, 골입니다. 차범수 선수의 헤딩으로 노츠 카운티가 선취골을 넣었습니다."
카스퍼의 크로스는 평평하고 빠르게 날아간다. 보통 이런 공은 가까운 포스트를 노린다. 먼 포스트를 노리기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베노의 공은 적당한 포물선을 그리기에 먼 포스트에서 헤딩하기 편하다. 그래서 베노가 킥을 하는 순간 대다수 선수는 공이 먼 포스트로 향할 것으로 생각했다.
오직 아크 지역에 있던 차범수만 신호를 받자마자 자신의 위치를 버리고 가까운 포스트 쪽으로 달렸다. 차범수와 함께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김시웅이 아크 지역을 지켰다. 그레이나 산시스와 함께 출전했을 때 전혀 볼 수 없는 그림이다. 허를 제대로 찔렀다.
베노도 크로스가 아니라 슈팅에 가까운 공을 찼다. 차범수는 방해를 받지 않는 상황에서 편하게 헤딩했다. 헤딩 수치 10의 차범수를 무방비로 헤딩하게 놔둔 토트넘은 실점으로 그 대가를 치렀다.
헌터가 발정 난 망아지 세리머니를 요청했지만 차범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깔끔한 군례로 세리머니를 대신했다. 경기가 재개되고 두 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똑같은 경기를 펼쳐나갔다.
"음, 채팅창에 차범수 선수의 세리머니에 대한 말이 많네요. 올림픽으로 군 면제를 받은 선수가 군례로 세리머니를 올리는 게 경솔한 행동이 아니냐는 의견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차범수 선수가 아직 기초군사훈련도 받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범수 선수는 군인 가족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 그리고 외할아버지까지 군 작전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군 면제 조건을 이미 충족하고 있었죠.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국가대표로 뛰고 싶다는 차범수 본인의 의지였습니다. 군 면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죠."
S 전자 홍보팀의 작품이다. 기신, 차범수, 김시웅은 S 전자가 아시아 범위 독점으로 광고 모델 계약을 체결했다. 김시웅은 이번 시즌 노출도가 매우 낮았다. 기신은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다. 차범수는 전문가들이 보기에 대단한 선수로 성장하고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크겨 느껴지지 않는다. 골을 많이 넣거나 화려한 드리블을 하는 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선수지만 존경스럽습니다. 차범수 선수와 김시웅 선수 그리고 지난해 여름 계약한 네 명의 한국 선수 모두 국내 모 그룹의 후원으로 노츠 카운티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차범수 선수가 프리미어리그 1위 팀에서 주장 완장을 차게 될 줄은 몰랐죠."
"헌터가 주장이고 차범수 선수는 부주장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에 특별한 날이기에 헌터가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범수 선수가 주장 완장을 찼습니다."
엑토르가 돌파를 시도하다 수비수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위치가 정말 훌륭한 프리킥이다. 왼발 오른발 다 가능하고 각을 노릴 수도 있고 강슛으로 허물어진 벽 사이로 골을 노릴 수도 있다.
왼발의 베노와 오른발의 차범수 그리고 강슛을 날릴 수 있는 토마스가 공을 앞에 두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토마스와 차범수가 베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뒤로 물러났다. 베노는 공에 키스하고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베노 선수 공을 놓은 자리에서 뒤로 성큼성큼 물러섭니다. 아, 차범수 선수가 슛, 골입니다. 차범수 선수가 두 번째 골을 넣었습니다."
"세 선수의 연기가 참 훌륭했습니다.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는군요. 골키퍼의 반응이 늦었습니다. 차범수 선수가 순간적으로 치고 나온 타이밍도 무척 좋았습니다. 프리킥 자체는 아주 날카롭지 않지만 연기력으로 커버했습니다."
"차범수 선수는 은퇴 후에도 걱정이 없겠습니다. 얼굴도 잘생기고 연기도 훌륭하니 할리우드 진출해도 전혀 문제가 없죠."
차범수는 주장 완장을 벗은 후 태극마크와 노츠 카운티의 엠블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있는 팬들 앞에 달려가 군례를 올렸다. 노츠 카운티의 다른 선수들도 어설프게나마 차범수의 군례를 흉내 냈다.
"차범수 선수, 먼저 태극마크에 입을 맞췄습니다. 별거 아닌데 괜히 찡하네요."
후반전이 되자 기신은 엑토르를 내리고 그레이를 올렸다. 5일에 리그 경기가 있고 7일에 FA컵 경기가 있다. 11일에 챔피언스리그가 있고 15일에 또 리그 경기가 있다. 피로도가 높은 선수들을 관리해 줄 필요가 있다.
"지금 일반 팬분들에게 후반전 경기가 지루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전문가 관점에서 후반전 경기가 참 흥미롭습니다. 방금 현지 해설도 잠깐 도청했습니다. 현지 해설은 저보다 차범수 선수를 훨씬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현지 전문가의 객관적인 평가가 궁금하네요."
"현지 해설은 차범수 선수가 경기를 지배하고 있다고 평가합니다. 공격과 수비의 전환을 아주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고 팀의 템포를 적절하게 조절합니다. 경기 상황에 따라 리듬을 다르게 가져가 토트넘의 선수들을 매우 괴롭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르노가 그루이치로 교체되고 헌터가 후안으로 교체되었다. 노츠 카운티는 차범수의 지휘에 따라 공격과 수비 시 리듬을 다르게 가져갔다. 빠른 리듬만 원하는 토트넘은 노츠 카운티의 리듬 변화에 경기 컨디션이 엉망이 되었다.
"노츠 카운티가 결국 2:0으로 리그 컵 우승을 가져갑니다. 노츠 카운티 160년 역사에서 두 번째 리그 컵 우승, 기 감독의 리그 컵 두 번째 우승입니다. 여기에서 해설을 마칠까 합니다. 안 해설위원께서 오늘 경기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 해주시죠."
"하고 싶은 말은 많습니다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오늘은 차범수 데이입니다."
- 작가의말
코너킥과 프리킥 전술에 관한 연구와 차범수의 성장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너무 국뽕이 아니게 쓰느라 조심했습니다. 선수 이름을 한글로 한 것은 PSG가 중국어로 선수 이름을 마크한 유니폼을 입었던 경기를 보고 영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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