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기 쉽지 않다
한국에 도착한 후 차범수는 집으로 가고 기신은 에릭과 함께 호텔에 숙박하려다가 기여운의 강력한 요청으로 집으로 가서 묵게 되었다. 이가 빠지는 나이라 평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기여운은, 강아지 신기를 안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강아지 어디 아픈 거 아냐? 왜 몸은 자라지 않는 거야?"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묻자 기신은 원래 그런 품종이라고 대답했다. 기신은 집밥이 그리웠지만 기여운은 외식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래서 기신은 가족들과 함께 외식을 먹게 되었다.
"아저씨, 사인 부탁드려요."
난데없는 사인 요청에 기신은 깜짝 놀랐다. 거절할까 했지만 아버지가 곁에서 부추기자 어쩔 수 없이 사인했다. 사인하며 기신은 두 여학생에게 질문했다.
"저를 아세요?"
"그럼요. 핸드폰 광고 찍으셨잖아요."
볼살이 통통한 여학생이 대답했다. 눈매가 살짝 날카로운 여학생이 사인받은 종이를 가방 안에 넣으면서 역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아저씨 무슨 작품 하셨어요? 제가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는 다 챙겨보는데."
"우선 아저씨 아니고요. 저 서른 방금 넘었어요. 그리고 배우 아니고 축구 감독입니다."
"대박!"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은 두 소녀는, 사인을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떠났다. 축구 감독이라서 대박인지, 아니면 서른을 방금 넘었다는 것이 대박인지, 끝까지 밝히지 않고 사라진 것이다. 덕분에 기신은 찝찝한 기분 속에서 식사를 마쳤다.
시차의 영향을 안 받고 꿀잠을 잔 기신은 차범수와 에릭과 합류한 뒤 S 호텔로 향했다. 그곳에서 광고계약서에 사인하고 기자회견도 열린다. 차범수의 얼굴이 너무 굳어있자 기신은 차범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오늘 온 기자들 다 우리 편이야. 그러니 답안지를 미리 외워두면 아무 걱정이 없어."
"감독님, 저 이과인데요."
"나도 이과야. 그리고 암기는 이과 문과하고 상관이 없어."
정작 기자회견장에 들어서자 차범수는 긴장감을 표출하지 않았다. 얼굴이 조금 굳어있었지만, 평소에도 그런 얼굴이니 긴장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악수를 하는 사진을 찍은 뒤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돌발질문은 하나도 없이 미리 받은 질문지의 질문들만 올라와서 쉽게 끝냈다.
계약이 끝난 뒤 S 그룹이 소유한 K리그 구단과 관련된 행사가 있었다. 차범수는 선수로 뛰고, 기신은 감독으로서 청소년 선수들의 친선경기에 참여했다. 경기가 끝나자 청소년 선수들에게 간단한 강연을 해주어야 했고 질문도 받았다.
평소 어떻게 훈련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차범수가 성실하게 대답하자 기신이 마이크를 빼앗았다.
"차범수 선수처럼 훈련하면 대부분 골병이 들어 20살이면 은퇴해야 합니다. 훈련은 쉽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장점을 키우는 훈련이고 하나는 단점을 커버하는 훈련입니다. 다른 사람의 훈련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많이 고민하고 훈련해야 효과가 좋습니다."
선수들이 잘 이해하는 표정이 아닌 듯하자 기신은 쉽게 풀어 설명했다.
"훈련을 하다가 본인이 재밌는 훈련을 더 하든지, 본인이 가장 힘들던 훈련을 더 하든지, 본인이 잘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물론 둘 다 하면 좋지만, 과도한 훈련은 몸을 망칩니다. 차범수 선수처럼 타고난 강골이 아니면 훈련을 적당히 해야 합니다."
행사를 끝내고 저녁에는 김 전무와의 식사가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밤이 늦어서 셋 다 호텔에서 자기로 했다. 차범수가 핸드폰으로 확인한 결과 계약에 관한 뉴스나 청소년 선수들의 친선경기에 참여한 뉴스가 메인화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범수야, 댓글 보지 마. 세상에는 꼬인 사람이 많다."
기신의 충고로 차범수는 호랑이 아가리 앞에서 돌아설 수 있었다. 푹 자고 일어난 셋은 곧바로 광고 촬영을 하러 출발했다. 이번 광고는 시리즈로 찍는데 일부는 실내에서 훈련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일부는 야외에서 촬영한다.
기신이 화장을 하고 대기하고 있는데 비슷비슷해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블링블링 빛나는 우리는 '빛나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신은 엉겁결에 허리를 숙여 맞인사를 했다.
"오빠 안녕하세요."
모르는 여자가 갑자기 아는 척을 해오자 기신은 질문을 던졌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누구세요?"
"우리 언니 이름이 고은희예요. 저는 세라라고 불러주세요."
"아, 가수 한다는 동생이군요. 반갑습니다. 혹시 광고 촬영을 하러 오셨어요?"
"네, 치어리더 역할 맡고 있습니다."
짧게 대화를 나눈 후 세라와 멤버들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인사를 하러 움직였다. 카메라 감독이나 조명 감독들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니 돈 벌기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 8부로 기획된 시리즈는 7부까지 차범수의 분량이 대부분이다. 기신은 핸드폰으로 조종하는 시늉만 하면 되고 차범수는 훈련을 하는 장면부터 경기에 임하는 장면까지 반복적으로 촬영해야 했다. 차범수는 실제 훈련을 하는 것처럼 촬영에 임했는데 광고 감독은 자꾸 표정 연기에 대해 요구를 해서 촬영이 길어졌다.
8부에서는 반대로 차범수가 핸드폰으로 기신을 조종했다. 알고 보니 기신이 차범수를 조종했던 것이 아니라 차범수가 기신을 조종했다는 반전 결말이다. 감독은 기신에게 유로파리그 결승전에서 했던 퍼포먼스를 요구했다. 두 팔을 펴고 다 덤벼를 외치는 표정을 지으라고 주문했다.
아무리 해도 감독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자 촬영 감독은 유로파리그의 장면을 기신에게 보여주었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감상을 자제하던 장면이었는데 광고 촬영을 위해 반복적으로 보게 되었다. 저작권 문제가 걸려 있어서 이 장면을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에 기신은 큰 아쉬움을 느꼈다.
그날 딕슨의 부상과 선수들의 투지, 이적을 결심한 선수들의 마지막 분투 등을 생각하며 억지로 감정몰입을 시도했다. 어느 순간 그날 모든 선수와 하나가 되었던 느낌이 찾아왔고 촬영 감독도 오케이를 선언했다. 촬영 감독의 만족스러운 표정에 기신은 보기 싫은 장면 하나가 또 생겼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8부까지 전부 촬영했지만 끝난 게 아니다. 감독과 스텝들이 영상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면서 부족한 장면들을 찾고 재촬영을 요구한 것이다. 다행히 대부분 차범수의 분량이었기에 기신은 지친 몸을 뉠 수 있었다.
"오빠, 왜 동창회에 참가하지 않는 거예요?"
"아직도 일정이 많이 남았어요. 예능 촬영도 해야 하고 행사도 여섯 개 남았어요. 그리고 추가로 어떤 일정이 생길지 몰라요. 멕시코도 한 번 다녀와야 하고요. 도저히 시간이 나지를 않아요."
기신은 멕시코로 가서 마르코를 설득할 생각이다. 만약 코치가 되는 것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면 마르코를 개인 스카우트로 고용할 계획이다. 중남미 유망주들을 체크해서 기신이 갈 때 최대한 많은 선수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맡기려 한다. 물론 계약은 에릭 헌터의 회사와 하게 될 것이다.
기신이 심심할까 봐 걱정되었는지 차범수가 잠깐씩 촬영을 쉬는 시간에는 기신의 분량을 재촬영했다. 비록 이미 촬영한 것들이 마음에 들지만 의외로 이렇게 가볍게 찍을 때 좋은 장면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체력을 회복한 차범수가 다시 등장하면 기신은 구경꾼이 되었다.
"제가 아는 언니 있는데 요즘 엄청 잘나가는 배우예요. 그 언니도 축구팬인데 한 번 만나주시면 안 돼요?"
"미안해요. 제가 일정이 확정적이지 않아 함부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최영호나 잘 아는 사람이 부탁하면 들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대화를 나누는 세라가 부탁을 하자 불편함이 느껴졌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엄청 가볍게 여긴다는 느낌이 들었고, 끼리끼리라는 말이 있듯이 배우라는 여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두 분 수고 많으셨습니다. 편집하다가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촬영을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광고 촬영이 끝난 후 행사도 뛰었고 예능도 두 개 촬영했다. 한국의 예능은 차범수와 함께 토크쇼에 나갔다. 토크쇼의 진행자와 패널들이 너무 금칠을 해주는 바람에 기신은 체한 기분으로 녹화를 끝냈다. '명문대'와 '대기업'을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기신이 반감이 생길 정도였다. 그리고 그놈의 '최초'는 어찌 집착하는지 뭐만 말했다 하면 '동양인 최초 아닌가요?', '한국인 최초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다음 일정으로 중국 토크쇼를 제주도에서 촬영했다. 이번에는 기신에 대한 금칠이 별로 없었지만 왕후이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말해달라고 기신에게 강요하는 분위기였다. 대놓고 '왕후이는 이렇게 대단한 선수라 생각하는데 당신 생각도 똑같지 않냐'라는 식으로 질문을 던졌다.
금창과 통화를 한 결과 왕후이를 반년 더 데리고 있으라고 했다. 중국 리그는 봄에 시작하기 때문에 그때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노츠 카운티의 재정을 위해서 기신은 눈을 질끈 감고 왕후이 덕분에 유로파리그 우승을 따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겨우 힘들게 모든 일정을 전부 소화했는데 일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토크쇼를 촬영할 때 차범수가 기신과 만났던 일을 그대로 말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훈련하는 장면만 보고 차범수의 가능성을 알아봤다는 말에, 마케팅팀에서 축구 꿈나무들을 모아서 한 번 가능성을 봐주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기신도 혹시 차범수와 같은 보물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국과 축구 협회가 협력하고 S 전자가 협찬하기로 했고 준비 기간은 2주로 잡았다. 공중파 황금시간에 광고를 팡팡 때려댔고 온라인에서도 엄청 화제가 되었다.
그렇게 기신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을 때 정작 본인은 멕시코로 향하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 안에서 고생하며 신기의 세상처럼 이동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실 제주도에서 대만으로 가는 이동문에 들어갈 때 출구로 나가면 원래 세상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결과적으로 그 문을 통과한 후에 돌아오긴 했지만 말이다.
마르코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공교롭게 손님이 와 있었다. 마르코는 기신에게 손님들을 소개했다.
"여기는 내 옛날 코치 하비야. 이쪽은 하비의 아들 엑토르고."
- 하비 에르난데스
- 수비 훈련 10, 공격 훈련 9, 기술 훈련 10
기신은 적극적으로 하비와 악수를 했다. 마르코는 스카우트가 천직이 분명하다. 굳이 코치가 싫다는 사람을 어렵게 설득하는 것보다 편하게 스카우트 일을 하라고 해야 한다.
"노츠 카운티의 감독 기신입니다. 마르코처럼 훌륭한 수비수를 키워내신 분이군요. 노츠 카운티로 모셔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 엑토르 에르난데스, 2001년 11월 21일, 키 188 몸무게 78
- 현재 능력 69, 잠재 능력 81
- 중앙공격수, 좌우 윙, 공격형 미드필더 전부 가능합니다.
- 현재 무릎 부상으로 축구를 할 수 없습니다.
돌파 8, 골 결정력 8, 드리블 9, 공격 위치선정 9, 가속 능력 9. 무릎 부상만 빼면 완벽한 공격수가 기신의 앞에 나타났다.
- 치료를 시도하지 않기 바랍니다. 한 달 이상의 혼수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최근에야 알았지만, 체중은 현재 체중이 아니라 적정 체중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선수가 어느 정도의 체중을 유지해야 하는지로, 키에 비해 요구 체중이 높지 않은 선수는 보통 기술형이다. 기신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작가의말
빠르게 진행하겠습니다. 있을 법한 일들을 건너뛰면 글이 삭막해집니다. 하지만 곁가지를 너무 풍성하게 하면 글이 지루해지죠. 완급조절이 나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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