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생각하는 건 포기한다
빅토르 한을 만나자 신기는 빠르게 말했다.
"제 신분이 탄로 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세한 대화는 둘이서 하죠."
빅토르 한은 대한민국에서 실종되었다고 발표한 신기가 멀쩡하게 나타나자 무언가 내막이 있음을 짐작했다. 중요한 신분의 사람이고 본인이 보장한다는 말로 소령을 돌려보냈다. 대한민국의 왕자로서 한 번도 위세를 부려보지 못한 신기는 빅토르 한이 부럽기만 했다.
"저는 아마 실종이나 사망으로 발표되었을 겁니다. 비밀리에 아주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죠. 제가 지금 신분을 숨기고 대한제국으로 가야 합니다. 저를 도와주시면 상응하는 보답을 하겠습니다."
"저희 연구에 대한민국 마법 협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가 엔진의 냉각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인데 마법진을 그리려면 엔진의 내구성에 무척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마법 무기를 만드는 방식으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고위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병기가 아니라 마법 무기라면 간단한 마법진만으로 구동할 수 있으니까요."
"몇 번이나 도움을 요청했지만, 러시아가 군사동맹을 거절한 것 때문에 마법 협회에서 계속 거절하고 있습니다. 마법 협회의 사람들을 설득해 주셨으면 합니다."
러시아는 처음에 엔진 표면에 마법진을 그려서 냉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엔진의 외피를 친 마나 성향의 금속들을 사용해야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잦은 마법진의 유지보수가 필요하다. 마법사의 힘이 부족한 러시아는 유지보수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마법 무기를 만들어서 엔진을 냉각하는 방식을 고민했다. 냉각의 정도가 다른 몇 개의 마법 무기를 만들어서 때에 따라 적당한 무기를 발동시키고, 열이 심할 때는 두 개 이상의 마법 무기를 동시에 발동시키는 방식으로 냉각의 효과를 달성하려고 한다. 하지만 마법진은 그나마 자료가 많지만, 마법 무기의 제작은 경험이 더 중요하다.
대한민국은 연아의 존재로 마법 무기의 제작 수준이 높다. 단순히 냉기를 뿜어내는 마법 무기는 러시아도 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만드는 무기마다 뿜어내는 냉기가 제각각이고 시간이 흐르면 그 정도가 변한다. 지금 빅토르 한에게 필요한 것은 원하는 만큼의 냉기를 안정적으로 뿜어내는 정밀한 마법 무기이다.
"제가 편지 세 통을 써 드리겠습니다. 김은결 마법 협회장과 연아 백작에게 한 통씩 쓰고 전라도의 백유한 후작에게 한 통 쓰죠. 많은 사람이 알면 일이 복잡해지니 이 사람들을 통해 은밀히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기는 빅토르 한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 통의 편지를 썼다. 자신이 현재 알릴 수 없는 비밀임무를 수행 중인데, 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빅토르 한을 도와 냉각장치를 완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편지의 작성이 끝나자 각각 다른 편지봉투에 넣은 후 마법인장으로 봉인했다.
"도움 감사드립니다. 대한제국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리죠. 그런데 궁금한 것이, 편지에 쓴 것처럼 엔진의 냉각장치를 완성하는 게 진짜 매우 중요한 일입니까?"
신기는 머릿속의 모든 지식을 총동원했다. 기신의 세상에 갔을 때 들었던 말까지 전부 동원해서 적당한 이유를 꾸몄다.
"지구온난화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근 수십 년 동안 온도가 지속해서 높아지고 있습니다. 괴수들을 안정적으로 막아내고 있어서 제대로 느끼지 못했겠지만, 괴수들이 점점 더 북쪽까지 진출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에 추운 곳이 사라지고 괴수들이 모든 곳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류 전체가 멸망할 수도 있죠."
"지금은 엔진의 냉각장치이지만 언젠가는 한 개 지역을 냉각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장치로 전장의 온도를 낮춰 버리면 괴수들의 전투력이 하락하죠. 괴수와의 전쟁에서 꼭 필요한 기술입니다."
빅토르 한은 신기의 말에 감탄했다. 자신은 겨우 엔진 하나만 생각하고 있는데 이제 스물이 갓 넘은 청년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온난화라는 처음으로 들어보는 말에 큰 울림이 있었다. 마법사의 직관력으로 매우 중요한 말임을 느꼈다.
"이렇게 큰 뜻을 품고 계셨군요. 혹시 제힘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언젠가 모든 인류가 힘을 합쳐야 할 시기가 올 것입니다. 그때를 대비하십시오."
신기는 수많은 거짓말을 늘어놓았기에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래서 빅토르 한에게 빨리 대한제국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는 기신처럼 앞뒤를 재면서 말을 꾸며낼 능력이 안 된다. 그러니 길게 생각하지 말고 당면한 문제나 해결하자.'
신기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예상이 되지 않는다. 일단 퀘스트를 완성하는 것만 생각하기로 했다.
빅토르의 도움으로 신기는 대한제국으로 순조롭게 넘어갔고 엔진마차 한 대까지 얻었다. 아프리카에서 슬쩍한 마력석만 해도 엔진마차로 대한제국 영토를 몇 바퀴 돌 정도는 된다. 거기에 더욱 기쁜 사실은 대한제국이 그사이 영토를 많이 확장해서, 황산은 비록 수복하지 못했지만, 근처까지 길이 뚫려있다는 것이다.
신기는 엔진마차를 운전해서 황산으로 향했다. 황하 이북은 괴수가 거의 출몰하지 않고 황하와 장강 사이에는 주요 도시들이 건설 중이고 도로로 군대들이 자주 순찰을 했다. 아직 수비선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아서 가끔 괴수들이 출몰하기 때문이다.
원래 예상대로라면 더 많은 땅을 회복해야 하는데 괴수들의 패턴이 너무 심하게 바뀌는 바람에 장강에서 멈추었다. 해안가보다 남에서 북으로 올라오는 괴수들이 많아져서 황하와 장강 전반에 걸쳐 수비선을 새로 만들고 있다. 해안가의 수비선을 완전히 철수할 수도 없기에 자원의 소모가 심해, 예상했던 것만큼 좋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중간에 순찰대와 몇 번 만났지만, 군인들은 신기를 철부지 귀족 도련님으로 치부했다. 미처 피하지 못하면 마지못해 경례를 올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괜히 우물쭈물하다가 신기에게 잡혀 심부름꾼으로 전락할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다.
덕분에 신기는 순찰대를 정보원 삼아 길을 헤매지 않고 안경시에 도착했다. 안경에서 장강을 건너 450리 길을 더 가면 황산이다. 문제라면 대한제국군이 아직 장강 하류를 넘지 않았다. 지금 대한제국은 상류 쪽에 더 많은 신경을 쏟고 있다.
신기는 엔진마차를 여관에 세워놓고 안경의 길거리를 구경했다. 건설을 시작한 지 석 달밖에 안 되어 아직 제대로 된 건물이 많지 않았다. 강제로 이주당한 평민들의 얼굴에는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했다. 삼십 년 동안 세금을 면제한다고 하지만 괴수들이 며칠에 한 번씩 출몰하는 곳이고 군대의 수탈을 가끔 받아야 한다. 차라리 추운 북방에서 배를 곯으며 마음 편하게 사는 게 훨씬 낫다.
신기는 지금 괴수 시체를 줍는 자들을 찾고 있다. 괴수는 가끔 요해가 겉으로 드러나 있는데 요해를 강하게 맞으면 죽는다.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몇 시간이 흐르면 시체가 증발해 사라진다. 괴수 시체를 줍는 시체 꾼들은 '목'을 아는 자들이다. 적당한 목에서 기다리며 시체를 줍기에 괴수들의 이동 경로를 군대보다 더 잘 아는 자들이다.
괴수들은 목적지까지 급하게 일직선으로 달리는 습성이 있다. 가끔 좁은 길목을 지나며 서로 심하게 부대끼는데 그럴 때 요해가 가격당해 죽는 괴수들이 드물게 나타난다. 마석 하나만 주우면 평민들에게는 일 년 농사를 짓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가끔 게으른 자들이나 담대한 자들이 시체꾼 노릇을 한다. 등급이 높은 괴수의 행적을 제보해도 군에서 포상이 있기에 의외로 인기가 있는 직종이다.
신기는 바쁘게 움직이는 자들 사이에서 여유가 있어 보이는 자들을 주로 여겨보았다. 느긋한 걸음으로 걷는 콧수염이 신기의 눈길을 끌었다. 옷은 평민들의 옷이지만 깨끗해 보였고 몸에 적당한 살집이 있었다. 목덜미가 다른 곳에 비교해 심하게 타지 않은 것을 보면 뙤약볕 아래에서 힘든 일을 하는 자는 아닌 것 같다.
"나으리, 무슨 분부가 있으신지요?"
신기가 손으로 딱 소리를 내고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콧수염은 곧바로 달려와 굽신거렸다. 대처가 능숙한 것을 보니 사람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이 자는 귀족을 많이 상대해본 티가 난다.
시체꾼들이 주운 마석은 보통 귀족들에게 판매한다. 대한제국의 귀족들은 작위와 직위에 따라 해마다 정해진 마력석을 분배받는다. 하지만 마력석을 써야 할 곳이 많기에 시체꾼들로부터 마석을 사들이는 귀족이 많다.
"내가 멋진 모험을 하려고 황산에 가려고 하는데."
말을 끊은 신기는 금화 두 닢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움직이는 손을 따라 콧수염의 눈알도 이리저리 움직였다.
"길 안내가 필요해서 말이야."
"죄송합니다, 나으리. 황산까지 가는 길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 금화 두 닢은 소개꾼에게 주는 돈이고, 길 안내해주는 자는 열 닢을 줘야지."
콧수염의 목울대가 소리 없이 크게 움직였다. 아마 마른침을 삼키는 것이리라. 콧수염이 대답이 없자 신기는 금화를 다시 품에 넣었다.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겠군."
"나으리, 적당한 자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신기는 몸을 다시 돌렸다.
"천한 자들이라 귀한 분을 대하는 예를 모릅니다. 심기가 불편하실 수도 있습니다."
"천한 놈들이 천한 짓을 하면 내가 이해해야지. 천한 놈들과 똑같이 하면 나도 천한 놈밖에 더 되겠느냐. 다만 길 안내는 확실히 해야 한다."
"염려 마십시오. 황산에 고등급 괴수가 나타나서 몇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다만 황산까지 왕복하는 동안 안내자의 지시대로 움직이셔야 합니다."
"내가 초짜인 줄 알아? 잔소리 말고 안내나 해."
콧수염은 신기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군인들의 눈에 띄면 귀족을 현혹한다고 잡혀가서 문책을 당할 수도 있다. 군인들이 잘 찾지 않는 곳에 도착한 후 신기에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안내꾼을 설득하러 갔다.
십여 분의 시간이 지난 후 콧수염이 한쪽 귀가 거의 사라진 사내를 한 명 데리고 왔다. 아무래도 위험한 일을 하는 자들이다 보니 이런저런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신기는 콧수염에게 금화 두 개를 던져주고 쫓아냈다.
"언제 출발하지?"
금화 다섯 닢을 던져준 신기는 다짜고짜 질문했다.
"내일 새벽, 두 시에서 세시 사이."
"집합장소는?"
"사람 보내겠습다."
귀족을 상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말투가 조금 이상했다. 하지만 신기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다만 황산이 얼마나 큰지 걱정되었다.
"황산의 면적이 어느 정도 되지?"
"천이 넘습다."
천이 넘는다면 엄청 큰 면적이다. 영지로 받은 경기도의 면적이 만이 조금 넘는다.
'빙룡, 너 언제 깨어나는 거야?'
'아직 모른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다.'
"황산까지 가는데 며칠 걸리지?"
안내꾼은 손가락 세 개를 뽑아 들었다. 하루에 150리씩 이동해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도 하루에 13시간은 걸어야 한다. 대만에서 힘을 얻으면서 육체도 든든해진 신기지만 아직 강행군을 해본 적은 없다.
"지금 가서 미리 자둘 테니까 잊지 말고 나를 데리러 오거라."
신기가 퀘스트의 완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이때 빅토르가 신기의 편지를 가지고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표면적으로는 군사동맹에 관한 협상을 위해서이다. 빅토르가 세 통의 편지를 세 명의 사람에게 전달했고 그로 인해 대한민국은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 작가의말
기신은 길게 보지만 신기는 눈앞만 봅니다. 오늘만 사는 남자 신기, 그는 과연 글이 끝날 때까지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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