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얼음보다 차갑다
이순신 호의 함장을 맡은 장보고는 운이 좋았다. 한 척밖에 안 되지만 장보고는 선장이 아닌 함장이라는 호칭을 원했다. 그리고 제주도를 떠난 뒤 만난 괴수들은 전부 배의 화력으로 제거 가능했다. 거기에 괴수들은 미리 목적지가 정해진 것처럼 이순신 호를 끝까지 쫓아오지 않고 어느 정도 뒤를 따르다가 다시 방향을 틀었다.
한 번은 거대한 물고기 모습의 괴수를 만난 적이 있다. 물고기의 몸인데 꼬리는 지느러미가 아니라 뱀꼬리를 닮았고 입의 형태가 호랑이와 비슷했다. 다행히 이순신 호에 큰 흥미를 가지지 않고 그냥 보내주었다.
6단계 괴수인 호교는 자신보다 덩치가 큰 상대에게만 적대감을 가진다. 속도를 위해 이순신 호는 중형선 크기로 만들어졌다. 호교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이순신 호를 너그럽게 보내주었다. 장보고는 잊지 않고 해도에 거대 물고기의 위치를 표기했다.
매우 고급 정보이기에 장보고는 모르고 있지만 호교의 고기를 가공해서 독성을 전부 제거한 뒤 복용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병들이 전부 치료된다. 대영제국의 마법사들이 지중해에 사는 호교를 잡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많은 자원과 목숨만 날렸다. 그래도 전투 과정에 조금 떨어져 나온 살점들을 이용해 장생불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대만으로 추측되는 섬에 도착한 후 장보고는 쉽게 상륙할 수 없었다. 해안가에 괴수들이 득실거렸기 때문이다. 거북선이 아닌 일반 배라면 이미 발각되어 괴수들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다.
배로 대만섬을 한 바퀴 도는 데만 보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결국에는 동쪽 해안의 절벽을 통해 이동문을 육지에 올리기로 했다. 이들의 임무는 육지에 상륙해서 땅을 깊게 판 다음 이동문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외력에 의해 칼자루와 손뼈가 분리될 것을 염려해 안전하게 땅속에 묻어야 하기에 먼저 땅을 파고 다음 이동문을 활성화시키라 명령을 받았다.
절벽 밑에 거북선을 세운 다음 몸이 날렵한 자들이 해안가의 벼랑을 기어 올라갔다. 경사각이 90도가 넘기 때문에 올라가다가 추락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경사각이 큰 관계로 추락하면 바다로 빠지기에 아이러니하게 목숨을 부지했다.
사흘간의 도전을 거쳐 끝내 절벽을 정복했다. 괴수들의 종적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법으로 처리한 밧줄을 밑으로 드리웠다. 그 밧줄을 타고 다섯 명이 더 절벽으로 올라갔다.
여섯 가닥의 마법 밧줄을 이동문을 포장하는데 사용된 외곽 틀에 단단히 묶은 뒤 마법 두루마리를 꺼내 이동문에 마법을 사용했다. 아직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 마법이 이동문에 제대로 먹혔다.
"절벽 오르는 사람들 모아놓고 깃털 마법이나 쓸 걸 그랬습니다."
한 선원의 말에 장보고는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거 하나 얼마인지 알아? 그리고 만약 올라갔는데 괴수들이 득실거리면 다른 절벽을 또 올라야 되는데 두루마리 다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여섯이 힘을 합쳐서 가벼워진 이동문을 위로 올렸다. 이동문을 올린 후 무기들을 챙긴 모든 선원들이 배를 버리고 절벽을 탔다. 깃털 마법을 받고 손쉽게 올라간 이들은 진지를 구축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은 이동문으로 돌아가면 된다. 이순신 호를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순신 호의 물과 식량은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돌아가는 길을 짧게 잡아도 한 달은 걸릴 것이니 아쉬운 대로 배를 버려야 한다.
돌이 많아서 땅을 파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다행히 해풍이 많이 부는 해안가 절벽 위를 괴수들이 기피하기 때문에 방해를 받지 않고 2미터 깊이까지 팔 수 있었다.
"함장, 밑이 전부 바위라서 더 파기 힘든데요. 돌을 깨려면 훨씬 넓게 파야 돼요."
망치를 휘두르기에 구덩이가 조금은 협소하다. 장보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이동문을 활성화시키기로 했다. 책임자가 건너와서 구덩이가 얕다고 하면 그때 더 깊게 팔 생각이었다. 책임자가 부러진 검을 들고 건너올 것이고 부러진 검이 도착하면 괴수들이 이곳으로 몰려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장보고이기에 잘못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이동문의 입력단자에 마력석을 가져다 대자 마력석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마력석을 절반 사용하자 이동문이 활성화되었다. 넉넉하게 준비하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부족하면 괴수를 사냥해서 보충해야 한다. 괴수들은 최소 수백이 무리를 짓고 단독 행동을 하는 괴수들은 4단계 이상이 대부분이며 3단계까지의 괴수가 홀로 다니는 모습은 정말 드물다.
괴수 사냥을 하지 않아도 되기에 모두 마음을 놓고 책임자가 건너오기를 기다렸다. 돌아가면 장보고는 귀족 작위를 받을 것이고 선원들도 크게 포상을 받을 수 있다. 다들 들뜬 기분으로 책임자가 오기를 기대했다.
제주도의 이동문에 불이 들어오자 곧 왕궁으로 전보가 갔다. 대한민국의 왕 신도와 왕세자 신현 그리고 공작인 김원견과 신무가 이동진을 이용해 제주도로 빠르게 이동했다. 부러진 검을 나무함에 넣은 뒤 천으로 꽁꽁 감싸서 든 기신이 활성화된 이동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무사히 다녀오라."
신도의 짤막한 말에 이어 신현도 입을 열었다.
"네가 훌륭한 일을 많이 해서 이 우형도 많이 기쁘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서 대한민국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기 바란다."
과묵한 신무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마지막으로 김원견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없어서 안 될 인재네. 어떻게든 무사히 돌아와 주길 바라네."
최근 김원견은 자신의 딸과 기신의 혼사를 추진하고 있다. 두 가문이 혈연관계로 맺어지면 갓 독립한 대한민국의 민심이 더 안정될 것이다. 김회국과 신요의 혼사도 동시에 추진 중에 있다. 다만 중요한 일이 남아있기에 부러진 검을 이전하는 계획이 완료된 뒤 구체적인 날짜를 정하기로 했다.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기신은 부러진 검이 들어있는 함을 들고 이동문으로 움직였다. 효천이 폴짝 뛰어 기신이 든 함위에 올라갔다.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의 강아지가 일 미터를 훨씬 넘는 높이로 뛰어올랐지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기신이 들어가고 20여 분이 지나서야 이동문의 빛이 꺼졌다.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이고 이동진이 생겨난 다음 이동문에 대한 연구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
"문득 생각난 건데 말입니다. 대마도에도 부러진 검과 같은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신무의 말에 김원견과 신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도 그 생각을 못한 것이 아니지만 그 판단을 이번 계획이 성공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몇 분 뒤 이동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이 들어옵니다."
"모든 군부대에 괴수 패턴이 변화할 것이라고 전달해라. 아마 대마도의 괴수들이 고르게 퍼질 것이다."
이동문에 불이 들어왔다는 것은 저쪽에서 일을 마치고 마력석을 투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때 신도가 이동문에 다가가더니 검을 뽑아서 이동문을 잘라버렸다.
"내 자식이기는 하지만 요즘 김은결과 연아와 가깝게 지내더군. 이 나라가 대영제국 꼴이 나는 것은 바라지 않소."
신도와 신현은 곧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신무는 김원견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하고 떠났다. 신도가 마법사들이 득세할까 봐 기신을 내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김원견을 견제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김원견과 겹사돈이 맺어지면 김원견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기신을 중심으로 마법사들이 뭉치려는 기미가 보였다. 그리고 일본 유민들이 기신을 많이 따랐고 군대에서도 출중한 지휘능력으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백유한과도 사이가 좋아 보였고 김원견의 지지까지 받으면 사실상 아무 공로도 없는 신현이 왕세자 자리를 지켜내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부러진 검을 가지고 이동했는데 아무 효과도 없으면 하루가 지난 다음 돌아오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곧바로 불이 들어왔다는 것은 부러진 검이 괴수들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뜻이다. 신도는 미리 신현과 상의한 대로 이동문을 파괴하여 기신이 돌아오는 길을 막아버렸다.
김원견은 가장 마지막에 나가는 신무의 등을 쳐다보았다. 가신들에 의해 영지에서 받들어지며 자라난 신현보다 신무가 훨씬 믿음직스럽다. 철없는 신현보다는 신도를 훨씬 더 닮은 신무가 다음 대 왕으로 적합하다. 은밀하게 신무에게 힘을 실어주어야겠다고 다짐하며 김원견도 밖으로 나갔다.
### 나는야 비열한 분계선 ###
이동문의 입력단자는 계속 마력석을 삼키고 있지만 불은 꺼져버렸다. 모든 마력석을 다 사용했는데도 이동문이 활성화되지 않자 모두 당황했다. 먼 곳에서 괴수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기신은 부러진 검을 묻은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목함째 넣은 뒤 돌덩이들로 구덩이를 다시 채웠다. 그 후 곧바로 이동문을 활성화시키려 했는데 두 번째 마력석을 갖다 댔을 때 갑자기 불이 꺼졌다.
"신 참장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들은 기신이 백작 위를 받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참장으로 호칭했다. 기신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이곳에서 수비를 하며 제주도에서 마력석을 더 투입해주기를 기다린다. 십분이 더 지나도 활성화되지 않으면 바다로 뛰어내려 거북선을 타고 움직인다."
다행히 현장지휘 10의 스텟이 작용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괴수들이 아직은 거리가 있기에 10분 정도 버틸 수 있다. 그 이상은 어떻게도 버티기 힘들다. 기신은 누군지도 모를 상대에게 애원했다.
'제발, 어떻게든 돌아가게 해주세요.'
### 나는야 신비한 분계선 ###
신기는 미식축구를 보면서 엉덩이를 들썩였다. 월드컵 따위는 동네 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았다. 미식축구야말로 진정한 사나이의 스포츠인 것이다.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신기이기에 편의점에서 사온 여러 가지 술을 차례로 입속에 부어 넣었다.
"그렇지. 제대로 날려버렸네."
홀로 세 명의 선수를 튕겨낸 건장한 흑인을 향해 신기는 응원을 보내주었다. 재방송임을 모르는 신기는 지금 경기가 진행 중인 것으로 오해하며 열심히 응원했다. 이미 승패가 다 정해진 경기인데도 말이다.
"가만, 내가 지금 DPP가 하나 남아있단 말이지."
신기는 오랜만에 직관력에 의지하지 않고 논리적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실험실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는 것은 직관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미지를 맞닥뜨릴 때 마법사의 직관력이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완전 미지의 세계로 온 신기는 거의 직관력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돌아가서 DPP로 기신을 미식축구 감독으로 만드는 거야. 그다음 다시 몸을 바꿔서 내가 미식축구 감독이 되는 거지."
신기는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계획이 참으로 대단한 것 같았다. 대마법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생각해낼 수 없는 절묘한 계획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몹시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의 육체가 '어른'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내 육체는 어른인데 내 영혼은 아직 총각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어른인 건가 총각인 건가? 영혼은 성결한 총각인데 육체는 타락한 비극의 남자, 그는 바로 백작가의 삼남이자 전설의 대마법사 신기."
한참 헛소리를 하던 신기는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분명 이곳이 더 재밌는데 왜 자꾸 돌아가고 싶은 거지? 하지만 돌아갈 방법 자체를 모르겠네. 아,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조건이 성립되었다.
- 작가의말
글쇠 : 다크님이 추천을 해주셨군요. 다크님과 저 사이에는 아주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일은 둘만의 비밀로 하겠습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 페이지에 같은 소설 추천글이 3개 있으면 안 됩니다. 운영자에 의해 무참히 삭제가 되거든요. 제 글이 아무리 재밌어 미칠 정도라도 당분간 추천 자제 부탁드립니다.
독자 : 응? 추천할 생각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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