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 의혹을 품다
조용하던 경기장에 작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노츠 카운티의 팬들은 그레이의 공이 골대안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옆그물에 걸렸는지 순간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장이 조용해지고 그레이가 미친듯이 달려가자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힘껏 소리를 질렀다.
경기가 동점 상황이 되자 포체티노는 곧바로 선수 교체를 진행했다. 공격 쪽에 힘을 두는 것을 확인한 기신은 선수들에게 맹공을 요구했다. 교체로 올라온 선수들이 수비에 허덕이다 보면 공격 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4부리그 경험이어서 프리미어 레벨의 선수들에게 먹힐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리암 워커는 왼쪽 윙으로 출전했지만 전반전에 크게 재미를 보지 못했다. 전반전에 스벤이 상대 왼쪽 풀백을 끌어갔지만 오른 편의 튜틀이 수비에 허덕여서 미드필더들이 그쪽으로 지원을 많이 가야 했고 그로 인해 생긴 중앙의 수비공간을 메꾸느라 몇 번 없는 반격에 가담하지 못했다.
오코너의 패스를 받은 워커는 돌파 후 센터링을 할 것처럼 페이크를 하고 안으로 꺾어 들어갔다. 토트넘의 왼쪽 풀백이 급하게 따라 붙자 슈팅을 할 것처럼 페이크를 한 뒤 헌터에게 패스했다. 헌터는 페널티 구역이 한 발자국 앞에 있자 공을 몰고 페널티 구역으로 진입했다. 기신이 페널티 구역에 들어가기 전에 슈팅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미적거린 바람에 곧바로 두 명의 수비수에게 앞길을 차단 당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부름 소리가 들리자 고민도 없이 백 패스를 했다. 헌터의 패스를 받은 그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공만 보면서 슈팅을 때렸다. 슈팅하기 전에 한번 골대 위치와 키퍼의 위치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레이는 공격 훈련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그레이의 뒈져라 슈팅은 크로스바에 맞아 땅에 한번 튕긴 뒤 회전에 의해 골대안에 빨려 들어갔다. 역전에 성공하자 기신은 빠르게 선수 교체를 진행했다. 수비 능력이 약하고 체력도 거의 방전된 오코너를 내리고 수비수 한 명을 추가했다. 오른쪽 윙을 내리고 안투이를 풀백으로 투입한 뒤 튜틀을 윙백의 위치로 올려 오른쪽 수비를 강화했다.
노츠 카운티가 수비 진영을 뒤로 물리자 역전을 당한 토트넘은 어쩔 수 없이 진영을 올려야 했다. 반격 전술로 선회한 노츠 카운티는 공을 잡은 상황이 되면 튜틀과 헌터가 역습을 시도했다. 원래 체력이 좋은 튜틀은 안투이와의 경쟁에서 조금 밀려 출전 시간도 적어서 후반전 70분에도 질주가 가능했다.
헌터는 기신의 지시를 명심하며 절대 수비를 도우러 뒤로 가지 않았다. 헌터가 중앙선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상대편 선수 두 명을 묶어놓을 수 있다. 차라리 그것이 수비를 돕는 일이다.
공을 빼앗은 그레이는 헌터를 향해 패스를 했다. 하지만 정확도가 형편없어 헌터가 공을 잡았을 때는 상대 수비수를 등지고 있었다. 볼 컨트롤이 정교하지 못하고 덩치도 크기에 안정적으로 몸을 돌리기 어렵다. 어림짐작으로 튜틀이 있을법한 곳으로 패스를 했다.
헌터의 패스 역시 정확도가 부족하지만 튜틀은 공을 잡아낸 뒤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상대를 완전히 제치지 못한 상태에서 시도한 크로스는 수비수의 다리에 맞아 굴절되었다. 때마침 페널티 구역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헌터가 공을 향해 뛰어갔다.
누가 봐도 공을 멈추지 않고 곧바로 슈팅할 타이밍이다. 모든 관객이 그렇게 생각했고 토트넘의 수비수도 그렇게 생각했고 경기장에서 축구 경기를 지켜보는 다섯 살 꼬마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헌터는 작전 수행능력이 출중한 선수이다. 기신의 당부를 명심하고 페널티 구역 안으로 드리블을 시도했다.
192센티의 거구가 잔디에 쓰러지는 소리는 굉장히 컸다. 골대 근처에 현장 소리를 채집하는 마이크가 있어서 유난히 크게 들린 것도 있다. 수비수는 슬라이딩으로 헌터의 슈팅을 방해하려 했는데 헌터가 슈팅이 아닌 드리블을 선택하는 바람에 그만 페널티 구역 안에서 반칙을 선고받았다.
화가 난 토트넘의 수비수는 심판을 찾아 따졌다. 헌터가 일부러 페널티킥을 유도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심판은 헌터가 먼저 드리블을 시작했다는 판단으로 페널티킥을 선언하고 수비수에게 노란 카드 한 장을 제시했다. 심판의 권위에 도전하면 노란 카드 하나 더 선물하겠다는 심판의 으름장에 수비수는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기신은 헌터가 캡틴에게 두 손을 싹싹 비비며 애걸하는 모습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선수들을 전부 훑어본 뒤 헌터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다는 느낌이 들자 페널티킥을 헌터에게 맡기라고 지시를 전달했다. 헌터가 희희낙락한 얼굴로 공을 내려놓자 토트넘의 젊은 골키퍼는 이를 악물었다.
헌터의 페널티킥은 키퍼가 점프한 방향의 반대쪽 골대를 스치며 골인했다. 누가 봐도 10점 만점에 10점짜리 완벽한 페널티킥이었다. 방향을 정확히 판단했다고 하더라도 막아내기 힘든 킥이었다.
공격의 고삐를 바짝 당긴 토트넘은 십분 동안 여섯 개의 유효슈팅을 때렸지만 전부 터너의 선방에 의해 막혔다. 경기가 점점 마감으로 치닫자 토트넘의 선수들은 더욱 급해졌고 진영은 점점 더 노츠 카운티 쪽으로 올라갔다.
코너킥 상황에서 키가 180이 안되는 선수들까지 수비에 가담했지만 최고 신장 192를 자랑하는 헌터는 중앙선 부근에서 어슬렁 거렸다. 세트피스 공격 시에는 협박용으로라도 사용할 수 있지만 수비시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헌터이다. 비록 2골의 여유가 있지만 헌터는 어릴 때부터 헤딩 연습만 시킨 유스 감독을 원망했다. 그간 반격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지만 슈팅 정확도가 너무 형편없어서 추가 득점에 실패했다.
코너킥의 퀄리티는 높지 않았다. 하지만 터너는 실수로 공을 잡지 못하고 놓쳐버렸다. 다행히 안투이가 발 빠르게 밖으로 차 냈다. 빠른 속도로 그 공을 잡은 튜틀은 시간을 끌 목적으로 앞으로 강하게 걷어찼다. 하지만 체력 소모가 심해 생각보다 멀리 차지 못했다.
공의 낙점을 향해 헌터와 토트넘 키퍼가 빠르게 달려갔다. 빠르게 달리면서 헌터는 토트넘의 젊은 키퍼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서워하는구나. 패널티 구역 밖이니까 헤딩을 해야 하는데 그걸 무서워하고 있어.'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이다. 헌터는 상대가 헤딩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그래서 공이 떨어질 때 몸을 날릴 것처럼 페이크 동작을 했다. 움찔한 키퍼의 머리에 공이 빗맞아서 빈 골대 방향으로 공이 흘렀다.
뒤로 넘어지는 키퍼를 지나쳐서 헌터는 공을 골대에 정확히 밀어 넣었다. 물론 공이 페널티 구역 안에 들어간 뒤에 슈팅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후반전 내내 감독의 지시를 완벽히 수행해 냈고 멀티골을 만들어낸 헌터는 자신의 데뷔 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경기가 끝나자 기자들은 기사를 작성하기에 바빴다. 이미 속보로 간단하게 경기 과정을 내보냈고 감독 인터뷰를 끝낸 뒤 완성된 기사를 작성해서 내보내야 한다.
"오늘 우리 선수들은 매우 잘해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운이 훨씬 없었죠. 슈팅수와 유효슈팅수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는 유효슈팅이 23개이고 상대는 유효슈팅이 7개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죠. 이것이 축구의 매력이라고 생각됩니다. 남은 시즌 동안 리그 경기에 몰두하도록 하겠습니다."
포체티노의 인터뷰는 빠르게 끝났다. 서로 형식적으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고 규정 시간을 채우자 곧바로 인터뷰를 끝냈다. 반대로 기신의 인터뷰는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올해 처음으로 프로팀 감독을 맡았는데 무려 11연승을 거두었군요. 노팅엄 현지에서 동양의 주술사라고 불리는데 그 연유가 무엇입니까?"
"그 부분은 저도 정확히 모릅니다. 노팅엄 데일리의 챔 기자와 연락해 보십시오. 그 별명을 지어준 장본인이거든요."
"경기 전 인터뷰에서 결승 진출을 장담했습니다. 남은 열여섯 팀 가운데 프리미어 팀이 대다수인데 아직도 노츠 카운티가 결승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승 진출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승이 목표죠. 달성 여부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노츠 카운티의 모두가 노력한다는 것이 중요하죠."
"이번 경기의 수훈선수라고 하면 그레이와 헌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오늘 아침에 갑자기 런던으로 불러왔다고 했습니다. 혹시 주술로 이 두 선수가 오늘 골을 넣을 것을 미리 예언한 게 아닌가요?"
"제 주술이 아니라 노츠 카운티 모두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주술인 것 같습니다. 몇몇 선수들이 과도한 긴장을 보여서 임시로 내린 결정입니다. 잘못된 결정이 아니라서 아주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 나는야 분주한 분계선 ###
신기는 입학 후 처음으로 마법 아카데미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키워드로 차원 간섭과 시간 회귀 마법을 넣었다. 수백 권의 책이 검색되자 추천 순으로 정렬한 뒤 다섯 권의 책을 빌렸다. 기숙사에서 다섯 권의 책을 탐독한 신기는 어질 거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젠장, 책을 꼭 이렇게 어렵게 써야 돼? 조금만 더 친절하게 풀어쓰면 마력이 사라지나?"
책은 차원 간섭과 시간 회귀에 대해 학술적인 관점에서 서술했다. 하지만 신기의 의문점을 풀어줄 만한 단서는 아예 없었다. 신기의 상식대로라면 게임을 저장 시점으로 로딩했을 때 캐릭터 기신의 행동은 변화가 없어야 한다. 다만 경기가 시작한 후 전술 변화나 교체에 따른 변화만 생겨야 하는 것이다.
"이건 마치, 음, 마치"
무언가 생각날 듯 말 듯하면서 신기를 괴롭혔다. 삽십여 번 게임을 로딩하면서 기신의 선발진은 몇 번의 변화를 일으켰고 결국에는 노팅엄에 남아있는 그레이와 헌터를 불러오기까지 했다.
"마치 게임 캐릭터 기신이 나와 동급의 천재처럼 생각되는군."
인생의 전환점이 된 부친과의 대면이 생각났다.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몰라도 아무 헛소리나 해댔고 예상외로 부친의 인정을 받아 마법 아카데미로 오게 되었다. 어릴 적에 적성검사를 할 때 마법사의 재능이 전무했는데 마법 아카데미에서는 갑자기 대마법사의 자질이 발견되었다.
기신은 꿈을 통해 '경험'이 생겼고 그 경험을 통해 더욱 훌륭한 선택을 내렸다. 원래는 불가능해야 하지만 기신의 게임기 속에서 CPU 역할을 하고 있는 용의 유물 덕분에 새롭게 로딩될 때 그전의 기억이 꿈의 형식으로 머리에 남아있다. 그게 아니라면 신기의 생각처럼 선발진은 똑같고 경기 중의 대응만 달라져야 했다.
신기 역시 기신과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시작점이 몇 번 새롭게 생성되면서 꿈을 꾸었던 기억은 사라졌다. 그저 자신이 단번에 부친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해서 마법 아카데미로 향했다는 식으로 기억이 남았다.
"아닐 거야. 절대 아닐 거야. 허튼 생각을 그만하고 도서관에서 책이나 빌려보자."
책들의 서술에 의하면 다른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은 용의 힘밖에 없다. 천사나 악마는 강림해서 직접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만 운명에 간섭을 하지는 못한다. 아마 그래서 이 게임도 간섭의 결정의 이름을 DPP(Dragon Power Point)라고 지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게임 캐릭터라면 상대는 DPP를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젠장,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빠지는데."
자신이 삼십분의 수련을 사십오분으로 늘린 것도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의 농간이 아닌지 의심되었다.
'젠장, 이제는 막 나가자. 그래서 혹시나 내 운명에 간섭하는 유저가 있다면 DPP를 다 소모하게 해야지. 그런데 만약 내 가정이 맞는다면 기신 역시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건가?'
- 작가의말
마지막 부분에서 설정을 조금 풀었습니다. 혹시 이해가 잘 되지 않으시면 댓글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명충이 되기 싫어서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좋아하는데 그게 꼭 좋은 건 아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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