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는 용의 후손?
새벽이 되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신기가 방문을 열어보니 천으로 얼굴을 감싼 어떤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신기는 이미 옷을 차려입었기에 곧바로 사내를 따랐다. 신기를 포함해 일행은 다섯이다.
"황산에서 사흘만 머뭅다. 괴수 둥지 발견하면 돌아옵다."
안경에서 황산까지 450리는 기록을 참조한 것이다. 실제로 길을 따르지 않고 직선거리로 가면 많이 짧아진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그 지름길을 따르고 있었다.
"휴식, 괴수가 지나면 다시 움직인다."
하루 내내 걸어야겠다는 생각과 달리 중간중간 휴식도 가질 수 있었다. 신기는 맞은 편 산등성이로 괴수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괴수들이 전부 지나가자 이들은 빠른 걸음으로 괴수들의 경유지로 향했다.
괴수 시체를 기대할만한 곳이었는지, 시체를 발견하지 못한 이들은 크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시체 수색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곧바로 움직였다. 운이 없는 날인지 괴수의 무리를 세 번이나 목격했지만, 시체 하나도 남겨있지 않았다.
오후 3시 정도가 되자 곧바로 잠을 잤다. 한 명씩 보초를 섰고 신기는 당연히 제외되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밤 10시 정도였다. 이들은 달빛에 의지해서 움직였고 달빛이 구름에 가려지면 마법 전등으로 길을 비추었다.
이번 괴수 무리는 신기가 처음 보는 괴수였다. 낮은 등급의 괴수 중 한반도를 찾지 않는 두 가지 괴수가 있는데 소를 닮은 대무와 흑대풍은 아프리카에서 보았다. 하지만 양을 닮은 단근과 진랑은 신기가 처음 보는 것이다. 단근은 일반 산양과 거의 다를 바가 없지만 진랑은 곧은 뿔이 여러 개 나 있었다.
이들이 지난 자리에서 시체를 세 구나 발견했다. 이들은 예상을 했다는 듯이 자축도 없이 곧바로 마석 채취에 돌입했다. 저등급의 괴수들은 피가 흐르지 않지만, 체액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마석의 채취를 끝낸 이들은 미리 준비한 천으로 손을 닦은 후 달리기 시작했다.
"다음 목적지까지 쉬지 않는다."
우두머리는 가장 앞에서 달리며 수시로 고개를 돌려 신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신기가 잘 따라오자 시름이 놓인 우두머리는 속도를 조금 더 높였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우두머리는 꼬리 하나를 꺼내고 일행을 불러모았다.
모두 꼬리에 손을 대고 숨을 죽였다. 신기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이 꼬리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기도라고 불리는 4등급 괴수인데 크기가 1미터 정도이고 까마귀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머리가 셋이어서 날지 못한다. 세 머리가 같은 방향을 보는 경우가 드물어서 날 수 없다.
그리고 새의 모습을 한 주제에 꼬리가 여섯 개나 달려있다. 일정 범위 안의 기척을 없애주는 능력을 갖춘 꼬리지만 시간이 흐르면 능력이 사라진다. 아마 지금의 꼬리도 그 효력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꼬리에 손을 대는 것을 보면 말이다.
20여 분의 시간이 흐르자 비황과 절군들이 사람 머리통보다 더 큰 발굽을 자랑하며 달렸다. 극도로 뭉치기를 좋아하는 몽귀나 함선과 달리 비황과 절군들은 흩어져서 달리기 좋아한다. 야생말들이 이 정도 규모로 뭉쳐서 달려도 겁이 날법한데 괴수들이 수만의 규모로 달리니 웬만한 심장으로는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시체꾼들은 전부 생사가 오가는 경험을 최소 한 번씩 한 자들이고 신기는 빙룡을 믿고 태연자약했다. 우두머리는 괴수들이 다 지나가기 전까지 신기가 돌발행동을 할까 봐 계속 지켜보았다. 괴수들이 전부 지나자 시체를 확인하지도 않고 앞으로 달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번 괴수 무리를 제때에 지나야 뒤의 일정이 안전해진다. 그 뒤로부터 신기는 괴수 무리를 먼 거리에서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밧줄 세 가닥에 의지해서 협곡을 건널 때 조금 겁이 났지만 그래도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사흘이 되어 황산에 도착하니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면적이 천이 넘는다고 했지만, 그 면적이 표면적이 아닌 평면적이다. 산의 표면적으로 계산하면 아마 면적이 만이 넘을 수도 있다. 높이 솟은 봉우리들을 보며 어떻게 골드 드래곤의 지혜를 찾을지 고민했다.
'잠깐. 모산도사의 손에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이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말이겠지?'
"혹시 황산에서 사람의 흔적을 발견한 적이 있느냐?"
시체꾼들은 신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친놈 보는 듯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일말의 오해할 여지도 없는 확답에 신기는 퀘스트를 쉽게 해결하려던 소망을 버렸다. 사흘 안에 찾지 못하면 다음에 또 오면 된다.
황산에는 저등급 괴수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등급 괴수들은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데 어딘가로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 곳에 머무를 때도 한자리에 있지 않고 계속 일정한 규칙으로 움직인다. 만약 저등급 괴수들이 있다면 이미 일행들이 그 기척을 포착했을 것이다.
"저등급 괴수가 없다는 것은 이곳이 고등급 괴수의 영역이라는 뜻이지. 너희들은 고등급 괴수의 둥지를 찾으러 온 것이구나. 재밌어 보이니 나도 도우마."
고등급 괴수들이 저등급 괴수들과 어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생김새가 비슷한 경우뿐이다. 천구가 시구와 한로와 섞여서 다니고 궁기가 대무와 흑대풍과 같은 영역을 사용하는데, 이들이 개나 소를 닮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말을 닮은 숙호와 박은 제외하고, 살쾡이를 닮은 환도 제외해야 하고, 이곳 환경이 물고기 모습을 한 괴수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분명 새의 모습을 한 괴수겠구나."
호랑이나 멧돼지 혹은 원숭이의 모습을 한 괴수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만약 그런 괴수들이라면 이들이 이미 둥지를 발견했을 것이다. 눈에 띄기는 쉬우나 활동반경이 넓어서 둥지를 특정할 수 없는 새의 모습을 한 괴수가 이들의 목표일 가능성이 크다.
'빙룡, 괴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어?'
시체꾼들의 경악으로 찬 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신기는 빙룡에게 질문했다.
'사십여 리 떨어진 곳에서 괴수의 기운이 느껴진다. 방향은 태양이 뜨는 방향에서 조금 위로 비틀면 된다.'
"내 경험에 의하면 새의 모습을 한 괴수들은 높은 곳을 좋아한다. 저기 보이는 저 봉우리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나는 천도봉이고 하나는 연화봉입다. 수색해 봤는데 괴수 없습다."
괴수는 먹지도 싸지도 않는다. 그래서 괴수의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신기는 빙룡이 괴수의 기운을 감지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억지를 부리기로 했다.
"내 풍부한 경험에 의하면 분명 저 두 봉우리에 괴수가 있다. 만약 사흘 안에 괴수를 발견하지 못하면 너희에게 금화 하나씩 주겠다."
신기의 주장에 시체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석을 몇 개 챙겼고 안내하는 대가로 금화 열 개나 얻었다. 거간꾼에게 신기가 이미 금화 두 닢을 주었기에 따로 수고비를 줄 필요도 없다. 괴수를 발견하면 좋고 아니면 금화 한 닢씩 생기는 거니 손해가 전혀 없다.
신기는 괴수를 찾은 후 군에 제보하고, 군의 특수부대가 괴수를 처단할 때 함께 와서 모산도사의 종적을 찾아볼 생각이다. 고등급 괴수가 사라져도 저등급 괴수들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군도 이곳을 관리지역으로 정할 것이다. 고등급 괴수를 처단한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고등급 괴수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다가 시체꾼들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저으며 기도의 꼬리를 버렸다. 효력이 다한 것이다. 그 후 신기는 이들과 함께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래서 천도봉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되었다.
일행은 추운 계곡을 찾아 노숙했다. 괴수들이 추운 곳을 싫어하기에, 야외에서 춥고 서늘한 곳에서 노숙하는 것은 상식이나 다름이 없다. 건량으로 배를 채운 후 불침번 한 명을 세우고 잠이 들었다.
신기는 누군가 뺨을 톡톡 건드리자 곧바로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동굴 속이었고 시체꾼들이 한쪽에 축 늘어져 있었다. 알록달록한 화려한 옷을 입은 또래의 청년이 신기를 재밌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보니 밧줄에 묶여 있었다.
'빙룡, 밧줄을 얼려줘.'
신기의 부름에 빙룡은 묵묵부답이었다. 신기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위기상황에 봉착하자 신기의 직관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엥? 오백 살이 넘었다고?"
직관력이 알려준 정보에 신기는 그만 소리를 내어 말했다. 또래로 보이는 이상한 옷을 입은 청년의 나이가 오백이 넘었다는 것이다. 신기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용의 후손이 틀림없구나. 드디어 우리 모산파가 빛을 보게 되었다."
"용의 후손이라니 무슨 말입니까?"
신기의 직관력은 목숨이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고 알려왔다. 마음이 조금 안정되자 호기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신기의 질문에 모산도사는 신나서 대답했다.
"너 황제 알지? 우리 대한제국인들이 조상으로 모시는 분이잖아."
신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모산도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분이 바로 용인(龍人)이야. 인간의 모습을 한 용이시지."
"제가 황제의 후손이라는 말씀입니까?"
모산도사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나이가 오백이 되었다고 하니 경추가 걱정되었다.
"혹시 잘못 아신 건 아닙니까? 저는 치우의 후손인데요."
신씨 가문은 치우를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사실 치우가 아닌 신우라는 것이 가문의 주장이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신기여서 자신의 처지도 잊고 되물었다.
"치우는 인룡(人龍)이야. 인룡의 후손은 용의 기운을 품을 수 없어."
용인과 인룡의 구분이 궁금했다. 하지만 모산도사는 대화상대가 반가웠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신기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황제는 용인데 인간의 모습을 한 거다. 실제로 황제는 꼬리가 있어. 인간의 모습을 하면서 남은 용의 특징들을 꼬리에 몰아넣은 거지."
"치우는 인간인데 용의 힘을 가졌어. 그때 치우가 이겼다면 이 세상의 운명이 제대로 흘렀을 텐데, 하지만 바로잡을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야. 네가 새로운 황제가 되어 세상의 운명을 제대로 비틀면 돼."
'젠장, DPP가 1이 남은 것 때문에 나를 황제의 후손으로 오해한 것이구나.'
채 사용하지 못하고 남은 1의 드래곤 파워 포인트가 모산도사의 오해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빙룡의 기운을 오해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직관력이 정답을 알려주었다.
"제가 세상의 운명을 비틀 정도의 힘이 있나요?"
모산도사는 고개를 맹렬히 저었다. 감정표출이 참으로 격렬한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네 힘은 아주 미약하지만, 그것을 불씨 삼아 세상의 운명을 비틀 수 있다. 내가 너를 대한제국의 황제로 만들어주마. 다만 간단한 시험 하나를 통과해야 한다."
모산도사는 황금색 귀걸이 하나를 꺼내서 신기의 왼쪽 귀에 달았다. 귀걸이가 사라지고 신기의 귀에 문신만 남자 모산도사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이 귀걸이는 황제의 유품이다. 너는 마지막 시험을 통과했으니 내가 너를 대한제국의 황제로 만들어주마."
의도치 않게 퀘스트를 완성해버렸다. 하지만 신기에게 자유가 찾아오지 않았다. 모산도사는 이상한 향을 피워놓은 후 신기에게 말했다.
"너는 내 말에 고분고분 따르면 황제도 되고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도 된다. 하지만 예전에도 영웅이 될 수 있는 아이가 내 말을 듣지 않아 일을 망친 적이 있지. 그러니 당분간 이곳에서 얌전히 지내거라."
- 작가의말
또 퀘스트 날먹 했습니다. 물론 다음 화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자꾸 신기를 괴롭혀달라는 분들이 계시는데, 어른 안 만드는 거로 성차지 않으신가 봅니다. 많이 고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