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신 댓글에 짓밟히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해보니 기신과 김순애의 모호한 기사가 났다. 둘이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인데 김순애의 얼굴은 측면으로 나온 사진이었다. 김순애는 몸매가 강조된 사진이고 기신은 얼굴을 돌리고 대화하고 있어서 정면으로 얼굴이 나왔다. 기사도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다. 프로그램 홍보를 위한 기사인데 엉뚱한 사진을 가져다 썼다.
[저는 괜찮습니다. 김순애 씨만 괜찮으시면 됩니다.]
기신의 의도는, 나는 괜찮으니 너만 괜찮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정작 문자를 발송하고 보니 애매했다.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괜히 문자를 보내 해명하면 더 이상해질 가능성이 크다.
'이상하게 말리네. 말은 잘 통했지만 별 감정은 없었는데.'
심란해진 기신은 그만, 생각 없이 댓글보기를 클릭했다. 그리고 신세계가 기신의 앞에 펼쳐졌다. 베스트 첫 댓글은 짧고 굵었다.
- 했네 했어.
주어가 없다. 비록 기신이 문과를 등한시했지만 주어와 술어가 문장을 구성하는 골격이라는 것은 안다. 목적어나 보어를 생략한 것까지는 이해한다. 바쁜 시대에 생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어를 생략하는 행태를 용서할 수 없다.
- 남자 눈빛에서 음란함이 느껴진 건 나뿐인가?
주어는 있지만, 구체적인 명시가 없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찍힌 사진이라 남자 여럿이 나온다. 기신은 지능범의 냄새를 맡았다. 분명히 매일 수백 건의 기사에 댓글을 달면서 갈고닦은 솜씨다. 훈민정음이 발표되기 전부터 댓글을 달아온 노련함이 엿보인다.
- 여자가 아깝네.
기신은 어이가 없었다. 국민감독 기신이 아깝다니. 여배우가 만나자고 하는 걸 쿨하게 깐 기신인데. 내가 전자하고 체결한 광고로 돈 얼마 벌었는지 알아?
- 기신이네. 지난해에 여 아이돌들과도 잠깐 스캔들이 있었는데?
잠깐 기사 몇 개가 올라왔다가 전자에서 빠르게 내려보냈다. 김시웅을 발탁한 프로그램과 기신의 유로파리그 다큐멘터리를 함께 내보내고 동시에 새 광고를 내보내려고 기획하고 있었는데 철없는 애들이 고춧가루를 뿌렸다. 헛수작을 못 부리게 법무팀에서 명예훼손죄와 무고죄 등 있는 죄 없는 죄 다 끌어다가 고소했다고 한다.
- 베스트 댓글 여아이돌들 과에서, 들 실화냐?
밑에는 천일야화라느니, 구전설화라느니, 잔혹 동화라느니, 민주화라느니 이상한 리플들이 잔뜩 달렸다. 그리고 서로 댓글을 품평하며 욕설을 주고받고 갑자기 정치 얘기로 번졌다. 그 흐름의 변화에 기신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 기신 동창인데, 학교 때부터 여자가 끊이질 않았다.
고수의 향이 났다. 기신이 여자가 끊이지 않았는지, 본인이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고 자랑하는지 모호하다. 혹시 댓글 다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의 강사인가 의심할 정도이다.
- 남자들이란, 이쁜 여자만 보면 껄떡대느라 정신이 없네.
기신은 뒤로가기를 누른 후 기사의 사진을 봤다.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이 가득한 기신이 맑고 깨끗한 눈을 하고 있었다. 사진 어디를 봐서 껄떡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는지 궁금하다. 물론 머리를 해부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댓글을 다는 걸 보니 뇌 자체는 건강할 듯하다.
로그인한 기신은 역사적인 첫 댓글을 달았다. 지금까지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달아본 적이 한 번도 없다.
- 꼬인 사람들이 많군요. 남자 여자가 웃으며 대화하면 다 이상한 겁니까? 님들은 이성하고 대화할 때 다 정색하고 합니까?
몇 번이나 망설이다 끝내 등록 버튼을 눌렀다. 사과를 한 입 베문 느낌이다. 자신이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핸드폰 화면을 꺼놓고 한참 망설이다가 다시 핸드폰을 켰다. 김순애는 바쁜지 답장이 없었다.
댓글난에 들어가니 무슨 알림들이 와있었다. 클릭해 들어가 보니 기신의 댓글에 리플들이 잔뜩 달려있었다.
- 엄마한테도 웃어본 적 없음.
- 어제 엄마한테 웃으니 날 데리고 병원에 갔음.
- 결혼한 사람 외에 웃어주면 바람 아님?
- 내 첫 웃음은 꼭 우리 신랑한테 바칠 거야.
- 기신 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 엄마가 웃음이 헤픈 남자 조심하라 했어. 바람기가 있다고.
- 이거 아이피 검색해보니 영국 가능성 큰데, 진짜 본인인 듯.
아이피 소리에 급하게 확인해보니 아이피 앞 2자리가 노출되어 있었다. 아차 싶어 기신은 황급히 댓글을 삭제했다. 그리고 모바일 브라우저의 기록도 전부 삭제했다. 증거를 인멸했다는 생각에 기신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제야 댓글을 단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죄송해요. 일 때문에 방금 문자 봤어요. 그런데 이거 진짜 기 감독님 아니죠?]
이번에는 링크까지 달려있었다. 설마 피싱 링크는 아니지 하면서 기신은 링크를 클릭했다. 이번엔 게시판이었다. 방금 기신이 올린 댓글을 캡쳐한 이미지와 지금은 삭제되어 없음이라는 글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 이거 기신 빼박인데.
- 해명하는 거 보면 뭔가 저린가 보지?
- 해명할 수도 있지. 그런데 삭제한 걸 보면 뭔가 걸리는 듯?
- 기신 좋아했는데 실망이다. 여자에게 정신 팔 때가 아닌데.
- 4번 댓글 븅신 기신 누군지나 알고 있냐?
- 왜 몰라. 떠오르는 광고계의 신성인데.
- 아나운서 신상 캐냈다. 이름 김순애이고 링크 타고 들어가면 정면 사진 나온다.
- 기신 실망이다. 이쁜 여자 만날 거라 기대했는데.
- 기신 실망이다. 가까운 곳에 엘프를 두고 김치녀라니.
- 기신 실망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 기신 실망이다. 얼굴은 고치면 된다는 마인드인가?
[댓글은 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김 아나운서께 피해가 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기 감독님 아니라면서요. 누군가 장난을 한 거겠죠. 4월에도 제가 가게 되었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휴식시간인지 답장이 빠르게 왔다. 기신은 심란한 나머지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필요한 건 없습니다. 김 아나운서께서 건강하게 오시면 됩니다.]
문자를 보낸 뒤 기신은 소파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했다. 댓글 하나 때문에 순결이 짓밟힌 느낌이다. 그때 문자가 와서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고마워요.]
뭐가 고맙다는 거지? 기신은 문자를 한 번 복기했다. 이상하다. 무언가 이상하다. 무언가 아주 이상하다. 자신이 보낸 문자들이 하나같이 애매했다. 특히 마지막 문자, 필요한 거 뭐냐는 질문에 너만 건강하게 오면 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망했다. 왜 문자를 이렇게 대충 보냈지? 얼마 봤다고 문자를 이렇게 편하게 보내?"
기신이 자책하고 있는데 수석 코치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기 감독, 다음 상대는 꼭 이겨야 하는 상대야. 부상과 출장정지로 주전이 여섯이나 빠졌어."
기신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속에 치미는 울화를 경기에 쏟기로 했다. 전술 코치와 함께 공격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진형과 전술을 짜냈다. 훈련 시간에 수비 코치들이 조금은 주늑 든 표정이었지만 기신은 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홈에서 약해진 상대를 7:0으로 이긴 후 기신의 속이 조금은 풀렸다. 다시 큰 결심을 하고 한국의 포털에 접속했다. 그래도 지난번의 교훈을 섭취하여 다른 포털을 선택했다. 노츠 카운티의 승리 기사가 메인에 떴다.
- 했네 했어.
- 나 이 결혼 반댈세.
- 캬, 사업운 애정운 다 극상일세.
-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야.
- 연애하더니 사람이 달라졌네. 90분에 일곱 번이라니.
- 여자한테 기 빨리는 남자들 많은데, 기 감독은 기 하나도 안 빨렸네.
- 기신 감독 기 빨리면 신 된다.
축구 기사라서 댓글들이 지난 연예란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베스트 댓글 1위는 어디서 보던 애 같다. 기신은 요즘 성형이 발달해서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위안했다. 모바일 브라우저를 닫은 후 브라우저 아이콘을 찾기 어려운 곳에 숨겼다. 자신이 무언가 밟지 말아야 할 금지에 발들인 느낌이 들었다.
4월이 되어 불타는 청춘 제작진과 30명의 선수가 유럽을 찾았다. 벨기에의 프로팀과 프랑스 및 독일의 청소년 팀들과 경기를 하고 마지막으로 노츠 카운티를 찾았다. 유럽 팀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선수들은 마지막 희망을 품고 노츠 카운티를 방문했다.
기신이 귀띔해준 대로 훈련하니 짧은 시간 안에 실력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자신만만하게 유럽으로 향했는데 결과는 처참했다. 속도감 자체가 달라서 상대에게 농락당하는 수준이다. 자전거를 타고 승용차와 경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프로그램은 이미 방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번 유럽행을 끝으로 잠시 휴식에 들어간다. 그리고 6월에 기신이 한국에 가서 불타는 청춘 팀의 감독으로 2부리그 팀과 경기를 벌인다.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팀은 해산한다. 물론 해산 전에 기신이 계약 여부를 결정하는 하이라이트가 남아있다.
이미 선수들은 전부 S 전자와 계약이 되어 있고, 에릭 헌터가 이 선수들의 임시 에이전트가 되었다. 물론 에릭 헌터는 이름만 빌려주고 구체적인 일은 전부 S 전자의 직원들이 한다. 기신이 선택한 선수를 제외하고 남은 선수들은 마지막 촬영을 끝으로 에릭 헌터와의 계약도 끝난다.
"화장을 하셨네요? 맞는 화장품 찾으신 건가요?"
"아뇨, 오늘하고 마지막 날에만 촬영 분량이 있어요. 그래서 제작진이 화장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김순애 아나운서는 입체감이 강한 얼굴인데 선이 매우 연하다. 굵은 선이 어울리는 얼굴형인데 동양인의 부드러운 선을 가지다 보니 카메라에 잡히면 이상하게 나온다. 기신은 김순애의 프로정신에 살짝 감동했다. 피부에 문제가 생길 것을 각오하고 화장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촬영 경험이 별로 없는 기신과, 마찬가지로 신입 태를 겨우 벗어가고 있는 김순애는 자신들을 은밀히 촬영하는 카메라가 있음을 감지하지 못했다. 작년에 큰 기대 없이 했다가 대박을 친 것과 달리 현재 시청률이 저조하다. 초반에 재미없는 내용으로 질질 끌었기 때문이다. 잠깐이지만 기신과 김순애가 화제가 되면서 초반 시청률이 높아서 둘이 시청률을 끌어올려 주기를 바랐다.
노츠 카운티는 3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2위 자리를 굳혔다. 1위와는 4점 차이를 두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승급이 이미 결정되었지만 1위 가능성이 있기에 아직 축제는 벌이지 않았다. 마음에 여유가 있는 덕분에 노츠 카운티의 훈련을 촬영하는 것을 허락했다.
관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김시웅과 차범수의 훈련은 전담 카메라까지 안배하여 찍었다. 하지만 차범수의 6시간에 달하는 개인 훈련에 제작진이 오히려 지쳤다. 김시웅은 4시간의 강훈련을 완성한 후 스트레칭만 반 시간을 더 했다. 뭉친 근육을 충분히 풀어줘야 이튿날 훈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쁜 사랑 하세요.]
최영호의 문자였다. 기신은 피식 웃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마음에 여유가 있어 굳이 기사를 검색하지 않았다.
[너나 잘하세요.]
최영호도 고순희에게 시달리고 있다. 성격이 면도날처럼 예리한 기신과는 달리 최영호는 쉬운 성격이다. 모질게 거절을 하지 못하니 젊은 나이에 꽤 성공한 최영호에게 들러붙으려는 여자들이 적지 않았다.
[했네 했어.]
최영호의 문자에 기신은 신경질적으로 문자 기록을 삭제했다. 차범수와 김시웅, 그레이와 헌터의 훈련량을 지켜본 불타는 청춘 팀의 선수들은 얼굴에 자신감이 사라졌다. 훈련 강도와 훈련 시간 중 어느 하나 따라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인터넷 댓글들 최대한 순화했습니다. 제가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영혼이라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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