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룡이 깨어났다.
"나 곧 남극으로 갈 거야."
신기는 어딘가 풀 죽어 보였다. 신기의 머리에 자리한 빙룡의 몸은 매우 투명해졌다. 점점 색이 짙어지던 뿔마저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옅어졌다.
"꼭 가야 한대? 내가 퀘스트 완성한 후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누군가 재촉한 건 아니야. 하지만 직감이 말하고 있어. 빨리 가야 한다고."
신기는 호주에서 왕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모두가 신기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신기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래서 신기는 가만히 앉아서 세상이 돌아가는 꼴을 다 알고 있다.
"대영제국 귀족들이 캐나다를 통해 아메리카 합중국에 진출하려다가 워싱턴 그 꼬마에게 된통 당했대. 그래서 북아메리카를 포기하고 남아메리카로 방향을 바꾸었대."
일본 정벌에 참여한 귀족들은 전부 죽었다. 그러나 후계자까지 끌고 간 멍청한 귀족은 없다. 그 후계자들은 구미호를 만나기 전까지의 전공을 근거로 유럽의 땅을 분배받았다. 대영제국은 일부러 도시 단위로 분배했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부분은 누구의 것이라고 명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영제국 실질적 지배자들의 예상과 달리 이들은 독립민주연맹이라는 이상한 단체를 만들고 서로 화합을 시도했다.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냈고 도량형도 미터와 그램을 기본 단위로 정했다. 파운드와 피트, 인치 등을 혼합하여 사용하는 대영제국과 다르게 미터와 그램만 인정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대영제국에 맹주의 자리를 약속하면서 자신들의 연맹에 들라고 유혹했다. 대영제국의 군사력이 연맹보다 훨씬 강하다. 굳이 맹주의 자리를 탐낼 필요가 없다. 힘의 격차가 클 때 명분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남아메리카 부족의 대이동으로 아메리카 합중국은 수많은 주술사를 보유하게 되었다. 마석으로 전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실력이 3등급 괴수에 육박하는 전사를 키워냈다. 그리고 전사와 주술사의 힘으로 영토를 급속히 확장했고 기웃거리던 대영제국의 군대에 매운맛을 보여주었다.
"러시아는 기차를 가지고 서아시아로 향했어. 무식한 놈들이라 그런지 먹을 게 생기니까 곧바로 다툼을 멈추더라고."
러시아는 언제 내전을 했냐는 듯이 대동단결해서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수백 년을 내전으로 보냈으면 앙금이 생길 법도 한데 이들은 그런 게 없었다. 대영제국이나 대한제국처럼 명분이나 체면 이런 걸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실리만 따지는 러시아인이다.
"대한제국은 엉망이 되었어. 황실이 너무 급하게 움직였지."
대한제국은 땅이 넓지만 교통이 불편하다. 그래서 황실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먼 거리까지 그 위력을 방사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 황실은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전부 제압하려 했다. 일부를 회유할 만도 했지만, 후지산의 음모가 들킬까 걱정되었는지 위협이 되는 세력은 모두 청산하려 했다.
하북과 가까운 산동과 하남 그리고 강소와 산서의 세력들이 가장 먼저 피해를 보았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곧바로 내전에 돌입했다. 대한민국은 그런 대한제국에 남아도는 무기를 비싸게 팔아먹었다.
김원견 일파가 귀족파에게 무기를 팔아먹었다. 황실과 연락이 있던 백유한이 황실에 무기를 팔아먹었다. 예전에 독립을 주장하던 독립군이 대한제국 황실을 돕고, 독립을 반대하던 김원견이 대한제국 독립군을 돕는 형태가 되었다.
"대영제국은 남아메리카로 눈을 돌렸어. 남아메리카가 무주공산이라는 정보를 얻었지."
전투력은 대영제국이 더 강하다. 그러나 지금은 최대한 많은 마석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이다. 마석 보유량으로 미래의 최강 세력이 결정된다. 괜히 인간끼리 전쟁을 벌이며 탄약과 소중한 병력을 소모할 겨를이 없다.
"호주도 개판이 되었어."
후지산이 봉인되면서 괴수가 새로 생성되지 않았다. 괴수의 수가 적어지자 호주는 주머니쥐의 세상이 되었다. 임신 기간이 석 달인 주머니쥐는 영역을 다투던 경쟁 상대가 사라지자 빠르게 번식했다. 점점 무리가 커지면서 대규모 괴수 무리와도 싸움을 벌였다.
잡식성인 주머니쥐는 먹을 게 부족하여지자 인간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신기는 귀찮았지만 사람들의 간청에 못 이겨 주머니쥐를 토벌했다. 주머니쥐는 괴수와 달리 인간의 영역을 마음대로 드나든다. 괴수의 세상일 때는 느긋하던 호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
"제일 엉망은 대한민국이야."
신현은 거북선을 지키느라 목숨을 부지했다. 목숨을 부지한 신현은 수백 척의 거북선을 이끌고 조어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본 유민 대표들과 담판을 한 후 일본 천황이 되어버렸다. 실질적인 국가의 운영은 일본 유민들에게 맡기고 신현은 왕 노릇만 하는 것이다.
일본 정벌이 끝난 후 거북선의 일부는 러시아와 대한제국 그리고 대영제국에 양도하기로 약조되어있다. 그러나 신현이 거북선을 전부 가지고 떠나는 바람에 대한민국은 양도할 거북선이 없다. 연합국 회의에 항의를 제출했지만 누구도 대한민국의 편에 들지 않았다.
일본이 선수를 쳐서 세 나라에 거북선을 일부 양도하기로 약조했다. 거기에 대한민국으로부터 받아야 할 거북선을 받으면 이 세 국가는 원래 받기로 했던 거북선의 2배를 받는다. 이익 앞에서 세 나라는 일치단결했다.
그때 일본이 어려움에 부닥친 대한민국에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 땅의 권리를 일본에 돌려준다면 조어도와 대만 땅을 대한민국에 넘겨주고 거북선을 만드는 데 드는 자원의 70%를 지원해주겠다는 협상이다.
대한민국이 이 협상에 응한다면 보유한 거북선 일부를 세 국가에 뇌물로 주어 거북선의 양도 기한을 3년 늦춰주겠다는 조건도 들어있다. 거북선이 전부 사라져서 일본 땅을 수복할 엄두도 나지 않은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이 협상에 응했다.
을사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강화도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원래 영토를 돌려주는 대신 조어도와 대만의 땅을 대한민국 소유로 한다. 일본은 거북선 150척을 건조하는 양의 자원을 대한민국에 보상으로 증여하며 대한민국이 세 국가에 거북선을 양도하는 날짜를 3년 뒤로 미루도록 적극적으로 돕는다.
"괴수의 위협이 사라지니 세상은 더욱 적나라하게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어. 그리고 대한민국은 가장 강한 힘인 나를 버렸고 말이야."
신기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물론 신기가 대마법사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하지만 굳이 필요를 따지지 않더라도, 핏줄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지금 대한민국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대한민국과 일본이 형제국이 되었어. 왕실의 핏줄이 같으니까 말이야."
5백만 인구의 대한민국이 백만도 안 되는 일본과 싸우면 반드시 이긴다. 대한민국 군대는 전투 효율이 가장 높은 군대다. 기신이 손대기 전부터 그랬고 기신이 손을 댄 후 전투 효율이 배는 좋아졌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나 대한제국이 은근히 일본을 감싸고 돌았다. 식량을 지원하던 산동의 공작이 일본 정벌에서 증발했고 공작가는 반란에 연루되어 멸문당했다. 식량이 부족하여 전쟁을 일으킬 여력도 없다.
"진짜 쌤통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 숫자는 적지만 괴수와의 전쟁으로 잘 단련된 군대다. 하지만 식량이 부족하고 이동 수단인 거북선이 없다. 괴수와의 전쟁 최전선이던 대한민국 영토에는 괴수를 찾아보기 힘들다.
군대의 규모를 줄이자니 사회 문제를 불어 일으킬 게 분명하다. 지금도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다. 젊고 건강한 군인들이 퇴역해도 할 일을 찾기 힘들다.
"멍청한 것들. 워싱턴이랑 연락해서 용병으로 뛰며 마석이라도 벌어오면 얼마나 좋아. 군사력이 부족한 러시아를 도와도 되고 말이야."
신기니까 가능한 발상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들은 정규군을 용병으로 파견하여 돈벌이할 생각은 아예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무기를 팔아서 얻어온 식량으로 당분간 버틸 수 있다. 대부분 귀족은 낙관적으로 몇 년 지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 차례네. 지난 시즌 준우승을 했어.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노릴 거야."
37라운드가 끝난 후 만났기에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번에 새로 영입한 선수들에 관해 얘기했다.
"한윤을 계약하는 일이 제일 재밌었어."
제작진은 기신과 노츠 카운티의 직원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한윤의 집으로 찾아갔다. 전혀 모르고 있던 한윤의 어머니는 화가 잔뜩 났지만, 카메라 앞이라 애써 참았다. 하지만 노츠 카운티의 계약 제안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거절했다.
귀를 막고 무조건 안 된다고 버티는 한윤의 어머니를 설득할 방법이 없었는데 의외의 돌파구가 생겼다. 한윤이 기신의 프로필을 어머니에게 보여준 것이다.
명문대 졸업에 대기업 출신이라는 말에 한윤의 어머니는 태도를 바꾸었다. 기신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차범수와 김시웅의 주급을 전해 들은 후 태도가 바뀌었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저 정도 돈을 버는 건 불가능하다.
"자꾸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해서 혼났어. 분위기를 보면 돈 봉투라도 찔러줄 기세더라고."
현기철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처음에 사기꾼 취급을 받았다. 예전에 에이전트라고 나타나서 외국 구단으로 축구 유학을 보낸다고 수백만 원 사기 친 놈이 있었다. 다행히 기신이 광고로 얼굴을 좀 알렸기에 오해는 빠르게 풀렸다. 현기철의 아버지는 기신을 잡고 술 한잔하고 가라고 억지를 부렸다. 방송에 나가기에 술은 안 된다고 제작진이 겨우 설득했다.
황동근의 부모는 둘 다 축구 팬이다. 기신을 한눈에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했다. 노츠 카운티가 황동근과 계약하려고 한다는 말에 황동근의 어머니는 눈물까지 흘렸다. 야구를 더 좋아하는 아들을 억지로 축구를 시켰는데 팔이 부러졌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받아주지 않아 혼자서 훈련을 견지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어. 네 세상과 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어느 쪽이 더 불행할까?"
신기의 물음에 기신은 깊은 고민을 했다. 괴수의 위협이 있고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신기의 세상, 자원이 풍부하고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협이 되는 세력도 없지만, 정신적인 결핍이 심한 세상, 둘 중에 어느 세상이 더 낫다고 평가하기 힘들었다.
"그냥 자기 세상이 더 불행하고 본인이 가장 불행해. 더 좋은 답은 생각나질 않아."
기신의 대답에 신기는 소리 내 웃었다. 확실히 남의 가슴에 꽂힌 비수보다 본인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다.
"너 혹시 호피 무늬 양복을 입고 남극으로 갈 생각이야?"
기신은 신기가 호피 무늬 양복을 입은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다만 상상만으로도 이상했다.
"무슨 소리야, 남극은 대륙 전체가 화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더워 죽는다고."
"잠깐, 너 남극이 전부 화산인 걸 어떻게 알았어? 남극은 미지의 대륙이라고 하던데."
신기는 한참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극이 전부 화산이라는 정보의 출처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법사의 직관력이 알려준 것도 아니다.
"혹시."
기신의 입술은 한참 달싹거렸다.
"누군가 세이브/로드 하는 게 아닐까?"
기신이 신기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기가 기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지금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로딩을 거듭하고 있을 수 있다. 기신이 팀을 이끌고 좋은 성적을 거둔 것도, 신기가 여러 상황에 잘 대처한 것도, 그 간의 경험이 무의식에 쌓여서일 수도 있다.
싸늘한 침묵만 무겁게 흘렀다.
- 작가의말
가끔 중간에 이렇게 궁금증을 유발해야 하더라고요. 물론 떡밥 회수를 빨리해야죠. 길면 던졌던 떡밥을 잊어버릴 수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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