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폭식하다
심판의 검은 검날이 부러졌다. 그러나 모산도사와 대결하는 지금 검날이 자라났다. 찌르고 베고 후려치는 심판의 검을 모산도사는 두 자루의 목검으로 힘겹게 막아냈다. 오백 년의 공력에 두 개의 법보로 심판의 검을 힘겹게 막아내던 모산도사는 소리를 질렀다.
"너 황제 시켜준다니까. 빨리 이 검을 멈춰."
한쪽에서는 빙룡과 여의승이 누가 누구를 묶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엉켜있었다. 마법사의 직관력이 신기에게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왔다. 신기는 휘적휘적 발걸음을 옮겨서 모산도사의 방으로 향했다.
술 한 병에 안주 한 접시를 들고 신기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마당 한쪽의 돌의자에 앉은 후 술을 홀짝이며 안주를 집었다.
"도사님, 제가 무슨 깜냥으로 저렇게 대단한 법보를 멈춥니까."
모산도사가 생각해보니 신기의 말이 맞았다. 여의승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법보인데 그 법보와 대등하게 싸우는, 이마 중간에 뿔이 하나 있는 얼음으로 된 용은, 신기의 능력으로 부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알아서 움직이는 검 역시 신기의 격으로는 다룰 수 없다.
"그럼 나를 도울 방법이나 생각해."
안주도 무척 고소하고 맛있지만, 술도 신기가 지금까지 맛본 모든 음식 중에 최고라 칭할 수 있는 정도다. 신기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술을 마시는 데 집중했다. 기신의 세상에 갔을 때부터 술에 취하지 않는 몸이 되어 술을 아무리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술과 안주를 다 해치우고 나서야 지난번의 복통이 생각났다. 하지만 직관력은 술과 안주가 몸에 좋다고 알려왔다. 지난번에도 복통으로 고생했지만, 복통이 멈춘 후에 힘이 세졌다. 신기는 다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겨 술과 안주를 찾았다.
그렇게 빈 술병과 깨끗이 비워진 안주 접시가 쌓이자 모산도사가 신기에게 애원했다.
"나는 그 술과 안주가 없으면 안 돼. 다 먹지 말고 조금 남겨두렴."
"어디에 있는 술과 안주를 남길까요? 도사님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면 제가 남겨드릴게요."
"부엌 찬장에 둔 술과 안주, 그리고 서재의 서랍 안에 숨겨둔 술과 안주는 제발 건드리지 말아줘."
신기는 모산도사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빈 술병과 접시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찬장에 숨겨둔 술을 빈 병으로 옮기고 안주도 들고 간 접시에 담았다. 모산도사는 신기의 술병과 접시를 확인하고 마음을 놓은 표정이었다.
같은 방식으로 서재의 술과 안주도 먹어버린 신기는 혼잣말로 크게 중얼거렸다.
"아, 배고프다. 먹을 게 없으면 서재의 술과 안주만 먹어치우자. 부엌의 것은 도사님에게 남겨야지."
"아냐, 부엌에 쌀독을 치워봐. 그 밑에 움이 하나 있는데 안에 술과 안주가 넉넉하게 있어."
쌀독을 치우고 나무판자를 치우니 움이 하나 나왔다. 모산도사야 술법으로 날아서 오르내리겠지만 신기는 그런 재주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모산도사의 옷으로 보이는 도포들을 찢어서 밧줄을 꼬았다.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술과 안주들을 들고 올라가려니 손에 여유가 없었다.
"그냥 여기서 먹어치우자."
술과 안주를 먹어보니 모산도사가 먹지 말라고 했던 술과 안주보다 훨씬 맛있었다. 신기는 모르지만 모산도사가 먹지 말라고 한 안주는 비유의 암컷 고기였다. 수컷이 많고 암컷이 귀한 비유이기에 모산도사가 아끼는 것이지 특별한 무언가는 없다.
움 속의 술과 안주를 다 먹으니 배가 불렀다. 밧줄을 타고 밖으로 나가보니 빙룡과 여의승은 비슷하게 대치하고 있고 심판의 검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산도사의 소매가 조금 잘린 것이 보였다.
"도사님, 배가 부르니까 도사님을 돕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아무런 힘도 없어요. 도사님에게 도움이 될만한 법보를 알려주시면 제가 가져다드리죠."
"없어. 난 웬만한 법보는 눈에 차지 않아서 이 두 검과 여의승밖에 없어."
한참을 앉아서 구경했지만, 재미가 없다. 빙룡과 여의승은 이미 하나처럼 엉켜서 둥근 공 모양이 되었다. 그 상태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대치에 들어갔다. 심판의 검은 몇 분에 한 번씩 모산도사를 공격했고 모산도사는 그때마다 전력을 다해서 막아냈다.
신기는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자 서재의 책들을 가져다가 읽어보았다. 몇 권만 읽어보니 술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왜 없는지 이유를 알 게 되었다. 마법처럼 명확하게 서술한 것이 아니라 비유에 은유를 버무려서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엄청 꼬아서 내용을 적었다.
"이상하다. 직관력이 술과 안주를 많이 먹으라고 해서 배불리 먹었는데 아직도 부족한가?"
신기의 의문은 복통이 대답했다. 몸 안의 창자가 빙룡과 여의승처럼 공 모양이 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통증이 강했다. 침대에서 일어나려던 신기는 생각을 바꾸었다. 지난번에도 화장실에 가서 한참 있었는데 배만 아플 뿐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신기는 침대 위에서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떡거렸다.
모산도사는 신기가 이틀 동안 보이지 않자 걱정이 되었다. 안주야 기르고 있는 비유가 많아 걱정이 안 되지만 술 창고가 발견될까 봐 겁이 난다. 일부러 신기의 주의를 부엌과 서재에 잡아두었다. 괜히 다른 방까지 기웃거리다가 술 창고를 발견하고 귀한 술을 탕진할까 봐 걱정된 것이다.
이틀 만에 나타난 신기는 모산도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키가 유난히 큰 신기이기에 키가 작은 모산도사의 도포를 입으니 무릎이 밖으로 드러나 보기가 무척 흉했다.
"미안합니다, 도사님. 제 옷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빨래를 했습니다."
지난번에는 고기 한 점만 먹었지만, 이번에는 엄청 많이 먹었다. 신기는 그 점을 생각하지 못하고 화장실로 가려던 생각을 단념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못할 만큼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하루하고 반나절 만에 복통이 멎었지만 신기는 몸도 씻고 빨래도 해야 해서 늦게 나왔다.
"도사님, 제가 도사님을 도울 방도를 생각해냈습니다. 제가 저 검 자루를 잡고 있을 테니 도사님은 좀 쉬도록 하세요."
모산도사는 공력이나 체력이나 정신력이나 다 문제가 없다. 다만 오랜 시간 음식을 먹지 못해서 힘들다. 젊은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비유의 고기를 먹어야 한다. 그리고 술은 정신이 분열되지 않게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 네가 잠깐만 잡아두면 내가 식사를 하고 그 검을 물리치겠다."
물론 모산도사는 신기를 믿지 않았다. 다만 신기가 꿍꿍이가 있다고 해도 막아낼 자신이 있다. 그리고 신기가 진짜로 검을 잡아준다면 술과 비유만 가지고 도망을 칠 생각이다. 자신에게 적대하는 이 법보는 이겨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신기는 천천히 걸어가서 심판의 검의 자루를 잡았다. 신기가 자루를 잡는 순간 모산도사는 침묵의 술(術)을 신기에게 시전했다. 모산도사는 오백 년을 수련했지만, 아직도 고급 술법을 사용할 때 주문을 외우고 술법명을 외쳐야 한다. 신기의 입을 막아버리면 신기가 아무런 수도 쓰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불행히도 신기는 모산도사의 예상을 벗어나는 천재였다. 하늘이 내린 재주가 아니라 하늘이 모산도사에게 내린 재앙이다. 목걸이를 얻고 묵영창의 경지에 이른 신기이다. 반지를 얻으면서 자신이 사용한 마법에 대해 절대적인 면역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왼쪽 귀걸이를 얻고 마법이 마음 먹은 대로 나가는 경지에 이르렀다.
'빙풍폭설'
블리자드 마법이 심판의 검을 통해 모산도사의 가슴을 목표로 발동되었다. 신기는 원래 마법의 범위를 넓힐 생각만 했다. 다만 무고한 사람들이 다치는 것이 싫어서 범위를 조절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계약 준수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독일의 야장들은 축소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비유의 고기를 먹고 강해진 육체는 아프리카 주술사들의 저주를 끝내 이겨냈다. 술은 반년 가까이 당한 세뇌를 없애주었다. 정신을 지배하는 세뇌는 아니지만, 정신에 틈이 생기면 저주나 매혹 등 마법에 취약하게 된다. 마법을 회복한 신기는 모산도사를 해치울 계책을 생각했다.
신기는 모산도사에게 딱히 악감정이 없다. 다만 이순신 장군의 의지가 모산도사를 적대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은 처단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특히 힘을 가진 나쁜 놈은 살려두는 것이 아니다.
과연 모산도사는 침묵의 술을 사용한 후 잠시 방심했다. 그리고 심판의 검을 잡은 신기가 어떻게 되는지에 정신을 팔았다. 격이 부족한 자가 격이 높은 법보를 강제하려고 하면 법보의 반발을 받는다. 모산도사는 신기가 얼마나 버틸지 가늠하고 얼마나 챙겨서 도망갈지 결정하려고 했다.
블리자드가 범위가 아주 넓은 마법은 아니다. 바람 마법인 칼날비에 비하면 범위가 좁은 편이다. 하지만 수만 마리의 괴수를 범위 안에 넣을 만큼은 된다. 그리고 중심에 있는 괴수들이 얼어 죽을 정도의 위력도 된다.
그런 고위 마법이 작은 범위로 그 위력을 집중시켰다. 미리 알고 준비했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모산도사는 마법에 의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때 심판의 검이 신기의 손에서 벗어나서 모산도사의 심장을 찔렀다.
빙룡에 비해 수준이 낮지만, 너무 강대한 위력을 가진 마법이 작은 범위에 국한되다 보니 모산도사의 몸은 가루가 되었다. 빙룡처럼 기술로 해낸 것이 아니고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모산도사의 두 자루의 목검이 바닥에 떨어졌고 모산도사의 품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주머니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거 제강의 가죽으로 만든 최고급 마법 주머니구나."
5등급의 제강은 괴수 자체가 주머니처럼 생겼다. 발이 여섯 개이고 날개가 넉 장인데 얼굴이 없다. 생포해서 마법으로 가공하면 최고급의 마법 주머니가 된다. 신기는 마법 주머니를 들고 힘차게 흔들었다.
마법 주머니 안에서는 책 몇 권만 나왔다. 아마 모산파의 비전 술법들로 추측되었다. 책을 주워서 마법 주머니에 갖다 대자 주머니가 책을 덥석 삼켰다. 책들을 다 삼키게 한 뒤 심판의 검을 가져다 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주머니가 심판의 검을 삼켰다.
마법 주머니를 떠올리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된다. 기존의 마법 주머니보다 훨씬 편리했다. 그리고 블리자드에도 견뎌내는 것을 보면 내구성도 매우 좋은 것 같다. 목검 두 자루도 마법 주머니로 갈무리한 다음 빙룡과 여의승을 바라보았다.
직관력이 가까이에도 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두 힘이 충돌하면서 그 찌꺼기를 주변으로 방사하고 있다. 신기는 빙 둘러서 뒷마당으로 향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옷의 냄새를 맡은 신기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채 마르지 않은 옷을 한 번 더 빨래했다.
부엌을 잘 뒤져보니 여러 가지 쌀가루들이 있었다. 신기는 쌀가루들을 물에 타서 배를 채운 후 남은 쌀가루들을 마법 주머니에 넣었다. 몇 번의 훈련을 거쳐 필요한 만큼의 쌀가루만 마법 주머니로부터 꺼내는 데 성공했다.
신기는 쌀가루로 배를 채우면서 빙룡과 여의승의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모산도사가 죽은 후 여의승이 점점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반면 빙룡은 빙정을 흡수한 후 빠르게 강해지고 있다. 며칠 안에 싸움이 끝날 것으로 예상한다.
신기가 쌀가루로 배를 채울 때 호랑이의 몸에 소꼬리를 한 6등급 몬스터가 대마도를 향해 헤엄치고 있었다. 대마도에는 왕세자 신현이 대마도를 수복한 것을 기념해서 축하연회를 벌이고 있었다. 후지산과 동경 사이에 마붕탄이 떨어졌지만 그것을 감지할 만큼 대단한 마법사가 없었다. 김은결도 마붕탄의 폭발을 감지하지 못했다.
- 작가의말
슬슬 기신으로 갈아타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세계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섞어서 지루하지 않게 하려는 목적인데 제대로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뒤의 이야기가 뻔해진다 싶을 때면 Alt+Tab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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